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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주경야독 철도원, 나노분야 대가로 성장하다


이영희 성균관대 물리학과 및 에너지학과 교수

1974년 인천 부평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앳된 얼굴의 한 청년이 고민에 빠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학창시절 그렇게도 열심히 했던 운동도 그만 둬서 몸무게도 10kg이나 늘었다. 
발 끝을 쳐다보면서 집과 직장을 왔다갔다하는 시계추 같은 일상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10년 뒤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국립철도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역무원으로 근무한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 없었다. 
10년 뒤의 모습을 생각하면, 10년 이상 철도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아른 거렸다. 
‘좀 더 다른 삶이 있을텐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0년 뒤의 나의 모습은 어떨까 고민하던 앳된 얼굴의 철도원이 바로 나노과학 분야 석학으로 꼽히는 이영희 성균관대 물리학 및 에너지과학과 교수다.

지기 싫어 미친 듯 공부했다

이 교수는 2000년대 중반 국가석학으로 선발되고, 2012년 10년간 10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기초과학연구원(IBS) 연구단장으로 선발되기 전부터 탄소나노튜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 화려한 조명을 받았지만 그가 살아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소위 전라북도 깡촌에서 자란 이 교수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다른 사람들처럼 특별히 뭐가 되겠다는 꿈 같은 것을 꿀 겨를도 없었다. 
그저 열심히 공부해서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만 막연하게 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나라에서 돈을 대주는 국립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유도 선생님의 눈에 띄어 유도를 시작하게 된 소년 이영희는 공부보다는 유도가 더 재미있었다.

“고등학교 입학해서 유도를 시작하게 됐는데 재미있는 거예요. 
문제는 유도부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작했고,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한 것이라서 흰 띠를 매고 시작한거예요. 
제가 뭘 한 번 시작하면 푹 빠지는 스타일이거든요. 
늦게 시작했지만 친구들한테는 지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3시30분 수업이 끝나면 6시30분까지 운동하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수업시작 전까지 혼자 운동했어요. 
다른 생각이요? 
멋지게 기술을 걸어서 상대를 넘길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니까요. 
하하하.”

운동에만 빠져있었던 그의 학창시절 성적은 어땠을까. 
이 교수는 “대부분의 생활을 운동하는데 썼지만 반에서 10등 정도는 했다”며 “직장을 다니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학창시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수학과 영어는 손에서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나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할 당시에는 국문학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일단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고 결심을 한 뒤 그는 오전에는 역무원으로 근무하고 밤에는 종로 YMCA에서 대학입시반 수업을 듣는 등 주경야독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겼다.

소설가를 꿈꾸던 이 교수는 당시 박운상 선생이 가르치는 분석물리라는 과목을 들으면서 ‘물리학이 문학만큼이나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학원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칠판에 써가며 문제를 푸는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구로 실험을 하면서 물리를 알기쉽게 설명했다는 것.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인생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는 순간이었다.

“박운상 선생님은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그 분 덕분에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지요. 
박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간단한 개념을 갖고 설명하고, 그런 것들을 저렇게 실험으로 보여줄 수 있구나 하는 것이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예요. 
물리를 배우면 나도 자연 현상에 대해 잘 알 수 있겠구나 해서 물리를 공부하기로 한거죠.”

그렇지만 공부와 직장일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교수도 ‘지금까지 살면서 그 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주경야독을 한 지 1년 만에 결핵이라는 당시에는 상당히 큰 병을 얻게 됐다. 
이렇게 공부해서 뭐하나하는 생각에 그는 2달 동안 직장에 휴직을 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머리도 박박 밀어버리고 두문불출하며 몇 주를 보냈다. 
‘과연 나는 뭘 해야 할까’하는 고민에 빠진 끝에 얻은 결론은 ‘일단 원하는 것을 한 번 해보자’는 것.

그렇지만 어려운 집안 사정상 공부를 계속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교수의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 됐지 대학은 왜 가냐며 반대를 했던 것이다. 
불도저 같은 이 교수의 뚝심은 결국 아버지의 고집을 꺾게 만들었다.

유학 생활 “어려웠지만 재미있었다”

이 교수는 유학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때였다고 회상했다.

이 교수가 유학을 결심한 것은 어찌보면 단순했다. 
공부를 계속하더라도 학비를 내지 않고 다닐 수 있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 중 하나가 KAIST에 진학하는 것. 
더군다나 KAIST 대학원을 가게 되면 군대도 가지 않아도 돼서 그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병역법이 나이가 일정 이상이면 무조건 군대를 가도록 바뀌어버리는 바람에 3학년 1
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가게 됐다.

군대를 다녀왔으니 KAIST 대학원에 대한 매력도 줄어들고, 더군다나 국내 대학원을 진학한다는 것은 계속 공부를 하고 싶은 이 교수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 대학원 연구시설이 열악했기 때문.

미국 켄트대로 유학을 간 그는 돈 걱정 없이 좋아하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재미있는 유학생활을 보냈단다. 
특히 고체물리로 이론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석박사 과정을 4년 만에, 사실상 초고속으로 마쳐서 동갑내기들보다 대학 진학이 늦었다는 것을 상쇄했다.

반도체 이론이 주전공이었던 이 교수는 1991년 탄소나노튜브가 세상에 처음 소개됐을 때 또 다른 세계를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물리학자들은 이론이나 응용 하나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탄소나노튜브는 기초연구이면서도 실험·응용연구가 가능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사실 이론물리하는 사람들은 실험 하는 것을 좀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공업계 고등학교 통신전자과 출신이기도 하고, 직장에서 열차 무전기도 고치고 했던 경험이 풍부하죠. 
현장감에 익숙하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실험하고 응용 연구하는 것에 두려움 같은 것이 없었죠.”

금속성과 반도체성 탄소나노튜브가 혼재해 있는 탄소나노튜브에서 반도체성 탄소나노튜브만 대량으로 분리·추출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이 교수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반도체 개발로 연결하는 데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구조로 봤을 때 기초과학이 단지 기초만으로 끝나기보다는 산업적으로 응용 가능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원들에게 항상 기초를 하되 응용에 목표를 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좌절 절대 금지!

이 교수는 연구원들이 연구에 집중하도록 계속 독려하면서도 항상 ‘좌절금지’를 강조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만큼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에 부닥칠 때가 예사이다. 
그는 항상 “자기 능력의 99% 이상을 쏟아부으며 연구를 하되 절대 좌절하지 말고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일을 되돌아보라”고 격려한다.

그는 연구원들에게 항상 희망을 갖고 목표를 향해 전진해 가라고 충고한다. 
트리나 포올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을 인용하며 “애벌레가 화려한 나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교수는 항상 연구하는 사람은 몸이 건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부를 하면서 건강을 잃어봤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다.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단련하는 것도 연구를 위해서란다. 
이 교수는 요즘도 밤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버틸수 있는 것도 꾸준한 운동 덕분이다.

그의 인생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인생 최종 목표요? 
어느 연구자나 마찬가지겠지만 좋은 연구성과를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최종 목표가 뭐다라고 딱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를 연구하면 그 뒤에 또 다른 연구주제가 따라오고, 또 따라오고 하는데 이렇다라고 정해버리면 재미가 없지 않겠어요?”

이 교수는 1986년에 학위를 받고 지금까지 27년여 연구를 해왔는데, 사실 연구비 때문에 연구주제도 마음대로 선정하기 어려울 때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지난해 IBS 연구단장으로 선정되면서 그는 ‘이제 연구비라는 것에서 해방돼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겠구나’란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단다.

“IBS 단장으로 선정됐을 때 소풍가는 어린애 같이 기뻤습니다. 
명예나 그런 것 때문은 절대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이제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 연구를 통해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돌려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지난 1년은 앞으로 연구를 어떻게 이끌어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아까 인생 최종목표의 어느 정도 도달했느냐고 물으셨지요? 
이제 제대로 한 걸음 뗄 수 있는 준비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자에게는 땀과 정직함이 자산

이 교수가 생각하는 연구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성실함이다.

그는 “너무 뻔한 답변 같지만 성실함은 누가 뭐래도 중요하다”며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노력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또 정직함을 강조했다.

“간혹 연구자 윤리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구자가 성실하지 않으면 생기는 문제, 정직하지 않으면 생기는 문제는 치명적입니다.
과학은 서로 간의 암묵적 약속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구를 위해 데이터를 조작한다면 그 순간부터 과학의 존립기반은 없어지는 겁니다.”

“과학이 무엇인가요”라는 우문(愚問)을 마지막으로 던져봤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학문을 하는 사람에 대한 자세를 이야기하며 말을 마쳤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 숨을 쉰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열망과 같은 말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는 호기심과 열망을 버리는 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숨이 멎어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673&cur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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