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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배낭여행으로 꿈을 찾고 유엔에서 그 꿈을 이루어가요

유엔세계식량계획(WEP) 한국사무소 JPO
임형준 국제기구전문가

세계식량계획(WFP)은 전 세계 기아 퇴치를 위해 세워진 국제연합(UN) 산하의 식량 원조 기구이다. 

WFP의 한국 사무소에서 정직원으로 일하는 임형준 씨는 어려서부터 다른 나라들을 경험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그래서 한국외국어대학에서 루마니아어와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며 배낭여행을 다녔다. 

한국에서 국제대학원을 나오고 하버드 케네디 스쿨에서 공공행정학을 공부하며 유엔에서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꿈을 이뤘다.


전 세계 굶주리는 사람들을 돕는 

인도적인 국제기구에요


세계의 기아 인구는 작년 12월말 기준으로 8억 7천만이다. 

그러니까 세계 인구 중에 8명 중에 한 명이 아직도 기아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는 이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만든 유엔 기구다.


1961년도에 설립된 WFP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우리나라가 어려웠던 시기, 그러니까 1964년부터 1984년까지 20년 이상 우리나라를 도와준 기구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들한테 일을 주고 식량으로 댓가를 지불하는 활동을 한 것이다. 

1971년에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도 WFP가 도왔다. 

그러다 1990년 중반부터 우리나라는 지원을 받는 나라가 아닌 주는 나라가 되었다.


WFP의 사무소는 전 세계 92개국에 있다. 

매년 9천만 명에서 1억 명 정도, 가장 배고프고 취약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 

직원이 13,000명, 14,000명 되는데 그중 92%가 현장에서, 기아 전선의 최전방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인도주의기구의 직원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기아 문제가 심한 나라에서 일을 한다.


여행을 꿈꾸던 소년,

배낭여행으로 세상을 보았어요


형준 씨가 어릴 때 집에 ‘김찬삼 세계여행기’라는 책이 있었다. 

김찬삼 씨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전 세계 백 몇 십 개국을 다닌 전설적인 여행가다. 

그는 그 책을 뒤적거리면서 세계일주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전 세계 한 30개국의 친구들과 펜팔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대학교를 들어와서는 방황을 했다. 

진로 문제도 걱정되었고 콤플렉스도 많았다. 

대인관계에서 부끄러움도 많고 성격도 소심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어릴 때부터 가진 해외에 대한 동경, 자신을 극복하려는 절박함, 이런 것들이 합쳐져 세계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배낭여행이에요. 

그게 제 인생의 진로뿐만 아니라 가치관이나 모든 걸 다 송두리째 바꿨거든요.”


그는 무려 3년 반 동안 배낭여행을 했다. 

한 80개국을 다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선진국을 주로 갔다. 

미국, 유럽을 가고 동남아 지역을 모두 다니다가 인도, 파키스탄까지 갔다. 

그다음부터는 오세아니아 지역과 아프리카를 종단했다. 

중동 지역도 종단해서 북유럽까지 가서 시베리아 열차 타고 또 중국까지 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았다.


여행을 가기 위해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으고 여행을 가서도 히치하이킹을 해서 차는 주로 공짜로 타고 다녔다. 

잠도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주로 노숙을 하고 먹는 것도 제일 싸게 먹고, 그런 식으로 좀 힘들게 여행을 다녔다.


이때 배낭여행을 하며 세상을 보게 되었다. 

세계의 빈부격차를 목격하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만 가니까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는 눈앞에서 죽어 있는 할아버지를 봤다. 

형준 씨가 경찰한테 ‘이 사람을 도와야 되지 않냐’고 묻자 경찰은 ‘하루에도 이런 사람들이 수없이 죽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고 하는 게 아닌가. 

리고 인도에서는 꼬마들이 먹을 거 달라고 그를 따라다녔다. 

과일 장수가 썩은 과일을 버렸는데 그것을 흙탕물에 씻어서 먹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앞으로 취직을 어떻게 하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고작이었는데 어떤 나라는 하루하루가 정말 살기 위한 투쟁이고, 생존의 문제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뿐 아니었다. 

말라위라는 나라에서 배를 타게 됐다. 

배를 타고 한 3일을 가야 하는데 깜빡 잊고 환전을 하지 않았다. 

지팡이처럼 들고 다니던 그 사탕수수를 씹으면서 3일을 배 위에 있었다.


3일을 굶으면서 배고픔의 고통을 처음으로 느껴본 것이다. 

그래도 그는 배에서 내려서 환전을 하면 굶주림에서 벗어나겠지만 그가 봤던 그 많은 사람들은 매일같이, 앞으로도 계속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 고통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하게된 것이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배의 선원이 그에게 자기가 먹을 걸 나눠줬다.

그때의 감사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정말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작은 도움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에 대해서도 느낀 바가 컸다.


그러고는 배에서 내려 말라위에 있는 마을에 갔다.

찢어지게 가난한 마을이었는데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표정이 굉장히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바로 WFP에서 주는 식량을 받아가고 있었다.


형준 씨가 배낭여행을 한 계기는 앞으로 어떤 일을 할까,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답을 얻었다. 

‘배고픈 사람을 도와주는 저런 일이 정말 내 인생에 값진 일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그 전에는 유엔이 뭔지, 국제기구가 뭔지 전혀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인생에 대한 방향이 정해졌다.


남들 따라 대기업에 취업했지만

제 꿈을 좇기로 했어요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유엔에 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막막했다. 

형준 씨는 1997년도에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때가 IMF였다.

경제가 어려우니 친구들은 취업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들 어디든지 들어가기만 하자는 식이었다.


그도 3년 반의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불안했다. 

마구 원서를 넣었는데 운 좋게 여의도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리고 첫 출근하는 날, 버스를 타고 주변에 앉아 있는 직장인들의 얼굴을 봤다. 

그냥 쳇바퀴 돌듯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봤다. 

형준 씨는 생각했다.


‘내가 꿈꾸는 게 저런 모습은 아닐 거야.’


내가 가려는 지향점, 보물섬이 있는데 마음이 급하다고 뗏목을 대충 만들어서 갈 순 없다.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배는 금방 파산할 수도 있고, 속도도 느리다. 

배를 탄탄하게 만들어서 천천히 가더라도 방향만 제대로 되어 있고 모터를 달면 먼저 간 친구들은 금방 따

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뭐 이런 생각들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출근 첫날, 회사를 그만뒀다.


유엔에서 인턴을 하려면 경력이 중요해요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유엔에서 일하려면 기본 요건이 석사 학위가 있어야 하고 영어와 제2외국어 능력 등이 필요했다. 

그 기본 요건은 해야겠다 싶어 국제대학원에 갔다. 

대학원에 가서 그의 목표는 오로지 유엔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단 유엔에 들어가려면 인턴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엔에서 인턴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지원을 했다.

그때는 이메일이 아니라 우편으로 보내야 했는데 정말 100통이 넘게 보냈단다. 

그런데 한군데도 답이 오지 않았다.


사실은 그 업무와 연관 있는 경력을 쌓아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심히 경력을 쌓았다. 

그 당시 국제대학원에서는 국제 인턴십을 많이 보내려고 인턴십 프로젝트를 했는데 그 프로젝트 조

교도 했다. 

연구조교를 하고 학생회장도 하고, 외교부에서 인턴도 하고, NGO에서 자원봉사도 하고 그런 식으로 경력을 나름 열심히 쌓았다. 

리고 외국인 교수님들 쫓아다니면서 이력서도 고쳐달라고 하고 계속 그렇게 다듬으니까 점점 세련되고 나아졌다. 

그렇게 한 1년간 노력한 뒤 다시 유엔 인턴에 지원을 했더니 이번에는 다섯 군데에서나 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때는 어디를 가야할지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유엔의 심장인 뉴욕본부를 가보자고 생각해 유엔 본부에서 인턴을 하게 되었다.


현장에서 일하고 싶어

두 번째 인턴에 지원하며 직원도 되었어요


그런데 유엔 본부에서 일을 하다 보니 밖에서 보던 유엔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인류의 평화와 공영과 번영을 위해서 노력하는 그 이상적인 국제기구를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또 나름의 관료주의와 정치적 개입, 힘의 논리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대신에 현장을 한번 가보자고 생각했다. 

본부에서 논의되는 것들이 실제로 어떻게 집행이 되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일단 유엔이라는 곳에 인턴으로 들어오고 나니 두 번째 인턴십은 너무 쉬웠다. 

형준 씨는 동유럽에 관심이 많았기에 동유럽 국장을 그냥 찾아가서 인턴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바로 그 자리에서 연결을 해주는 게 아닌가. 

처음에 들어올 때는 수백 통의 이력서를 보내기도하고 그렇게 힘들었지만 일단 내부에 들어오니까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이었다.


인턴을 하면서 인턴이 아닌 직원을 뽑는 공고가 나는지도 열심히 찾아봤다. 

인사과에 계속 찾아가기도 했다. 

사실 인사과에서 보기에는 형준 씨가 그리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직원으로 채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인사과 과장이 나중에는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UNV(UN Volunteer)라는 현장 근무 자리를 추천해준 것이다. 

한 달에 3,000달러 정도 받으면서 유엔에서 실제로 일을 하는 일이었다. 

인턴으로 들어가 6개월 만에 일을 얻은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취직을 했지만

유엔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형준 씨는 집에서 장남이기도 해서 집안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다. 

이제는 집에 돌아와서 한국에서 정착하라는 말씀이었다. 

사실 그도 해외생활이 좀 힘들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공공기관에 취직을 했다. 

한 1년 정도 다녔는데 안정적이고 보수도 좋은 괜찮은 직장이었다.


그런데 그 직장에 계속 머물면 어떻게 살지 미래가 빤히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그렇게 꿈꿔오고 가고 싶어 했던 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때 형준 씨 나이가 서른두 살이었는데 이대로 정착하면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JPO(국제기구초급전문가) 시험이 있다는 게 갑자기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 시험을 한번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을 한번 시험해보자. 

내 운명이 과연 유엔으로 갈 운명인지 아니면 그냥 한국에서 이렇게 살 운명인지 시험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JPO 시험에 합격을 했다. 

그 당시는 1년에 JPO를 다섯 명을 뽑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해외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는 어떻게 보면 순수 토종으로 붙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엔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JPO로 WFP에서 2년 동안 있었다. 

첫 임지를 중남미권의 온두라스라는 나라에서 시작을 했고, JPO를 마치기 전에 바로 정규직이 되었다.

JPO를 하다가 운이 좋아서 형준 씨처럼 바로 정직원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계약직으로 몇 년을 더 하다가 정직원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는 유엔에서 자리를 못 잡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정규직이 된 후에는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 동남아의 라오스, 이태리 로마의 본부, 그리고 이제 한국사무소에 오게 되었다.


국제기구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자신에게 맞는지 파악해보세요


유엔에서는 현장에서 정말 전쟁이나 기아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유엔에서 일을 하면서 형준 씨는 10년 동안 5개 대륙을 다녔다. 

앞으로도 계속 다녀야 하고 평생 그렇게 떠돌아다녀야 한다. 

그걸 각오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들이 힘들어할 수도 있다.

진짜 가난한 나라에는 문화생활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데 그런 곳에서 살려면 사명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까지 고려해서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는 과정도 쉽지가 않다. 

기본적으로 전문성, 최소한 석사 이상의 학위, 그리고 영어와 제2외국어 하나 정도는 실무를 할 수 있을 수준으로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 안에서 같은 종족과 같은 문화권 안에서도 사람들이 갈등이 생기고 힘든데 완전히 다른 문화

권, 다른 인종, 다른 종교, 다른 언어의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그는 젊은 친구들한테 방향이 정말 중요하다고 얘기하곤 한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 등의 간접경험도 중요하지만 직접경험도 굉장히 중요하다. 

접 자기가 생각했던 분야에 부딪혀보는 것이다. 

그게 진짜 자기한테 맞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을 겪은 다음에 결정을 해야 한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관심을 갖는 게 아니고 정말 자기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일단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버드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분석했더니 세 가지 요소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된다는 확신, 그리고 정말 해야겠다는 간절함,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행동이었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될 때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형준 씨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이루어낸 것들을 보면 정말 처음부터 된다고 생각을 했고, 그다음에 간절하게 이루려는 마음이 있

었고, 그리고 실질적으로 액션을 취했다.


결국 방향을 잘 잡고, 그런 방향에 비추어서 꿈을 갖고, 자기를 펼칠 수 있는 꿈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실질적으로 그것에 맞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언어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어요.

자기만의 특징을 만드세요


해외에서 어릴 때 생활을 했던 사람이 언어적인 측면에서 훨씬 유리한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만 자랐어도 노력을 하면 유엔에서 일할 수 있는 정도의 언어 실력은 충분히 갖출 수 있다. 

사실 유엔에 보면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한 10%도 안 된다.


물론 어릴 때부터 국제감각을 가지는 건 도움이 많이 된다. 

하지만 형준 씨 같은 토종 한국인도 들어갔다. 

그러니까 그게 큰 장애물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또한 한국인이라는 게 장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엔에서 일해 보니 동양인은 소수민족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 특별하다. 

한국적인 관점이 유엔의 프로젝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전에는 주로 미국이나 유럽의 관점이 주를 이루었지만 이제 유엔에서도 아시아적인 관점, 아프리카적인 관점 등을 무척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개인적으로는 자기만의 특징이 있는 것이 좋다. 

형준 씨도 예전에는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세계여행을 하고 나서는 ‘이것만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는 게 생겼다.

20대에 80개국을 3년 반 만에 다닌 사람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이 경험은 그만의 특징이 되었다. 

그게 자기를 딱 잡아주는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 분야만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는 자기만의 하나, 그것을 만들어내고 살려가는 것이 중요

하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5774&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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