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 인터뷰

여러 분야의 진로∙직업 전문가와 사회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직업 세계를 확인하고 진로선택 방법을 알아보세요.

커리어패스

연극공연분야

(연극공연) 재능을 발견하면 공부를 못해도 성공할 수 있어요


조기철 PMC 리듬감독

조기철 씨는 난타의 리듬감독을 맡고 있다. 

타는 80%가 타악으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다. 

리듬감독은 공연에 쓰이는 리듬을 만들고, 신입 배우들에게 기초를 가르치고, 기존 배우들을 관리하며 피드백을 해주는 역할을 한다. 

신입의 경우 보통 타악을 해본 경험이 없기에 처음부터 알려주게 된다. 

기존 배우들에게는 공연을 보고, 개선해나가야 할 부분들을 알려준다. 

그래서 ‘리듬 닥터’라고도 불린다.

기철 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물놀이에 빠져 지금까지 23년 간 타악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물놀이와의 운명적 만남이 인생을 바꿨어요


기철 씨는 매우 활달하고 주의가 산만한 장난꾸러기였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성적도 하위권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숙제를 안 했다고 담임선생님한테 붙들려 저녁 7시까지 학교에 남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담임선생님께서 사무보조 선생님께 장난으로 그를 ‘뒷산에 묶어놓으라’고 말했는데, 어린 마음에 충

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부모님 몰래 학교도 빠졌다.

이때부터 이미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공부 대신 태권도, 합기도, 주산 등 좀 활동적인 일들을 좋아했다.


어렸을 땐 단순하게 먹을게 많을 것 같다는 이유로 농부가 되고 싶기도 했고, 당시 시골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직업인 소방관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는 실업 고등학교를 다녔었는데 당시 학교에 사물놀이 동아리가 있었다. 

당시 가장 친하던 친구가 먼저 사물놀이를 시작했고, 그가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전혀 사물놀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운동을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일방적으로 사물놀이 동아리 신청을 받으러 온 선생님과 선배들에게 “얘도 사물놀이 하겠대요!”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엉겁결에 시작하게 되었지만 막상 해보니 사물놀이에 푹 빠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적 대보름 때 마을주민들이 모여 같이 사물놀이를 하는 행사를 본 적이 있고, 중학교 때도 학교 운동장에서 사물놀이를 하는 학생들을 보며 ‘가락이 구수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일찌감치 사물놀이에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물놀이에 빠져서 부모님의 반대도 극복했어요


사물놀이 동아리를 시작한 후 합숙을 하며 거의 학교에 살다시피 했다. 

사물놀이 가락의 리듬에 매료되어 혼자서 맹렬히 연습했다. 

당시 그의 롤 모델이었던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테이프와 비디오를 사다가 계속해서 듣고 보며 연습했다. 테이프를 하도 들어서 1주일 만에 줄이 다 늘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동아리에서는 여러 대회와 행사에 참여하고, 길거리 공연을 하기도 하고, 일본으로 해외 공연을 다녀온 적도 있다.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시골에서 사물놀이는 무당들이나 하는 거라는 부정적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강요하신 것도 아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공부는 포기하셨고, 그렇기에 오히려 기술을 배워보라며 실업 고등학교를 권유하셨다. 

더군다나 사물놀이 동아리에서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기에, 담임선생님은 어머니를 학교로 불러 그가 사물놀이를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그러나 “꼭 사물놀이를 해야겠니?”라는 어머니의 물음에 그는 “네, 이거 꼭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의 대답에서 진심이 느껴졌는지 어머니는 알았다고 하셨다. 

그 후 열심히 거리 공연도 하고 대회에도 나가는 모습을 보고 그를 믿어주셨던 것 같다.


대학을 갈 생각도 하지 않았죠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기에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학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졸업을 하고 나니 사물놀이만 하던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서 힘들어하던 중 고등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광주 패밀리 랜드라는 곳에서 사물놀이패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군대 입대 전까지 2년 동안 일했다.


군대도 친구와 함께 오디션을 봐서 연예병과의 사물놀이패로 들어가게 됐다. 

그곳에선 훈련대신 매일 연습을 했기에 당시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처럼 운이 좋게 계속해서 사물놀이를 할 수 있었다.


제대 후 여러 일을 하다가 난타와 인연이 닿았어요


제대 후 처음에는 ‘유태평양’이라는 판소리 신동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며 같이 해외 공연을 다녔다. 

그러다 광주에서 사물놀이를 같이 한선배, 동기들과 함께 팀을 이루어 시립 국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 현재 아내를 만나게 되었는데, IMF가 터지고 구조조정이 일어나며 둘 중 한 명은 사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단장님께선 그가 남아있길 바라셨지만 그도 같이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는 이전에 그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쳐주신 스승님과 함께 작은 발표회들을 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도깨비스톰’의 단장님이 그가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는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도깨비스톰은 타악 연기 퍼포먼스였는데, 이때 처음으로 연기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 도깨비스톰이 어려워져 PMC 프로덕션이 인수하게 되면서 그 때부터 PMC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PMC의 송승환 회장님, 이광호 회장님이 그에게서 끼를 발견했는지 지속적으로 이끌어주셔서 2008년에는

난타에 입문하여 지금까지 배우와 리듬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공부를 못한다고 좌절하지 마세요


27살, 00학번, 늦은 나이에 대학도 갔다. 

이때 정부 차원에서 전통문화 계승을 위해 초, 중, 고등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사물놀이 동아리를 설치하도록 했다. 

그래서 당시 사물놀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자리가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더 우대하는 것이 아닌가. 

래서 사물놀이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 싶어 대학에 갔다. 

지금은 타악을 깊게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원에 가야겠단 생각도 하고 있다.

학창시절 집안도 어려웠고 공부도 못했지만 기철 씨는 자기만의 재능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위치에 이르렀고 청소년들에게도 이렇게말한다.


“공부를 못한다고 좌절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말고,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나가길 바랍니다. 그 길로 최선을 다해 가다 보면 좋은 기회가 올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사랑하는 일이에요


사실 난타 공연은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오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철 씨는 자신이 하는 일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한다. 

일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PMC의 대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문화체육부장관이 돼서 예술 계통을 살려보고 싶다는 꿈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자기 일을 사랑하며 열심히 하다 보면 앞으로 좋은 기회가 많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요즘 책을 열심히 읽는다.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공부를 하는 방법조차 모르지만 일단 무턱대고 책이라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5910&curPage=1

목록보기

교육부 한국직업능력연구원 국가공인 웹 접근성 품질인증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