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 인터뷰

여러 분야의 진로∙직업 전문가와 사회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직업 세계를 확인하고 진로선택 방법을 알아보세요.

커리어패스

글로벌분야

(글로벌) 가진 게 없어도 꿈을 갖고 도전하니 유엔 직원이 되었어요

UN
홍정완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국가 담당관

홍정완 씨는 현재 유엔 본부 사무국에서 3년 넘게 IT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세계로 시야를 넓히고 봉사에 관심을 갖게되며 유엔에서 일하고 싶은 꿈을 키웠다. 

학력도 낮고 경험도 없고 나이는 많던 그는 치열한 노력과 열정으로 마침내 그 꿈을 이뤘다.


유엔 본부에서 IT 관련 일을 해요


유엔 본부 사무국에는 OCHA(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라는 부서가 있다. 

우리말로 하면 인도주의 업무조정국이라는 부서다. 

세계적으로 자연재해나 전쟁이 나는 등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전 세계의 많은 구호단체에서 물자들이 들어온다. 

그러면 유엔 본부에서 그 모든 물자나 인력을 받고 배분하는 역할을 한다. 

중간에서 정보교환을 하고 자금을 배정하는 등 조정을 하는 일이 바로 OCHA의 일이다. 

OCHA는 뉴욕과 제네바에 사무실이 있다. 

총인원은, 2000명 가까이 된다.


정완 씨는 OCHA 내에서도 IT 섹션에서 근무한다. 

IT 섹션에서는 서버와 소프트웨어 관리, OCHA 내에서 쓰게 될 프로그램 관련된 개발도 하고, 웹사이트나 인트라넷 웹사이트 관리 등 컴퓨터에 관련된 모든 일을 한다.


학창시절에는 문제아였어요


정완 씨는 학창시절 소위 문제아에 속했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좀 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간 후 점점 성적이 떨어졌고 졸업할 때는 거의 전교 꼴지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반장을 했는데, 한 학기 하다가 잘릴 정도로 반항아였다.


사실 정완 씨가 불안정한 십대 시절을 보낸 것에는 집안이 화목하지 못했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는 미용실을 운영하셨지만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을 잡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게다가 부모님 사이의 불화도 있어 정완 씨도 방황을 하게 된다.


그런데 정완 씨가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은 주변 사람들의 힘이 컸다.

학교 선생님 중 한 분이 정완 씨에게 마음을 많이 써주었고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 친구도 큰 힘이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전문대에 진학해 무역과를 전공했다. 

사실 전문대도 엉망으로 다니다가 군대 제대하고 나서 좀 정신을 차렸다. 

심기일전해서 과 수석도 하게 되고, 그러면서 교수님과도 친해지면서 공부에 대한 열의도 생겼다.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했고 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대학에 다니면서 정완 씨는 경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뭘 해서 먹고 살 것인지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당시 마침 인터넷이 처음 생기고 인터넷이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것을 전망하면서 전산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전산학원에 다니면서 IT를 알게 되고 인터넷 관련된 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정완 씨의 여자 친구는 사회복지학과를 전공했었다. 

그런데 사회복지학과라는 것이 그 당시에 처음으로 생겼던 거였다. 

정완 씨가 보기에는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여자 친구는 주말마다 나가서 유아원에서 일하고, 복지원에서 일하고 하면서 아주 행복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정완씨는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단순히 돈만 보고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을 해냈을 때 행복감이 크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그래서 정완 씨도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봉사라는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우연하게 그가 당시 천리안 PC통신을 하면서 국제협력단(KOICA)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전에 필리핀에 갔다 와서 필리핀에 대한 동경심도 좀 있었고, 영어도 더 배우고 싶었다. 

또 당연히 봉사활동도 하고 싶어서 지원을 하게 됐다.


국제협력단 활동을 하며 유엔에서

일하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필리핀에 국제협력단의 봉사단으로 뽑혀 컴퓨터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가 1996년이었다. 

봉사단에는 굉장한 경력과 학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경력도 없고 전문대를 나온 정완 씨가 뽑힌 것이 정말 신기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처음에 봉사단들이 선발이 되어서 가면 처음 2~3개월은 현지에서 훈련을 받는다. 

필리핀어를 배운다든지 필리핀의 문화를 배우게 된다. 

그러고 나서 자기가 일하게 될 임지로 가게 된다. 

그 임지로 가서 일할 때 그에게는 어떻게 보면 도전이었지만 동시에 그 도전으로 인해서 얻은 게 굉장히 많았다.


당시 정완 씨는 스물여섯 살이었는데 혼자 외국에 살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사실 봉사라는 것이 수혜 받는 기관에서는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봉사단은 자기가 알아서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일을 한국에서 해보지 않아서 낯설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가서 놀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노력을 했다. 

그러면서 조그마한 프로젝트도 하게 되고, 필리핀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면서 작지만 의미 있는 프로젝트들을 이루어냈다.


그가 일했던 곳은 필리핀의 한 주립대학이었는데 조그마한 소규모 네트워크를 만들어서 학생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작업들을 했다.


처음으로 스스로 뭔가를 만들고 시도해보며 보람과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2년 임기가 다 됐을 쯤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KOICA를 그만두면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는 KOICA를 조금 더 크게 생각해보면 어떤 조직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 

그때 생각나는 게 국제기구였다. 

그리고 그게 유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유엔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당시 유엔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조건은 거의 안 됐다. 

하지만 일단 꿈을 꾸니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게 됐다.


유엔에서 일하고 싶어 간 유학,

공부하고 일하며 치열하게 살았어요


KOICA를 마치고 나서는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유엔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자 친구에게 프로포즈를 하고 같이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가 지원했던 학교는 콜로라도에 있는 파익스픽 커뮤니티 칼리지(Pikes Peak Community College)라는 2년제 대학이었다. 

콜로라도 지역으로 간 이유는 친척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2년제인 커뮤니티 칼리지를 택한 것은 학비가 쌌기 때문이다. 

국에서 커뮤니티 컬리지는 편입이 쉽기 때문에 일단 2년을 여기서 공부하고 4년제 대학의 3학년으로 편입하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금이 부족해서 유학비자를 받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아내의 직업을 넣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정말 운이 좋게 유학비자를 받았다.

결혼을 하고 스스로 유학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비자는 받았지만 충분한 자금 없이 유학을 갔으니 그때부터 고생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당시 우리나라는 IMF여서 환율이 높았다. 

한 2~3개월 지나니까 돈이 다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일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친척들이 하던 빌딩 청소 일, 중국집 배달 일 등 여러 가지 일을 해서 학비를 내고 생활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벌기 시작했다. 

무려 5년 동안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며 공부했다. 

그리고 4년제인 콜로라도 주립대(University of Colorado)로 편입도 했다.


정완 씨의 전공은 경영정보학(MIS,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이었다. 

경영, 경제 쪽도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들과 함께 관련된 IT도 공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물여덟 살에 미국에 와서 하는 공부였기에 쉽지는 않았다. 

영어를 잘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정완 씨는 무조건 다 외웠다.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난 후 그는 이제 뉴욕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미국에 온 것은 유엔에서 일하고 싶어서고 유엔 본부는 뉴욕에 있었다. 

그래서 뉴욕에 있는 대학원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당시 뉴욕대에 소속되어 있던 폴리테크닉 대학(Polytechnic University)에서 석사 공부를 시작했다. 

지금은 뉴욕대와 편입이 되어 폴리테크닉이라는 이름은 없어졌다고 한다.


유엔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인턴으로 기회를 만들어갔어요


어떻게 하면 유엔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니 인턴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래서 인턴을 지원하게 된다. 

인턴에 합격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으로 서른다섯 살이었다. 

유엔에서 공식적으로 치르는 시험을 보고 들어갈 수 있는 나이는 서른두 살까지다. 

그래서 그는 인턴을 시작하며 이 기회를 통해 어떻게든 유엔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턴을 거의 1년을 넘게 했다. 

그런데 학교도 가야했고 저녁에는 중국집에서 일을 했으니 유엔에는 일주일에 두세 번만 나갔다. 

인턴은 6개월 계약이지만 6개월 하고 끝났다고 해서 나올 수는 없었다. 

엔과의 인연을 끊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엔 안에서 다른 인턴을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인턴십 사무실에서 예전에 만들었던 웹페이지를 새로 만들자는 프로젝트가 생겼다. 

그는 그 일에 바로 지원을 했다. 

인턴십 웹사이트를 만들었더니 만족스러웠는지 또 다른 인턴십을 소개해줬다.


유엔을 포기해야 했던 순간,

결국 손을 내민 건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몇몇 부서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런데 대학원을 거의 졸업할 때가 되면서 비자 문제가 걸렸다. 

학교가 마치면 비자도 끝나기 때문이다. 

계속 뉴욕에 머물려면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유엔의 인턴은 월급을 주지 않는데다 대학원생만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여행사에 취직이 됐다. 

그곳에서 웹프로그램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사나흘이 지났을 때 유엔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인턴할 때 그의 일을 좋게 본 직원이 다른 부서에 소개를 해준 것이었다. 

거의 6개월에 걸쳐 면접을 보고 마침내 2007년 8월부터 처음으로 돈을 받으면서 유엔에서 일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로 시작해서 그게 서로 연결선이 되어 기회가 온 것이다.


고용은 되었지만 비정규직이었다. 

2년 동안 일을 하다 정완 씨의 능력을 높이 산 상사에 의해 정규직으로 고용이 되었다. 

오직 유엔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에 오고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공부하고 일하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큰 꿈을 가지고 세계로 나가세요


정완 씨는 KOICA에 가게 되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에 변화가 많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청소년들에게도 ‘기회가 있으면 해외에 나가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가서 세상 경험을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돈이 없으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갈 수 있다. 

동남아처럼 비교적 저렴한 나라를 택하면 된다. 

그러면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고 한다. 

그가 실제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에 KOICA로 간다고 했을 때 집안에서는 반대를 했다. 

왜냐하면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고 해외에 머물면서 거의 자원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완 씨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가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걸로 인해서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모든 경험은 다음을 위해 분명 좋은 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KOICA에서의 활동이 끝날 즈음 유엔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 그 꿈은 그가 그 나이에 이룰 수 없는 꿈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물여덟 살에 유학을 가서 다시 대학교를 나오고 대학원까지 간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꿈을 꾸면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이루어가는 과정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들이 사실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바보 같은 일들을 한 적도 있었고, 힘든 일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중에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걸 자신이 헤쳐 나갔기 때문이다. 헤쳐 나온 뒤 느끼는 성취감은 훨씬 더 크다.


“큰 꿈을 가지십시오, 큰 꿈을.”


그는 강조한다. 

단순히 좋은 대학만 간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사회에 나가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큰 세계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 한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5772&curPage=1

목록보기

교육부 한국직업능력연구원 국가공인 웹 접근성 품질인증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