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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분야

(대안학교) 세상에서 혼자만이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


백마강 영화 조감독

피아노 전공으로 음대에 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한 여학생이 대안학교로 전학을 한 뒤,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고 그중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해도 괜찮다는 ‘용기’를 배웠다.
13년 전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서 이력서를 100통 넘게 쓰던 끝에 간신히 일자리를 얻은 백마강씨는 밑바닥 일부터 시작해 지금은 조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10편의 영화를 만들어 놓고도 5편밖에 개봉하지 못하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용기 있게 전문 조감독 분야를 개척하며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생각이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열린 문

백마강 씨는 사회사업가인 아버지와 중·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인 어머니 밑에서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우며 자랐다. 
가평에서 서울로 피아노 레슨을 다니게 하실 정도로, 부모님들은 그녀의 꿈을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셨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마다 ‘대학을 가기 위해 3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좋아하는 낭만주의 음악 대신 입시곡인 고전주의 음악만을 연주해야 하는 입시 시스템에도 점점 지쳐갔는데, 결정적으로 3학년 학생회 선배들이 1, 2학년을 강당에 모아놓고 복장검사를 한다면서 아이들을 때리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되었죠.”

많은 학생이 강당에 모여 있었고, 선생님들도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 상황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했을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 왔고 그 외의 길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서 레슨 열심히 받아서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 길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학교생활이 싫어진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어차피 음악을 포기할 거면 인문계 학교를 계속 다닐 필요가 없었어요. 
마침 동생이 대안학교에 가기 위해 시험 준비를 하고 있어서 부모님께 저도 그 학교에 가면 안 되겠느냐고 상의드렸죠. 
그 때 이미 3학년이 되어서 전학이 쉽지 않았지만, 어렵사리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대안학교를 들어가 보니 자신의 목표가 ‘대학 진학’이라고 얘기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간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성적 받아서 대학에 들어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이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놓이자 해방감보다 지금까지 사람들 말에 따라 맹목
적으로 걸어온 지난 시간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왔던 길을 멈추고 ‘생각을 좀 다시 해봐야겠다’, ‘진지하게 고민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인문계 고등학교 다닐 때는 새벽 5시에 집을 나와서 새벽 2시에 들어갔어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학원에 가서 피아노 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파김치가 돼서 곯아떨어졌죠. 
잠깐 눈 붙이고 일어나면 다시 학교에 가야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잠 잘 시간도 부족한데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대안학교에 들어가 보니 생각할 시간이 많더라고요.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여러 가지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너무 좋았죠.”

그녀의 주위에는 대학 입학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실제로 대학교를 가지 않고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그녀의 귀에 종종 들려왔다. 
그녀에게도 대학을 가지 않고도 꿈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혀 있던 생각이 어디든지 마음껏 뻗어 나가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자, 그녀는 마침내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피아노를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영화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주변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마치 위험한 길에 접어든 어린 아이를 나무라듯 혀를 차며 말렸다. 
그러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선생님들은 영화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그래, 그러면 열심히 해보자.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까’라며 같이 고민해 주었다. 
그 이후 그녀는 학교에서 ‘영화 하고 싶어 하는 아이’로 통했다.

영화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다음, 백마강 씨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학교에 연극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스틸 카메라 하나 갖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영상반을 만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3이었지만 그해에 대학 들어갈 마음이 없었던 그녀는 학교에 연극반을 만들어 학교축제인 풀무제 때 공연도 하고, 영화도 보러 다니고, 학교의 비디오 자료를 찾아보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탄탄히 키워나갔다.

“본격적으로 영화와 가까워지려면 문화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서울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부모님께 무작정 서울로 가겠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대학 진학을 결심했고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죠.
연극영화과는 떨어지고 2지망이었던 철학과에 합격을 했어요.”

그녀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2학년 때까지는 가평에서 서울로 통학했다. 
학교에 영화 제작 중앙 동아리가 있었지만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 때문에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할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영화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싶었던 그녀는 학과 내에서 영화감상 동아리를 만들었다.

“원래 계획은 1학년만 다니고 다시 시험을 봐서 연극영화과에 가려고 했는데, 철학과 전공 공부와 영화감상 동아리 활동을 하다 보니 학교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생각을 접고 대학생활을 즐겁게 마치게 되었어요,”

이력서 100통 넣기

백마강씨는 졸업 후 정식으로 취직을 하지 않고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모았다. 
다른 직장에 취업을 하면 영화를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영화 관련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단편영화 만드는 곳을 찾아서 무작정 쫓아다녔다. 
사람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면 어디든 전화를 해서 ‘아무것도 모르지만, 열심히 일하겠으니 쫓아다니면서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렇게 단편영화 찍는 곳에서 일을 배우면서 일반 상업영화 연출부 모집 공고가 나기만을 기다렸다.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채용하던 시절이라 구인공고가 잘 나지 않았지만 어쩌다 구인 공고가 올라오면 그녀는 빠짐없이 이력서를 썼다.

“이력서를 100통 넘게 썼지만 연락을 받은 곳은 10곳도 안 되었어요.
그중에서 면접까지 본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죠. 
그래도 계속 이력서를 넣었어요. 
거의 1년 반 만에 상업영화 찍는 곳에서 면접을 봤고 운 좋게 연출부 막내로 입사했는데, 4개월도 못 가 그 영화가 망하는 바람에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일을 그만두어야 했어요.”

다행히 그 당시의 조감독이 다음 영화를 찍을 때 그녀를 다시 불러주었다. 
연출부 직원을 채용하는 것은 조감독의 권한인데 함께 고생했던 스태프들을 눈여겨보았다가 다음 영화에 데려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게 그녀의 손길이 닿은 첫 작품이 개봉을 했다. 
코미디 액션영화 <뚫어야 산다>에서 그녀는 연출부 막내로 소품을 담당했다.

“상업영화도 한 편 찍었겠다, 이제 일자리가 줄줄이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1년 반을 쉬어야 했어요. 
그 당시의 조감독님이 다음 작품 때 다시 불러주셨지만 그 영화가 또 망했어요. 
개봉도 못했죠. 
그렇게 그 조감독님과 세 번 같이 일했는데 개봉한 것은 한 작품밖에 안 돼요.”

연출부는 준비할 게 많기 때문에 투자자가 결정되기 전부터 일을 시작한다. 
시나리오만 있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해 배우 알아보고, 투자사 알아보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다 없던 일이 돼버린다. 
설상가상 항상 불러주던 조감독마저도 감독 준비를 하면서 더 이상 그녀를 끌어줄 사람이 없게 되자 그녀는 다시 이력서를 넣으며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이력서를 보내고 또 보내고, 그렇게 1년 반 동안 집에서만 있었어요.
정말 힘든 시간이었죠. 
돈도 안 벌고 출근도 안 하고 아버지가 출근하시면서 ‘쟤, 죽은 거 아니냐?’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 그녀의 나이 29세였다. 
그녀는 하는 일 없이 언제까지나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어머니에게 올해 안에 영화 일을 못 구하면 아예 영화판을 떠나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그렇게 그녀가 모질게 마음을 먹자, 다시 한 번 기회의 문이 열렸다.

“그해 7월 말에 조감독 협회에서 경력자들을 대상으로 두 달 동안 특강을 개최해서 거기에 지원하여 두 달 동안 수업을 들었는데 그곳에서 알게 된 조감독한테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합의가 되야만 결정하는 문화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라는 영화에서 백마강 씨가 맡은 일은 캐스팅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 끝에 얻은 기회였기에 감사한 마음이컸고, 열심히 해서 도약의 발판으로 삼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열심인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그 영화가 끝나자 함께했던 조감독이 그녀에게 다음 영화도 같이 하자는 제의를 했다. 
다음 작품은 <신부수업>이었는 데 그녀는 여기서도 막내로 들어가 고증을 담당했다.

“매일 책을 펴놓고 공부했어요. 
가톨릭 방송을 매일 들었고, 주말이면 미사 보러 성당에 다니면서 의상, 소품, 가톨릭 의식에 대해 공부했어요.”

이렇게 영화 세 편을 하고 나니 어디든 이력서를 넣으면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감독 셋이서 세 편의 영화를 함께 만드는 옴니버스 영화를 기획하면서, 이제까지 스태프 막내로만 일하던 그녀에게 조감독 제안이 들어왔다. 
비록 30분짜리 단편영화였지만 조감독으로 일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기쁨에 들뜨는 것도 잠시, 그 영화 촬영 일정이 생각처럼 쉽지 않아 계속 늦어졌다. 
하지만 ‘세옹지마’라고 하더니, 그녀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을 때 <가족의 탄생>이라는 장편영화에서 다시 조감독을 맡게 되었다.

“어떤 감독과 일해도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었어요. 
영화 일하는 현장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화 한 편을 찍을 때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함께 일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대인관계가 중요한데,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하는 과정에서 대안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대안학교는 항상 토론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합의가 되어야 결정하는 문화였으니까요. 
회의가 많아서 힘드니 회의 방법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회의하고, 회의를 줄이자는 회의도 하고 합의가 되지 않으면 결정을 할 수 없으니 어떻게든 합의하기 위해 상태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의견을 모으고, 한 발 양보하고 대안학교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에 스태프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그녀는 그 뒤에도 <하모니>와 <혈투>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현재 그녀는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공동작업으로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 기로에 서서 고민 중이다. 
대개 조감독은 감독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순서대로라면 그녀도 감독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지만 그녀는 ‘전문 조감독’이라는 분야를 개척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전문 조감독’은 말 그대로 조감독 일을 전문으로 하는 것인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없는 직업이에요. 
외국의 경우 전문 조감독이 있어서 그에 따른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조감독이 보다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죠.”

그녀는 스태프들과 어울려 작업하면서 감독의 스케줄 관리, 사람들 사이의 갈등 해결 등 전체를 조율하는 ‘조감독’ 자리가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경험을 쌓다 보니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전문화하여 독립된 전문 직업군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전문 조감독’은 감독이 되는 것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감독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인지, 전문 조감독이라는 분야를 개척할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에요. 
인생의 최종 목표를 두고 봤을 때 저는 지금 반 정도 와 있는 것 같아요. 
감독을 하는 것도 또 다른 시작이고, 전문 조감독을 하는 것도 없는 직업을 만들어야 하는 새로운 시작이니 어느 쪽이든 저에게는 도전이지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돈을 덜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만큼 돈을 벌기 어려운 직업이지만,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녀가 계속 현장에 나가서 스태프들과 일하고 싶고 도전하게 만드는 이유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아무도 안 하는 일을 나 혼자 한다 해도 두렵지 않다

“남들이 안 하는 일을 나 혼자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들과 똑같이 살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 같은 불안에서 벗어나 남들과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대안학교에서 얻었어요. 
나 하고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온 세상에 나 혼자 남아서 이 일을 한다고 해도 그다지 무섭지 않아요. 
그것이 전혀 무서운 일이 아니라는 걸 배웠거든요. 
오히려 더 자랑스러울 수도 있다고 배웠어요. 
요즘 후배들은 우리보다 생각이 더 커져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것을 자신의 힘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그리고 도전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다는, 이루어질 때까지 도전하겠다는 의지도 대단해요. 
우리 학교가 굉장히 무서운 학교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현재 대안학교(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졸업생들 중 일부는 10년 정도 서울에서 보고 배운 경험을 가지고 아무것도 없는 동네에 들어가서 마을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있다. 
생협(생활협동조합)도 만들고, 마을 자체에서 운영하는 술집도 만들고, 직접 농사지은 농작물을 파는 곳도 만들고, 도서관과 유치원도 만드는 ‘마을문화만들기’가 그들의 꿈이다. 
마을 공동체를 보면서 자란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한 꿈이자 미래다.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들었던 사회와 직접 겪은 사회는 달랐어요.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학벌이나 스펙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 들어가 보면 자기 일 열심히 하고,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그런 사람을 더 필요로 해요. 
남을 이기는 방법만 가르치는 학교 현실이 안타까워요. 
남을 이기고 위에 서려는 마음이 있으면 사람들과 합의를 하기도 힘들고 대화를 할 때도 자기 얘기만 하기 때문에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요.”

특히 여럿이 마음을 맞춰야 하는 공동 작업의 경우 한 사람이 너무 두드러져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조금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서로 보완해 가면서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집중할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백마강 조감독이 영화판에서 인정을 받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접합시키는 시멘트 같은 역할을 잘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154&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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