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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공연분야

(연극공연) 한국무용을 하다가 배우가 되었어요


조휘주 난타 배우

조휘주 씨는 ‘난타’의 배우다. 
용인대학교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고 15년 정도 무용을 해왔다. 
그녀의 공연이 끝난 후 난타의 공연을 관람하였는데, 공연을 보며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국에 온 후 졸업 후 오디션을 봐서 난타의 배우가 되었다.

난타의 배우로 일해요

난타는 초연 이후로 15년 동안 계속해서 내국인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공연을 선사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이 ‘난타’하면 떠올리는 타악, 즉 ‘두드리기’와 함께 넌버벌(non-verbal, 대사 없는) 공연으로 재미있는 드라마를 가미한다.

조휘주 씨는 오디션까지 포함하여 8개월 정도의 연습기간을 거쳐 지금 4개월째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무대에 선 이후에는 연출팀에서 배우들의 공연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 한다고 한다. 
연출팀의 피드백을 통해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팀별로 공연 외 시간에 모여 더 좋은 공연을 위해 연습을 한다.

무용을 하는 튀는 학생이었지만 진로에 대한 고민은 있었어요

휘주 씨는 8살 때 처음 무용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 많은 학생들이 해봤을 발레로 처음 시작을 했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공부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기에 무용이 잘 맞았다. 
또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한국무용을 시작하였다.

학교에서 공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한다. 
수능 전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자라는 것을 해봤을 정도다. 
보통 학교, 무용학원, 집이 일상이었다. 
어떻게 보면 틀에 박힌 생활이었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도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무용실에 있으면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내 마음대로 춤을 추고, 하고 싶은것을 할 수 있는 곳이다’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다소 튀는 학생이었다. 
일단 무용을 전공했기에 그녀는 혼자만 머리가 길었다. 
또한 춤을 췄기에 앞에 나가서 레크레이션도 많이 했다. 
친구들 앞에서 춤을 추고, MC도 보는 등 활발하고 끼가 많은 학생이었다.

친구들은 그런 휘주 씨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일찍 진로를 정했기에 마음이 편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는 그렇지만은 않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경제적 부담을 느꼈다. 
게다가 무용은 미래에도 안정적 수입이 보장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항상 걱정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또 사춘기 때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는 항상 학원과 집만 다녔기에 친구들과의 거리감이 생겼다. 
친구들이 같이 놀 때 그도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못되기에 소외감도 느꼈다. 
하지만 그때마다 중요한 콩쿠르가 생기는 등 그녀가 집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져서 잘 극복할 수 있었다.

입시에서 좌절했지만 어머니라는 든든한 멘토가 있었어요

대학 시험을 볼 때 전공과 부전공을 미리 정하여 시험을 봐야 하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일찍이 준비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전공으로 발레를 선택하고 부전공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을 했다. 
그러던 중 학원을 옮기게 되는데 그곳 선생님이 한국무용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선생님이 추는 춤에 감동을 받아 한국무용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6학년 때 최종적으로 결정을 하였다.

부모님은 비교적 자유롭게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지지해주셨다. 
가정형편상 경제적으로 풍족히 뒷받침을 해줄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가 원한다면 무용을 하라고 응원해주셨다. 
특히나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그녀의 인생의 멘토다.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낙방했을 때다. 
터무니 없이 비싼 입시 레슨비가 부담되어서 제대로 된 레슨도 못받고 혼자 열심히 연습해봤지만 결국 시험에 떨어졌다. 
당시 많이 낙심하고 방에서 울며 어머니께 ‘왜 나한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
나처럼 열심히 하는 애한테 기적이 일어날 법도 한데’라고 하소연을 했다. 
이때 어머니는 ‘지금 네가 무용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하라’고 말씀해주셨다.

당시 휘주 씨의 가정환경에서 무용을 하고 있단 것도 기적이고, 다른 아이들보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았다는 것도 기적이라고 말씀해주신 것이다. 
어머니의 그 말씀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인생의 좌우명이다. 
어머니는 그녀의 멘토로서 항상 큰 힘이 되어주셨다.

대학 시절엔 자격증과 연습에 매달렸어요

휘주 씨는 결국 용인대학교 무용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때는 자격증을 따는 수업을 많이 들었다. 
몸을 쓰는 일이기에 운동 강사 자격증들을 많이 땄다. 
외부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양질의 수업을 통해 여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현재 휘주 씨는 국제 필라테스 자격증, 대한요가협회 자격증, 유아무용교육 자격증, 레크레이션 자격증, 댄스스포츠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

또한 무용학과로서 창작무용도 중요한 수업 중 하나였다. 
학생들끼리 새로운 무용을 짜서, 함께 공부하고, 발표하고,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였다. 
보통 이렇게 학과 생활만 하였고 다른 활동은 하지 못했다. 
워낙 무용이 많은 연습시간을 필요로 하다 보니 교수님들께서 학생들이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하셨기 때문이다.

연습시간의 경우 보통 9시부터 5시까지 수업이라 치면 정규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5시부터 8시까지는 특강이란 것을 듣고, 그 후에는 8시부터는 워크샵이란 것을 하게 된다. 
학기마다 본인의 창작 무용을 발표하는 데 이것을 점검하고 연습하는 시간이다. 
이렇다 보니 거의 집에 가지도 못하고 친구네 집에서 자고 등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해외 공연들을 하며 애국심도 커졌죠

대학생활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해외 공연이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공연 중 하나가 난타를 만난 두바이에서의 공연이다. 
나라를 대표해 간 것이었기에 자부심도 있었고, 최고급 호텔과 음식들, 고품격 관광 등 굉장한 경험을 했다.

또 다른 공연으로는 한국무용 선생님을 따라 간 일본에서의 공연이다. 
이때 아리랑TV에서 다큐멘터리 촬영을 왔었다. 
그때가 8.15 광복절이라 촬영 관계자들이 ‘광복절에 일본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냐’라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당시 한국무용을 하며 애국심을 키워왔던 그는 ‘일본인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광복절에 일본인들이 우리사람들의 문화를 보고 대단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외국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지금도 휘주 씨는 애국심이 크다. 
춤을 추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경험하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겼다. 
아이들에게도 알려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휘주 씨는 청소년들에게도 책상 앞에 앉아서 형광 펜으로 밑줄만 그을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스스로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난타에서 기회를 잡았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에는 한국무용 선생님의 소개로 학원에서나 개인 레슨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유아교사 자격증이 있었기에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무용이나 장구를 가르친 경험도 있다. 
그 선생님께서는 항상 그녀를 많이 도와주셨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무용의 길로 들어서 무용을 할 수 있게 이끌어줬고, 또 그녀가 난타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전혀 원망하지 않고 편히 그녀를 보내주셨다.

휘주 씨가 난타 배우가 된 것은 두바이에서의 공연이 계기였다. 
대학 시절 ‘두바이 30주년 수교 행사’에 공연 초대를 받았는데 이때 난타도 초대를 받아 함께 공연을 하게 되었다. 
휘주 씨의 공연이 끝난 후 난타 공연을 보며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관객으로서 난타 공연을 보러 가려고 예매를 하기 위해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오디션 공고를 보았다. 
그때까지 2주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급하게 신청하고 오디션을 준비했다. 
무용을 재즈처럼 만들고, 끝부분에 타악 퍼포먼스를 넣기도 했다.

또 그 이전에 두바이 수교 공연 이후 난타 배우들에게 메일을 돌렸던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오디션에 대한 팁과 조언을 구할 수 있었다. 
중에 알고 보니 그녀의 이런 행동이 난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이슈가 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열정을 높이 산 것이다.

오디션을 통과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워크샵까지 거쳐야 난타배우로 최종 선발이 될 수 있었다. 
서바이벌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중간 평가 때 탈락자가 발생하기도 하고, 배우가 돼서도 분발하지 않으면 낙오하게 되는 것이었다. 
굉장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지금은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기에 만족한다.

연기를 배우지 않았다는 콤플렉스, 동료의 힘으로 이겨냈어요

무용을 전공한 것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무척 도움이 되었다. 
‘난타’하면 대게 타악만 생각하지만 사실 엄청난 연기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연기를 잘 해야 관객들이 두드림에도 집중할 수 있다. 
그렇기에 명칭도 난타 ‘배우’인 것이다. 
그는 한국 무용을 전공했기에 누구도 낼수 없는 몸짓과 두드릴 때의 호흡과 움직임은 월등하다. 
하지만 연기를 전공한 적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그녀는 난타 배우로서 일할 수 있다는 것에는 만족한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지기에 이 부분에 있어서는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도 동기 여배우의 도움으로 연기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 엄청난 라이벌이라 불편했다. 
또 초기에 남자 배우들이 그녀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연기적으로 부족한데 무용으로 커버하려 한다는 생각들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기 여배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이해해주었다. 
그녀에게 연기에 대한 지식을 많이 배우고 쌓으면서 극복해나갔다. 
현재는 팀원들과도 즐겁게 지내고 연기는 배움의 연속이라는 자세로 일하고 있다.

무대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꿈이에요

“무용실에서 제가 자유로움을 느꼈던 것처럼 난타 공연을 하면서도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습니다.”

휘주 씨는 말한다. 
난타를 할 때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기에 항상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보는 무대 위 자신의 모습이 자유로워지면 좋겠다고 한다. 
그래서 연기력 향상을 위해 여러 노력을 한다. 
혼자 인터넷이나 책으로 연기 지침서를 보며 연기 공부를 한다. 
로 연기를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연기를 배운 배우들에게 뒤쳐지지 않게 나름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또한 역할이 요리사이기에 요리 공부도 한다. 
요리 채널도 많이 보고 음식점에 가면 주방을 유심히 살핀다. 
요리사와 주방을 보며 익숙해지려 하고, 영화와 공연도 자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다. 
또 장기적으로는 관객들에게 에너지를 주는 공연을 직접 제작해보고 싶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다른 사람들도 즐겁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일이라고 휘주씨는 말한다. 
공연을 하며 그녀는 매 순간 그런 것을 느낀다고 한다. 
나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쓴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일이 더 의미 있어지고, 열정이 생기고, 오늘은 또 어떤 관객들과 함께할지 기대가 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본인의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에게만 그치지 말고 타인들과 함께 어우러지며 본인 스스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라는 것이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442&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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