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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는 즐거움

국제원자력기구(IAEA)
이호승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관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일하는 이호승씨는 공부에만 매달리기보다는 항상 적극적인 자세로 발로 뛰고 직접경험하는 자세를 지녔다.

이처럼 능동적인 태도로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오면서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며, 국제기구
에서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어울려 일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도 이런열린 자세라고 말한다.

 

바른 원자력 사용을 돕는 국가담당관

 

이호승 씨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기술협력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그의 업무 중 하나는 핵사찰이다.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한 회원국들이 원자력 시설들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고 있는지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이다.

모범적으로 원자력 시설들을 관리하는 국가들에는 기술협력을 제공하는데, 핵의학, 농업, 산업 기술 등을 제공해서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계속 돕는 것이다.

호승 씨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국가담당관이라 부른다.

 

호승 씨는 미얀마와 캄보디아, 라오스, 이렇게 세 국가를 담당하며,이 국가들에 가서 프로젝트들을 수행하는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기술적으로 잘 아는 전문가와 함께 팀이 되어 일을 하는 것이다.

국가담당관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국가나 지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호승 씨는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을비롯해, 지난 10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오랜 외국생활

 

호승 씨는 호주에서 태어났다. 호승 씨의 아버지가 당시 무역진흥공사(KOTRA)의 무역 관장이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거주하는 일이 많았다.
세 살 때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1년여 만에 아버지가 UN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다시 태국으로 이주했다. 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게 되었고, 다양한 문화들을 존중하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다.

 

열두 살 때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한국말도 서툰 대다 경직한 한국 문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성적도 그리 좋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을 마쳤을 때 부모님은 호승 씨가 대학에 가지 못할까봐 걱정을 했다. 그래서 당시 무역협회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벨기에서 근무하기로 결정했다.

호승 씨를 데리고 가서 유학을 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호승 씨는 벨기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는 미국으로 대학을 갔는데, 로저 윌리엄스 대학(Roger WilliamsUniversity)이라는 곳이었다.

그리 좋은 대학교가 아니어서 실망한 어머니는 눈물을 보이셨다.

그 모습을 보고 호승 씨는 자극을 받고 더 좋은 학교로 편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편입한 학교는 윌리엄앤 매리(William and Mary)라는 대학교였다.

이 대학교는 성적을 까다롭게 주는 학교로 유명했으며, 호승 씨도 성적이 좋지 않았다.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겨우 졸업을 하긴 했지만 대학원에 갈 능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원을 알아보다 평화복지대학원에 지원을 했다.

 

평화복지대학원은 학업이 뛰어난 사람만 뽑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하고 리더십을 갖춘 학생들을 뽑는 곳이었다. 그런 학생들을 모아서 그 공동체 안에서 일종의 새로운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하는 취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호승 씨는 정말 다양한 곳에서 온 한국 사람들을만나게 되었다.

그야말로 값진 2년이었다.

 

항상 능동적으로 원하는 것을 찾음

 

호승 씨는 외국 생활을 많이 해서 한국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한국을 잘 대변하고 싶었다.

한국에 대한 애착이 많았다. 그래서 모의 UN같은 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항상 토론하는 걸 좋아했다.

또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외교관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모의 UN 팀에 들어갔다. 모의 UN이란 한두 국가를 지정해서 가상으로 회의를 하는 것이다.

어떤 한 문제에 대해서 예를 들면 기후 변화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고 그 나라의 입장을 대변해야 한다. 현재 모의 UN는 초등학교까지 확대가 됐다고 한다.

UN 본부에 등록된 기준으로는 전 세계적으로 700개 가까이 되며, 초중고를 비롯해 대학교에도 있다.

UN이나 국제기구와 협업해서 하는 게 있고, 민간에서 하는 것들도 있다.

이처럼 모의 UN을 해도 인터넷만 찾는 학생들이 많다. 물론 인터넷에 많은 정보가 있다.

그러나 어느 국가를 대변하려면 직접 대사관에 찾아가서 그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시간 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호승 씨는 경험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라고 조언한다.

 

“대학시절 무엇을 만들기 위해서 했던 작은 경험들, 예를 들어 학술지를 만들기 위해서 했던 작은 경험들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그냥 평범하게 만들었던 책이었죠.

그러나 제가 편집장을 맡고난 후 이렇게 계속 남들이 그냥 떨궈준 걸 그대로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이걸 더 잘 만
들 수 있을까 고민을 하고 직접 부딪쳤습니다.

이런 도전의식, 도전정신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지행합일(知行合一)입니다. 말만 하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저것 부딪히면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래서 호승 씨의 삶은 언제나 적극적이고 도전적이었다. 대학원 시절에는 학술지를 만드는 데 도전해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저 학생들이 기고하는 그저 그런 학술지가 아니라 정말 훌륭한 학술지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UN사무총장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만델라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보내 글을 요청했다.

명함을 만들어서 학교에 있는 여러 학회들에 찾아가 글을 청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도쿄에 있는 유엔 대학(UN University)에서 평화정책연구소 소장이 와서 특강을 했다.

평소 호승 씨는 UN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특강을 듣고 소장에게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이 예리했던지 그 소장이 호승 씨에게 인턴십을 해보라고 제
안했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도쿄에서 인턴십을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대학원을 졸업했다.

외교부의 조약국에서 에디터 계약직을 뽑았는데 거기 지원해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동시에 외무고시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말 실력이 부족해서 외무고시에는 떨어지고 말았다.

더 이상 군대를 미룰 수 없어 용산구의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를 했다.

그때도 호승 씨는 허송세월을 하지 않았다. 무작정 구청장에게 편지를 써서
지역의 발전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외국인 담당 창구에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공익근무요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제대한 후에는 코스닥 증권시장에서 일했다. 원래 꿈이었던 외무고시에 떨어지고 실의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나 차선책이 있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UN에 시험을 보게 된다. 국제기구 초급전문가(JPO)라는 시험이다.

외교통상부에서 한국국적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소정의 선발절차를 거쳐 2년간 유엔 및 관련 국제기구의 사무국
에 수습 직원으로 파견하는 제도다.

 

호승 씨는 이 시험에서 합격해 서른한 살의 나이에 오스트리아로 떠나게 된다.

그곳의 UN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유엔에서 컨설턴트는 보통 6개월 단위로 계약하면서 여러 업무를 맡게 된다.

JPO라는 제도는 2년만 후원을 해준다. 그 후에는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호승씨는 처음에는 자신감이 있었다. 열심히 하면 정규직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재계약을 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아서 길게는 5개월까지 공백 기간도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11년 이상 있었는데 그중 다 합쳐서 2년 정도는 실업자였더라고요.”

 

계약직도 쓸모가 있어야지 다시 채용이 되는데 그게 안 돼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외국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몇 개월을 버티려면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다.

그러나 호승 씨는 그런 걸 감수하고 결국생존해냈다.

UN산업개발기구를 거쳐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UN에서 생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관련된 지식은 당연히 필요하고 비전도 있어야 한다.

또 당분간 실업자가 되더라도 굴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영어가 뛰어나야 하는 건 물론이다.

그리고 다른 언어도 할 줄 알면 더 좋다

 

특히 계약직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일을 잘해야 결국 운도 따라 온다.
성과를 내야 쓸모 있다는 것을 인정해주고 정규직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호승 씨는 정규직이 되기까지 힘들었던 시기들을 돌이켜보면 다 훌륭한 UN의 직원이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감능력의 필요성

 

호승 씨의 아버지는 무척 활동적인 분이었다. 경제계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아버지의 영향이 호승 씨에게도 전해졌다.

또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를 접할 수 있었기에 그런 공간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중요한 시기들이었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공부를 못 하고, 한국말도 잘 못해서 위축되었던지라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는 태국에서의 삶을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로 꼽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의 백인들은 우러러보면서 인도나 동남아 지역의 사람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호승 씨는 안타까워한다

 

“저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제 3세계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UN에서 일하며 절실히 느꼈습니다. 국제기구에서 일하려면 어떤 사람이든, 어떤 문화든 존중할 수 있는 세계관이 필요합니다.”

 

호승 씨는 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동남아 사람들을 많이 접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문화와 인간에 대한 존중을 배웠다. 또 방콕에는 UN 지역본부가 있어서 일찌감치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승 씨는 외국 경험이 없는 토종 한국인이라고 해서 세계관이 좁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국에서 좀 살다 왔다고 자신이 세계화된 것처럼 과시하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한다.

너무 미국 중심적, 백인 중심적 사고방식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국가들의 다양한 인종들과 진정한 교제를 하고 교류를 나누는 게 참된 세계화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만 갖춘다면 외국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어디든지 적응할 수 있다. 오히려 더 잘 적응할 수 있다.
단 외국에 있는 국제기구들에서 일할 때 영어나 전문성이 부족하면 무시당하기 쉽다.

결국 실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많은 가능성으로서의 원자력 공부

 

“원자력은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니까 좋은 경력인 것 같아요.”

 

호승 씨는 원자력을 공부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원자력 강국이라고 한다.

국제기구에서도 지금 2명의 한국인 국장이 무척 중요한 위치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직원이 무려 서른다섯 명이라고 한다.

호승씨는 지금 오스트리아에 있는 비엔나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UN 시스템 개혁에 관련된 주제를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
한 4~5년 후에는 국제원자력기구가 아닌 다른 경험을 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 하는 일을 통해 프로젝트 관리 기술을 쌓고 있다. 좋은 트레이닝을 받고 있고 좋은 경험을 쌓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노하우를 가지고 다른 국제기구에 가면 무척 도움이 될 것 같다.

 

호승 씨는 아시아 지역, 태국이나 필리핀 등에 있는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조금 다른 경험도 쌓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국에서 필요한 인물,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5757&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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