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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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인 인터뷰

interview 이준학 비보이

꿈의 무대에 올라 찬란한 성과를 새기며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르다

이준학  갬블러크루 비보이

무대에 서는 비보이이자, 비보이들이 활발하게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공연기획자로서 경계를 넘어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와 만났다.


※ 출처: 원격영상 진로멘토링(https://mentoring.career.go.kr)

궁금해요
비보이란 일반적으로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춤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방송에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무대를 보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어요. ‘컴백홈’이라는 곡에 맞춰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모습이 굉장히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그 영상을 본 이후로, 브레이크댄스에 관심을 갖게 됐죠.
궁금해요
당시만 해도 현재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였을 텐데 춤에 관련된 자료는 어디서 찾으셨어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기도 아니었기에 자료를 찾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1980년대부터 미국 댄서들의 영상이 한국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어요. 춤을 좋아하는 미국 교포 분들이 촬영한 영상들이 대다수였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교본처럼 전해진 셈이죠. 영상에는 1970~8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브레이크댄스 영상이 대다수인데 그 영상을 보며 국내에서도 80년대 이후로 춤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돼요. 저도 그렇게 외국에서 한국으로 보급된 영상을 구해서 보면서 춤의 세계로 더욱 깊게 빠져들게 됐죠.
궁금해요
춤을 추면서 소질이 있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저는 춤에 소질이 없었어요.
춤을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생각하는 것이지만. ‘소질이 곧 노력’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저는 보통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운동에 전혀 흥미가 없었거든요. 평소 춤을 추지 않는 시간에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산책하는 것을 즐겨요. 그런 저를 보고 사람들이 말하곤 하죠. “어떻게 너 같은 애가 춤을 추니?” 라고요. 물론 춤에 천부적인 소질을 지니고 있다면 더 좋겠지만, 좋아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궁금해요
어려서부터 춤을 추셨는데 학교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는 있으셨나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면, 당시 인기 있던 H.O.T나, 젝스키스 같은 가수들의 춤을 따라 추곤 했어요. 완전히 똑같이 추기보다는 그 안에 브레이크 댄스를 가미해서 조금 더 색다른 무대를 연출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덕분에 학창시절에는 인기가 좀 있었죠.
궁금해요
중학교 시절에도 초등학교에 이어서 춤을 쭉 추셨던 셈인데 춤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초등학교 때 동경의 대상이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연예인이었다면, 중학교 때는 동경의 대상이 춤을 잘 추는 형에게로 옮겨가게 됐어요.
어린 시절에는 동경하는 사람이 생기면, 으레 그 사람이 하는 걸 다 따라하고 싶어지잖아요. 그 형이 합기도를 열심히 하기에 저도 검은 띠 2단을 딸 정도로 열심히 했어요. 당시 같이 춤췄던 동갑내기 5명과 저, 모두 그 형이 가는 길을 갔어요. 동경의 대상이 같았고, 좋아하는 춤이 같았고, 춤을 잘 추고 싶은 욕심도 있었기 때문에 그 형이 진학한 학교까지 따라 입학할 정도였죠.
중학교 때 최대 관심사는 춤이었지만, 영어 학원과 수학학원도 열심히 다녔어요. 그래야만 부모님께서 춤을 추게 허락해주셨기 때문에 춤을 추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죠.
궁금해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연습할 공간도 마땅치 않았을 것 같은데 어디서 연습을 주로 하셨어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중학교 때는 주로 지하철역에서 연습을 했어요.
저희 동네에서 가까웠던 먹골역에서 연습을 했는데 바닥이 대리석이서 연습하기 좋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다 보니까 낮에 연습하면 시끄럽다고 쫓겨나곤 했어요. 그래서 지하철 운행이 종료된 시간에 지하철역으로 가서 연습을 했어요. 그러다가 역사에서 근무하는 직원 분들에게 발각되면, 또 나가야만 했죠. 그렇게 한 역에서 쫓겨나면 그 다음 역으로 가고, 그러다가 다음 역으로 가고, 이렇게 무수히 옮겨 다녔어요. 먹골역에서 용마산역까지 다섯 역을 옮겨서 갔던 적도 있으니까요.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지하철역을 떠돌게 아니라, 한곳에서 집중해서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청소년 수련관으로 연습장소를 옮기게 돼요.
춤추던 친구들이 함께 돈을 모아서 연습실을 예약하곤 했는데 학생 신분에 수중에 지니고 있던 돈이 많지 않다 보니, 항상 조그마한 공간을 빌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비보이는 움직임이 크고, 화려하기 때문에 공간을 많이 차지하잖아요. 그러다보니까 10명 정도 좁은 공간에 들어가면, 다 같이 춤을 출 수가 없으니까 나머지 9명은 벽에 다 붙고, 한 명씩 나와서 연습을 하곤 했어요. 그러다보니 좁은 실내를 벗어나 넓은 야외를 물색하게 됐죠. 하계동 근린공원에 팔각정이 있거든요. 그 정자 바닥이 대리석이라서 거기서 연습을 많이 했어요. 야외 공원에 있어서 음악을 크게 틀어도 항의하는 분들도 없었고, 또 거기 오신 분들이 좋아해주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연습을 했죠. 저희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신 인근 센터에 직원 분들이 힘써주셔서 나중에는 연습 공간도 확장해주셨고, 비보이 대회도 열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연습에 매진했던 것 같아요.
궁금해요
그러면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과 같이 팀으로 활동하셨던 건가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동네에서 같이 비보잉을 시작한 동기 친구들과 고등학교 때 팀을 만들었어요. 먹골크루를 뜻하는 MGC로 활동했죠. 그 친구들과 함께 연습을 하다가 팔각정에서 연습하던 난장판이라는 팀을 만나게 되면서 그 팀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리고 19살 때까지 쭉 난장판으로 활동을 하게 되죠.
궁금해요
지금은 갬블러크루의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으신데요.
난장판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갬블러크루에 들어가게 되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난장판의 멤버로 있으면서 공연도 하고, 춤으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각종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바쁘게 보냈죠. 그런데 2002년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리버스, 오보왕, 드림스, 리얼라이즈, 뉴웨스트 등 여러 비보이팀에서 에이스로 꼽히던 멤버들이 모여서 갬블러크루를 창단하게 돼요. 그때 들어오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저는 당시 난장판으로 활동하던 시기였기에 거절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팀 멤버들이 군 입대나 부상을 이유로 난장판을 떠나게 되면서 다시 갬블러크루에 문을 두드린 거죠. 아직 제 자리가 남아 있느냐고 했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그렇게 해서 2002년 12월부터는 갬블러크루의 멤버로 입단을 하게 됩니다.
궁금해요
갬블러크루에 2002년에 입단하셨는데 2003년 일본 ‘be bboy' 대회 우승을 필두로 수많은 세계 대회를 석권하게 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제가 팀에 입단하고 나서 해외에서 첫 우승을 거둔 일본의 ‘be bboy' 대회와 그 다음 해인 2004년에 프랑스의 ’비보이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순간이 가장 크게 기억에 남아요.
일본 대회 출전 같은 경우에는 당시 항공료를 직접 준비하지 않으면, 출전할 수가 없던 상황이라서 부모님께 항공료를 지원받아야 했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쓸 경비까지도 부모님께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었죠. 택시 기사로 일하셨던 아버지께서 지갑에 있던 돈을 모두 털어서 저에게 주시고, 빈 지갑으로 가셨던 쓸쓸한 뒷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요. 그때 이를 악물었죠.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니까요. 사실 우승보다는 그런 과정을 겪고 갔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대회에요.

그 다음으로 프랑스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인데 프랑스 대회는 미국 올스타팀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점에서 감동이 더 컸어요. 세계 최강의 비보이들과 겨룬 제 기분이 상상이 되세요? 그들이 춤추는 영상을 교과서처럼 보면서 연습해왔는데 한 무대에 서다니요! 지금도 가끔 그 당시 우승했던 순간을 담은 촬영 영상을 보곤 하는데요. 제가 태극기를 흔들면서 ’미국을 이겼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와요. 비보이의 종주국인 미국을 프랑스에서 꺾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힘든 시간들을 모두 보상받은 느낌이었어요.
궁금해요
해외 대회 우승뿐만 아니라, 해외 공연도 많이 하셨는데 인상적이었던 공연이 있으세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저희가 2015년 2월에 열린 홍콩 구정축제에 초청받아 참여를 했었어요.
그 행사는 20회 정도를 이어왔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행사에요. 그 행사 실황이 중국과 홍콩에 라이브로 방송되거든요. 제가 주최 측을 통해 들은 바로는 4억 명에서 5억 명의 인구가 시청을 한데요.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의 시청자들이 저희 공연을 지켜보신 셈이죠. 통제된 도로를 따라서 1시간 정도를 걸으면서 공연을 하는데요. 구역별로 나눠진 공간에서 같이 춤도 추고, 텀블링도 하고, 워킹도 선보이면서 현장에 나온 관객 분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어요.
관객 분들의 뜨거운 반응을 그대로 체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궁금해요
세계 최고의 자리에 등극하신 셈인데 국내 비보이계의 현황은 어떤가요?
그리고 해외에서 한국의 입지는 여전히 건재한가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2004년부터 2010년까지만 해도 한국을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없었어요.
국내에서 올스타를 모집해서 대회를 참가하면, 1년 내내 세계 대회 우승을 휩쓰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만큼 한국 비보이들의 실력이 뛰어났었죠. 그런데 비보이의 활동이 왕성했던 바로 시기에 신예 비보이들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비보이의 숫자가 현격하게 줄어들게 됐죠. 또 예전에는 미디어에서 비보이의 성과에 대해 활발하게 조망을 했지만, 요즘 미디어에서는 비보이의 문화가 제대로 조명되고 있지 못하다보니 젊은 층의 유입도 거의 없어졌어요. 이웃나라인 일본과 중국을 보면, 씁쓸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천재 비보이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거든요.
대한민국이 세계 랭킹의 상위권을 줄곧 지켜왔는데 이렇게 가다보면, 5년 안에 그 순위권에서 밀려나는 건 순식간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죠.
궁금해요
비보이는 생명력이 짧다는 인식이 지배적인데 20년 동안 비보이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중학교 때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비보이로서 활동했던 친구들 중에서 아직까지 이 세계를 떠나지 않은 건 유일하게 저 한 명이네요.
저는 갬블러크루로 계속 영위할 수 있으려면, 갬블러크루라는 팀의 성공보다 이 문화 자체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비보이로 오래 활동하기 위해서 저는 이 문화를 안착시켜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 거죠. 또 한 가지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 머릿속에는 오로지 ‘춤’ 밖에 없었어요. 친구들과 만나면 늘 “그 춤 봤어?”나 “그 동작 어떻게 하는 거야?”와 같은 대화가 오갔어요. 제대로 하루 쉬는 날도 없었을 뿐더러, 왼팔이 부러지면 오른팔로 춤을 추겠다는 각오로 임했을 정도로 필사적이었죠. 대회 하나를 위해 몇 년간을 연습한다고 하면 믿으시겠어요? 저는 그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해야 하는 노력의 시간들을 불평하며 보내고 싶지 않았어요.
매순간 최선을 다해왔기에 비보이로서 생명력을 이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궁금해요
비보이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시면서도 다양한 비보이들이 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공연기획자로도 활동하고 계신데요.
비보이와 공연기획자의 삶을 아우르는 것은 힘들지 않으신가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저는 갬블러크루의 비보이로서 뿐만 아니라, ‘무대위사람들’이라는 기획사의 대표이사로도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갬블러크루 같은 경우에는 2013년부터 문예진흥법 7조에 의거해서 정부에서 인정한 전문예술단체로 지정이 됐어요. 전문예술단체는 서울에 200개 단체가 있고, 전국에 950개 단체가 있는데 갬블러크루는 서울에서 유일한 비보이 팀이에요. 갬블러크루는 비보잉을 보다 예술적인 문화로서 알리는데 힘쓰는 활동을 주로 한다면, 무대위사람들은 갬블러크루와 애니메이션크루라는 팝핀팀과 함께 합쳐서 만든 회사에요. 갬블러크루와 애니메이션크루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도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무대위사람들로 한데 뭉치는 거죠. 각자 활동과 팀 활동을 균형 있게 이끌어가면서도 서로 돕기 때문에 여러모로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오로지 춤만을 생각했었다면, 현재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더 오랫동안 영위하기 위해서 기획 일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 분명 여기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도 상당하지만, 사람이 좋아하는 일만을 하고 살 수 없잖아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싫어하는 걸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둘은 항상 붙어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40~50대가 되었을 때에도 젊은 에너지를 가지고, 최고의 위치에서 활약하고 있는 갬블러크루의 모습을 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와 무대를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공연 기획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것이죠.
궁금해요
비보이가 활약할 수 있는 공연 장르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어떤 공연을 제작하고 계신가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비보이 문화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기존에 저희가 선보였던 공연으로만 승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됩니다. 2015년에는 현대무용가 김설진씨와 협업 작업으로 <신포니아(SYNFONIA)>라는 작품을 만들었어요. 비보이는 격렬한 움직임을 많이 하기 때문에 주로 5분~10분 정도의 시간 동안 공연이 이뤄지는데 그런 한계를 깨보자는 생각에서 이 작품을 기획한 거죠. 비발디의 ‘사계’를 편집한 음악을 사용했는데 30분 동안 퇴장 없이 춤을 추는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2016년에는 현대무용을 가미한 <잉여의 꿈>이라는 작품을 갬블러크루의 신규상씨가 만들었는데 이 작품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서울댄스컬렉션’ 본선에 진출하게 돼요.
서울댄스컬렉션은 2007년부터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부대행사로 개최된 프로그램인데 개최 10년 역사상 스트리트댄스 장르에서 뽑힌 건 이 작품이 최초였어요. 결국 이 작품이 최종적으로 우수작에 선정되면서 요코하마 댄스 컬렉션에 진출하게 되는 기회도 얻게 됐는데 그런 점에서 큰 의미가 있죠. 앞으로는 클래식과 접합해 기획한 신포니아 공연을 실제 오케스트라팀과 같이 하고 싶다는 게 제 바람이에요
궁금해요
공연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활발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통해서도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계신데요. 그만큼 얻는 보람도 배가 될 것 같습니다.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군인, 직장인, 청소년, 소년원 아이들 등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고 있어요. 사실 제가 멘토라는 이름으로 그분들을 만나고 있지만, 오히려 제가 그분들께 배우는 것들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직접 가서 교육을 해보면 그분들의 고충이 무엇인지, 즐거움은 무엇인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거든요.

얼마 전에는 예술인복지재단과 메세나협회가 연계해서 예술인들을 직장으로 파견 보내는 사업을 진행했었는데요. 저희가 한화생명에 있는 콜센터 여직원분들 30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했어요. 교육에 이어서 결과발표 공연까지 했는데 행복해하는 그분들을 보며 저도 큰 보람을 느꼈어요.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주로 비보이 체험을 해보는 동아리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같이 활동하는 갬블러크루 멤버들에게도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공연을 많이 하게 되면 나이가 들수록 소모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교육은 차곡차곡 경력으로 쌓여나갈 것이라고요. 이렇게 많은 분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다 보니 제 경험을 더 깊이 있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상명대학교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에 지원해 합격했고, 올해부터 공부에도 더 매진해나갈 생각입니다.
궁금해요
비보이 교육을 하시다보면, 비보이를 꿈꾸는 학생들도 많이 만나실텐데 비보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유스 올림픽에서 비보이 장르 채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비록 어떻게 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유스 올림픽에 채택이 된다면 그 문화가 조금 더 널리 확산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비보이를 꿈꾸는 학생들이 있다면, 첫 번째로 ‘목표를 세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어떤 무대에 서고 싶은지 먼저 타깃을 정하고, 그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어떻게 도약할 수 있을지를 구체적으로 그리는 것이 중요해요.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면, 또 다른 목표를 세우는 거죠. 저 역시도 그렇게 해왔고요. 그리고 만약에 어떤 팀에 입단하게 된다면, 한 팀에서 오래 활동하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그래야 발전할 수 있어요.
궁금해요
요즘에는 학교에서 비보이 동아리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지만, 동아리 활동 외에 학생들이 비보이가 되려면 어떤 교육을 받는 것이 좋을까요?
이준학 비보이 이준학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춤을 배우면서 개인적으로 매일 연습하는 게 제일 좋죠.
독학과 학원을 병행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때와는 달리 최근에는 비보이의 동작과 춤이 담긴 영상들을 유튜브를 통해서도 쉽게 접하실 수 있기 때문에 영상을 보면서 많이 연습하실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출처   원격영상 진로멘토링 멘토인터뷰   https://mentoring.career.go.kr/school/mentor/mentorInterview/listMentorInter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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