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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금융 IT 산업, 새 시대를 열다!


유시완 하나은행 정보전략본부장

촉촉하게 가을비가 내리던 9월의 어느 날, 유시완 본부장을 만나기 위해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하나은행 잠실 전산센터를 찾았다. 
최근 ‘금융 IT 보안’이 중요한 사회 문제로 떠올라서인지, 사무실에선 낯선 이의 방문을 경계하는 듯 보였다.

삼엄한 사무실 분위기는 물론, 냉철하고 날카로운 이미지의 최고정보책임자를 만날 생각에 저절로 긴장이 됐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이내 푸근한 미소로 기자를 반기는 유 본부장을 만났다. 
어느덧 경계심은 허물어졌고,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그의 인생을 캐묻기(?) 시작했다.

인생의 첫 번째 좌절, 적록색약 판정
의대 진학의 꿈을 포기하다

학창 시절의 그는 집중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래서 뭐든 한번 결심하면 끝을 봐야 했다. 이
런 성격 덕분인지 수학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논리’를 바탕으로 생각의 꼬리를 물고 정답을 찾을 때 느끼는 짜릿함이 좋았다. 
어쩌면 수학과의 인연은 그때부터였나 보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별다른 고민 없이 이과로 진학했다. 
좋아하는 수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인생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라고 했던가. 
문·이과를 선택하고 나니 이어서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막연히 ‘의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의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의대 진학을 꿈꾼 지 2년 남짓 지났고, 서서히 성적도 안정권에 접어들며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신체검사’를 받기 전까지 말이다.

시간이 흘러 몇 군데 원서를 쓰고 절차에 따라 신체검사를 받았다. 
들 신체검사는 형식상 절차이니 마음 편히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원인은 ‘적록색약’. 
적색과 녹색의 감각이 둔하여 두 색을 혼동하기 쉬우니 의대 진학은 어렵다고 했다.
학창시절의 꿈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진로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걸까?’

이런 그를 안타깝게 여긴 고3 담임선생님은 그에게 계속해서 이공계 진학을 추천했다. 
수학을 가르치시던 담임선생님은 그의 탄탄한 수학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에, 수학과를 추천했다. 
조금 망설였지만 ‘하던 가닥’을 믿고, 고려대 자연계열을 선택했다. 
이번엔 입학 장학생으로 합격했고, 우여곡절 끝에 이십대 청춘이 시작됐다.

새로운 방황의 시작과 끝
인생의 전환점, 군대 포술 경연대회

워낙 나라가 소란한 시기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틈만 나면 수업에 빠졌고, 나라를 상대로 끊임없이 불만을 표출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앞장서서 학생운동에 나서진 않았지만, 같은 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방황’과 ‘고민’이라는 두 단어로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 시절은 ‘학사경고’와 함께 화려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나니 가야 할 방향을 잃은 것 같았다. 
뭔가 변화가 필요했다. 
어차피 다녀와야 할 군대라면 빨리 갔다 오자고 마음먹고, 서둘러 입대를 준비했다.

군대에 들어가 주특기는 ‘포병’으로 정해졌다. 
자연계열 출신이라는 이유로 선발된 것이다. 
포병은 전쟁 시에 대포, 로켓, 미사일 등을 쏘아적을 공격하거나 아군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포를 조작할 때 여러 가지 각도와 수치를 계산하고, 포를 쏘아 올리는 시끄러운 상황에서 숫자를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관련 숫자를 잘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당시 포병은 사회에서 숫자를 자주 사용하던 금융권 출신 병사들이 많이 맡았는데, 유 본부장 역시 전공으로 미뤄 짐작해 숫자를 잘 다룰 것 같다는 이유로 선발됐다.

주특기가 정해지고, 처음에는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작고 예쁘게 쓰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은행원 출신의 선임들은 주산과 암산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특별히 따로 시간을 내어 손으로 빠르게 연산하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또한 전시에는 촌각을 다퉈 계산을 하고 명령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포병 숫자(1-하나, 2-둘, 3-삼, 4-넷, 5-오, 6-여섯, 7-칠, 8-팔, 9-아홉, 0-공)도 실수 없이 외워야 했다. 
그러나 문제없었다.
집중력 하난 남부럽지 않을 만큼 탁월하지 않았던가. 
정말 재미있었다.
누가 시켜서하는 공부가 아닌,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공부는 참 오랜만이었다. 
대학 생활을 하며 잠시 잃었던 활력을 되찾은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병 숫자와 계산식이 익숙해져 갈 때쯤 주기적으로 열리는 ‘포병여단 포술 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됐다. 
이 대회는 주기별로 포병을 주특기로 하는 주변 여러 부대의 장병들 100여 명이 모여, 실력을 평가하는 자리다. 
주로 각 부대를 대표하는 장병들이 대회에 출전해 실력을 겨루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장병들은 상과 포상 휴가를 받는다.

유 본부장은 자신도 출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속한 부대에 날고 기는 선임들이 많았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대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유 본부장이 이등병으로 처음 참가하던 그해에 부대 대표 장병을 선출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제비뽑기를 통해 계급에 상관없이 부대를 대표해 실력을 겨루게 된 것이다. 
혹여 이등병이 뽑힐까 걱정하던 선임들과 달리 은근히 자신이 뽑히기를 기대하던 찰나, 거짓말처럼 유 본부장의 이름이 불렸다.

그가 처음 출전하게 된 분야는 ‘사격도판 그리기’. 
지도 위에 좌표와 원을 그려, 포의 사거리와 각도를 빠르게 계산하면 된다. 
주어진 제한시간은 6분. 
작은 오차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신중에 또 신중을 기했다. 
사실 평소 밤잠을 줄여가며 연습을 할 때, 원을 완성하면서 연필심 두께 때문에 오차가 생긴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원을 한 번에 그리지 않고, 치밀하게 1°씩 줄여가며 눈금을 표시한 다음 여러 차례에 나눠 그렸다. 
그 결과 4분 30초 만에 도판 완성. 
다른 부대 선임들을 모두 제치고 대상을 탔다. 
막상 실력을 인정받고 나니, 새로운 목표와 용기가 생겼다.

‘아, 내가 무언가를 집중해서 하면, 이룰 수 있구나!’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진학보다는 취업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전산학’에 꽂히다

복학 후 대학원으로 진학하기보단 취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러려면 떨어질 대로 떨어진 학점 관리가 시급했다. 
학년을 거슬러 올라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마음가짐이 달라서일까, 공부가 예전만큼 어렵지 않았다.

2학년이 되니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입학할 때 맘먹은 대로 ‘수학과’를 택했다. 
물론 취업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경계열 과목도 틈틈이 공부했다. 
이렇게 학과 공부에 조금씩 정을 붙이던 중, 우연히 ‘전산학과’가 신설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학도 좋았지만, 자꾸만 전산학과에 관심이 쏠렸다. 
학교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서서히 변화를 준비하려는 것이라 판단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틈날 때마다 관련 도서와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야!’

드디어 길이 보였다. 
수학과 전공 수업은 물론, 결심이 선 순간부터 전산 관련 공부도 시작했다. 
사설 학원에서 프로그램 언어를 배우고, 시간을 쪼개 전략적으로 개론 위주의 전산학과 수업도 들었다. 
수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학문이라면, 전산학은 논리를 바탕으로 생각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학문이었다. 
논리의 흐름을 계속 공부하면서도 과정과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은 셈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대형백화점에서 작은 금융회사로 옮기다

학업을 무사히 마치고,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취업의 문턱을 넘었다. 
유통 분야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첫 직장은 대형 백화점으로 택했다. 
입사 후 인사관리, 경영관리 등 다양한 직무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IT 부서로 배치를 받았다. 
평소 관심이 있던 IT 분야여서 더 신이 났다. 
처음 맡겨진 직무는 ‘POS 시스템’. 
POS 시스템이란 백화점이나 슈퍼마켓, 편의점과 같은 소매점에서 상품의 재고관리나 납품수량 결정 등에 사용하는 정보관리 전산 시스템이다. 
지금은 POS 시스템이 없는 대형 백화점을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시스템이 처음 도입되는 때여서 시행착오가 많았다.
어떤 분야든 첫 단추를 끼우기 가장 어려운 법. 무척이나 고생스러웠지만, 단시간에 빠르게 다양한 실무를 익히는 계기가 됐다.

그러다 3년차가 되던 해, 우연한 기회에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업종을 전환할 기회가 찾아왔다. 
제안 받은 회사는 IT 부서가 일하던 대형 백화점의 1/5 수준으로 작은 금융 회사였다. 
주변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도 작은 규모를 우려해 새로운 도전을 만류했지만, 그는 왠지 자신 있었다.
자신의 경력 관리에 있어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금융계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하지만 금융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때, 하필은 나라가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특히 금융계는 인수와 합병으로 얼룩지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반 이상이었다. 
다행히 유 본부장이 근무하던 작은 금융회사는 내실이 튼튼해 단독으로 은행 전환에 성공한다. 
이 작은 금융 회사는 바로 하나은행의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이다. 
다들 몸을 사리며 변화를 두려워하던 위기의 순간에, 선택과 집중을 했던 유 본부장은 인생의 두 번째 전환점을 맞이했다.

“길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은행을 인터넷은 물론, 스마트폰에도 결합시키다

당시 은행 업무는 오프라인 업무가 주를 이뤘다. 
PC 뱅킹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뱅킹의 초기 모델은 전체 거래의 약 0.1% 수준이었고, 서비스는 당연히 걸음마 단계였다.

인터넷 보급이 조금 더 활성화되자, 시장은 변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하나은행에서도 인터넷 뱅킹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팀을 꾸렸다.
이때 유 본부장에게 IT 전자금융 팀장 자리가 맡겨졌다. 
사실 유 본부장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이 시장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처음 인터넷 뱅킹을 도입할 때만 해도 다른 은행에서 설계한 프로그램을 사와서 해당 은행에 맞춰 변경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업무량에 비해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당연히 휴일과 명절은 모두 반납해야만 했다. 
당시 인터넷 뱅킹은 지금처럼 24시간 운영되지 않고 매일 저녁시간과 휴일에는 ‘시스템 정지 시간(down time)’을 두었기에, 주말보다 휴일이 길게 이어지는 명절연휴는 특히 개선과 보완을 위해 책상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그가 정보계 개발팀장, 기획부장, 차세대프로젝트 총괄 본부장을 거치며 직원들을 다독이며 팀을 이끈 결과, 하나은행만의 독보적인 인터넷 뱅킹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침내 2009년 5월, ‘하나은행 차세대 시스템’을 세상에 선보이게 됐다.

이 시스템은 하나은행 역대 최대 규모의 전자 금융 시스템이다. 
융 거래는 단 0.00001%의 오차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정교하게 설계해야 했다. 
이때 유 본부장의 수학적 감각과 꼼꼼한 성격이 빛을 발했다. 
날짜와 금액과 같이 한 자리 숫자에도 고객 입장에서 치명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완성도 99.99999%가 아닌 100%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묵묵히 투자했다. 
그 결과 다음을 내다보는 안목이 생겨났다.

유 본부장이 차세대 시스템을 개발하던 무렵, 그는 2008년 애플사가 선보인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 스마트폰 뱅킹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터넷 뱅킹 다음으로 스마트폰 뱅킹이 시장에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고, 개발을 시작한 결과 은행업계에서 최초로 ‘하나은행 스마트폰 뱅킹 서비스’를 도입할 수 있었다. 
마치 콜럼버스가 미국 신대륙을 발견하듯, 그는 금융 IT 산업에 새 시대를 연 것이다.

“멀티플레이어가 되라!”
금융 보안 전문가, 융합형 인재의 시대를 논하다

1990년 하나은행 전신인 한국투자금융에 입사한 유 본부장은, 20여년 동안 하나금융그룹에서 여러 자리를 거치며 주요 직책을 담당해왔다.
그중 지난 3년간은 하나은행의 계열사 하나아이앤에스에서 그룹 IT 서비스 업무를 총괄 담당하며, 은행을 벗어나 경영 관련 업무까지 안목을 넓혔다. 
이런 노력 덕분일까. 
그는 올해 1월, 경영진과 IT 담당자들의 소통을 담당하는 하나은행 최고정보책임자(CIO)(최고정보보호책임자(CISO)겸직)로 은행에 복귀했다. 
그는 “최고정보책임자로 근무하는 동안, IT 분야를 잘 모르는 경영진과 이런 경영진과의 소통을 어려워하는 IT 조직 사이에 중간 다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눈앞에 놓인 최우선 과제는, 최근 연이은 금융 보안 사고로 뜨겁게 달구었던 ‘금융 정보 보안 강화’다.
특별히 지난해 직접 설립을 주도한 하나금융그룹 ‘통합보안관제센터’를 통해, 24시간 그룹 차원에서의 보안을 강화하고 있다.

수학을 전공한 그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가장 큰 원동력이 된 건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힘’ 덕분”이라고 밝혔다. 
금융 보안을 설계할 때를 예로 들었다. 
그는 “다른 은행에서 ‘오른쪽에 손잡이가 달리고 당기면 열리는 문’을 설계했다면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 ‘왼쪽에 손잡이가 달리고 밀면 열리는 문’을 만들어 해커의 침입으로부터 전산 시스템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창시절에는 ‘수학의 쓰임새’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막상 사회에 나와 맡겨진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사물을 관찰하고 논리적인 사고를 하는 습관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렇게 밝힌 그는 “특히 요즘 사회가 ‘융합형 인재’를 원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수학을 전공했다고 해서 인문학을 등한시하지 말고, 인문학을 전공한다고 해서 과학을 배제하지 말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662&cur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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