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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분야

(문화콘텐츠) 세상을 위해 내 인생을 어떻게 쓸 것인가


박세상 도시문화기획자

‘Mr.WORLD i’mpossible factory’라고 쓰여 있는 간판 그대로, ‘세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 사장이 ‘불가능공장’에서 돌멩이를 팔고 있다. 
박세상 대표는 돌멩이 장수가 아니라 도시기획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정부의 지원금도 없이 시작했다는 ‘불가능공장’이 특별할 것 없는 돌멩이를 팔아서 연매출 3억 원을 올린다니,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봉이 김선달이 따로 없는 그를 만났다.

전주 한옥마을의 한복데이

박세상 대표가 고향인 전주에 내려와 한옥마을에서 3년 동안 한 일은, 지역에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해결하는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필요한 일’이란 지역의 문제점 혹은 상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일할 때 느끼는 불편함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는 그 실천의 일환으로 축제, 여행, 게스트하우스 경영, 버스 운영, 쿠폰 제작, 버스킹, 벽화 그리기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있다. 
현재 그는 한옥마을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활동도 하고 있으며, 한옥마을 안에서 문화공간을 운영하면서 한복을 대여해주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은 우리의 전통이 살아 있는 마을이지만, 이제 그 차원을 넘어서서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일상적으로 돌아다니는 ‘한복 입는 도시’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한복데이’를 진행해 왔습니다. 
현재는 이런 일들을 ‘불가능공장’이라는 회사를 통해서 하고 있죠.”

도시를 기획하는 그에게 ‘한복데이’의 기획과 진행은 전주 한옥마을을 보다 멋진 마을로 만들기 위한 과정 중 하나다. 
우리가 당연하게 입고 살았던 한복을 시대의 흐름이 따라 입지 않고 있는 것이니, 어쩌면 원래의 것을 되찾는 활동이기도 하다.

축제를 기획하거나 콘텐츠를 발굴해내는 관점에 있어서 그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보다 갖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찾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그것들을 찾다 보니 그는 갖고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이런 행사가 오히려 신선하고 특색 있다고 생각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지나갔을 하루를 한복을 꺼내 입고 즐기는 특별한 날로 만드는 이 행사는 처음에는 전주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다른 도시까지 자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는 2015년에는 기업들도 참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 이벤트를 통해 한복을 입는 이유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당일 한복을 입고 한옥마을을 찾으면 한옥마을 전 지역에서 30개의 공연팀이 벌이는 버스킹(busking,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얻기 위해 길거리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는 행위)을 하루 종일 즐길 수 있고, 40개의 이벤트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상가에 가면 할인을 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 번 한복을 입고 즐겨봤던 사람들은 다음 행사에는 자진해서 한복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한복데이’는 일회성 이벤트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합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담은 다양한 행사들을 통해 도시를 변화시키는 일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대학가를 홍대처럼

박세상 대표의 도시문화기획은 전주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대학교 3학년 때 ‘아이엠궁’이라는 회사를 창업한 경험이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프로젝트였다.

“이런 일들은 제가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불평불만에서 시작됐어요.
지방에서 자라 지방학교를 다니면서 잠깐씩 놀러갔던 서울은 내가 사는 곳과 너무나도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다양한 것들이 넘쳐나는 서울에 비해 내가 사는 곳은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졌죠.
또 그곳에 살고 있는 내가 서울에 살고 있는 또래에 비해 뒤떨어지거나 소외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런 도시적인 것을 한동안 쫓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내가 사는 지역을 내가 원하는 곳으로 한번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가 있는 지역이 유성구 궁동이라서, 그곳 이름을 따 ‘아이엠궁’을 창업했죠. 
그때가 대학교 3학년이었어요.”

창업을 하고 싶다거나 회사의 CEO가 되겠다는 꿈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대학가를 홍대처럼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으로 자취방에서 ‘아이엠궁’을 시작한 그는 당시 창업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그가 2009년에 창업한 ‘아이엠궁’은 상가를 찾아다니며 상점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쿠폰을 만들고, 상권과 떨어져 생활하는 기숙사 학생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버스를 운영하고, 정기적으로 문화공연을 개최했다.

그런데 문화공연을 개최에 대한 상점 대표들의 민원이 쏟아졌다. 
그는 침체되어 있는 상가를 활성화해보겠다는 의도로 문화공연을 개최했던 것인데, 그로 인해 오히려 당일 매출이 떨어졌던 것이다. 
이에 상점 대표들은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직접 상점 대표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600개의 상점이 몰려있는데 장사가 되지 않아 그 중 30~40퍼센트는 이미 부동산에 상점을 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우선 상가부터 살려보자’고 마음먹었다. 
학생 입장에서만 바라보던 대학가를 깊이 살펴보니 그는 상점 대표들의 관점에서 대학 상권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상인과 주민, 학생, 시청 공무원까지도 이 공간에 대해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불편사항부터 해결해 나가는 방식으로 활동을 진행했다.

제 계획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사실 학교에서 배우는 전공 지식보다 상점 대표들이 들려주는 인생 공부가 제게 좀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들다, 아들 학교도 못 보내겠다’는 상점이 한 둘이 아니었어요. 
스파게티를 만드시던 사장님은 중학교밖에 나오시지 않았죠. 
공부는 우리가 더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살기 힘든 상인 한 분 한 분을 누구도 도와주지 못하는 현실, 충남대학교 수석 장학생을 데려다놓고 그분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내놓아 봐라 해도 답을 얻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교에서 공부하다가도 이분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시청도 찾아가 보고, 버스노선도 바꿔 봤지만, 제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박세상 대표가 현장을 돌아다니며 생생한 경험을 하면서 깨달은 또 한 가지가 있었다. 
현장에서 해결 못하는 어려운 문제들을 교수님께 여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생이기에 교수님에게 어려운 점,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조언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학교 밖에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학교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대학생 신분으로 창업을 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세 명에서 열 명, 열여섯 명이 되는 동안 그는 개인적으로는 불안감이 없었지만 동료들은 불안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출발은 비영리단체였지만 그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은 영리단체인 회사였기 때문이다. 
열여섯 명의 팀원 중에는 돈을 벌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 사회경험의 스펙을 만들고 싶은 사람, 토익학원 끝나는 길에 잠시 들러 가볍게 일하는 사람 등 그들의 최종 목표는 다 달랐다.

그가 ‘아이엠궁’을 회사로 전환하기로 결심하면서, 열여섯 명 중 세 명을 정식 직원으로 뽑고 나머지는 서포터즈로 구성하는 등 역할을 정한 뒤 회사 조직을 구성하고 주식회사로 전환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시청에서 다시 사회적기업으로 바꾸자는 제안을 해왔다. 
사회적기업으로 바꾸자 그는 매달 열 명의 직원들을 챙겨줘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현장에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해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열 명의 월급을 어떻게 만들어서 줘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어요. 
밤늦도록 자리를 뜨지 못하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죠. 
취약계층에 있는 분들이 입사했을 때는 그분들을 돌보고 교육시키는 것으로 제 역할이 바뀌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창업할 때는 잘 몰랐던 회사 유지와 경영에 대해 제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죠. 
마침내 3년째 되던 해 부도가 나서 빚더미에 앉은 상태로 졸업장을 받았죠.”

지금 생각하면 빨리 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 그에게는 피 눈물 나는 경험이었다. 
그는 몇 달 동안 빚을 갚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의 활동이 여기저기에 소문이 났던지, 대기업에서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선뜻 대기업에 입사할 법도 한데, 그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 전주 한옥마을에서 다시 지역 문화 살리기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다시 시작하다

박세상 대표는 전주에 내려와 1년 동안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인사 열심히 하기,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의 무거운 짐 대신 들어드리기. 이 두 가지만 잘해도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낯선 사람에게 인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
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면 처음에는 많이 놀라시다가, 두 번째는 덜 놀라시고, 세 번째는 ‘누구였더라’ 하시고, 네 번째는 ‘아, 어제 인사했던 애구나’ 하시며 하나의 존재로 인식해 주시기 시작했어요. 
무거운 짐을 들어드리다 보면 같이 식사할 기회가 생기는데, 그때 할머니들이 한옥마을에 들어오신 이야기, 시집오셨을 때부터 있었던 이야기들을 듣기도 했어요.”

그는 한옥마을이 단순히 800채의 한옥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한옥 안에 살고 있는 3,000명의 커뮤니티 공간이라는 사실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그는 전주 한옥마을이 지역 명소로 자리 잡으면서 점점 속 빈 강정이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되었다. 
그는 전주가 콘텐츠는 없이 그저 사진 찍기 좋고 동네,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는 동네로 상업화 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는 한옥마을의 가치를 제대로 지켜내면서 주민들의 삶도 윤택하게 할 수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주민들과 계속 소통하면서 조사하고 연구했다. 
집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한 지도를 만들고 서울이나 대전에 있는 사회적기업과 연계해 공정여행상품을 만들었다. 
또 관광객들이 한옥마을에 왔을 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는 취지로 여름 내내 ‘내일로(한국철도공사 자유여행 티켓)’ 여행객들을 30명씩 모아 네트워크 파티를 진행하기도 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야 한다

박세상 대표는 중학교 때 장래희망을 ‘사업가’라고 적었다. 
어린 시절 살던 집은 앞 쪽이 가게고 뒤쪽에 방이 있어서, 부모님이 자리를 비우면 그는 대신 전선이나 전구 같은 것을 팔며 초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는 그렇게 어릴 때부터 영세한 소상공인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은 그에게 공부하라는 소리를 한 적이 없고 회초리도 들지 않으셨다. 
그러다 보니 그에게는 어릴 때부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반면 부모님은 그에게 과한 용돈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가 최소한의 용돈 이외에 장난감이나 컴퓨터를 갖고 싶다고 졸라도 사주시는 법이 없었다. 
그는 할 수 없이 동생들을 데리고 동네를 돌면서 박스와 전자석 같은 고물을 주워 고물상에서 돈으로 바꾼 뒤 갖고 싶은 것을 샀다. 
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생기거나 갖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는 그것을 얻기 위해 무언가 해야만 했다.

“당시에는 부모님의 그런 무관심에 불만이 많았어요. 
왜 공부하란 소리를 안 하지? 
친구들은 성적표가 집에 도착할 때쯤 되면 집으로 빨리 달려가 성적표를 숨기느라 난리인데, 제 부모님은 일등을 해도 기뻐하시지 않고 꼴등을 해도 때리시지 않고……. 
그런 것들이 불만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것들이 뭔가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온전하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는 저만의 강점을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고등학교 때 부모님한테 반항하려고 하루 이틀 집에 들어가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가 외박한 줄도 모른 채 집에 들어온 아들을 보고 그저 ‘왔냐’고만 하셨다. 
그때 그는 집을 나가면 고생이고 집이 제일 편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만약 부모님이 찾고 다니셨다면 더 뛰쳐나가고 싶었을 텐데 배고프고 힘들어서 제 발로 돌아와 보니 두 번 다시 집 나갈 생각이 안 들었다.

그는 수학과 과학을 잘해서 1등급을 받았다. 
그는 그 성적으로 4년 장학생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외우지 않고 원리만 알면 풀 수 있는 수학과 과학이 좋았던 그는 좋아하는 것만 하는 학생이었다.

그의 대학 전공은 선박해양공학과로 배를 만드는 학과였다. 
당시 조선(造船)이 뜨고 있기도 했고 점수에 맞춰 선택한 전공이기도 했다. 
더 솔직한 마음은 전주를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그는 전공과목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4년 장학생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성적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교외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학년 때는 그의 활발한 성격을 알아 본 선배의 추천으로 과대표를 했고, 2학년 때는 헬스의 매력에 빠져 1년 동안 열심히 운동하여 아마추어대회에 나가기도 했다. 
헬스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들어갔던 그는 헬스라는 것이 자기 몸만 가꾸는 것이 아니라 남의 몸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트레이너가 되려고 1년 동안 지독하게 몰입한 결과 트레이너 자격증을 땄다.

그러면서 충남대 홍보대사도 맡았는데 그것이 ‘아이엠궁’의 첫 단추가 되었다. 
학교를 대외적으로 알리려면 자신이 현재 있는 곳이 어떤 상황이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학교 3학년이 되던 2009년 ‘아이엠궁’을 창업했던 것이다.

창업의 장단점

박세상 대표가 어떤 일을 하든 주위의 반대는 항상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학교생활보다 일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았다. 
조금은 외롭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주변의 시선과 부모님의 반대를 극복하는 그만의 방법을 터득해갔다.

그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이 안 되는지 물어보고 실제로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해서 보여주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기획한 축제에 부모님을 초대하거나 상장을 받는 행사에 부모님께 부탁해서 대신 상을 받게 한다든지 하면서 자식이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지만,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방법이었다. 
번째는 내가 하는 일이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내일을 웃게 만들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부모님도 안심하고 응원해주신다. 
주변의 우려의 목소리도 이러한 방법으로 해쳐나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창업의 어려운 점으로 자금 문제를 많이 들지만, 그가 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했던 일이었기에 돈이 꼭 필요하진 않았다. 
다만 당시 느꼈던 한계는 대학생 신분으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버스노선을 변경하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다닐 때,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에 그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런 경험들을 두 번 세 번 겪으면서, 부모님께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아무리 해도 부모님이 사주시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체념하고 박스를 주웠던 어린 시절처럼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자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그때부터 시청과 대학에 부탁하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다. 
그러자 방법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고, 주변 기업과 지자체의 후원 없이도 운영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 수 있었다. 
도움을 받으려고 시도했을 때보다 오히려 건강한 모델이었다.

창업을 해서 좋은 점은 첫 번째, 하고 싶은 일과 해야만 하는 일을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를 얼핏 시간이 많다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박세상 대표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바쁠 때는 엄청난 무게를 떠안고 자리에 앉아 일을 해야 했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밤늦게까지 일을 해도 지치지 않는 원동력이 스스로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내게 남아 있는 10년

박세상 대표는 여행을 통해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 
책으로 경험하는 것보다 직접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에 출장을 가서도 틈나는대로 주변을 둘러보려고 한다.

“자기개발은 내가 어떤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쌓고 싶은지 정립한 다음에 그것을 위한 계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싸이가 노래를 불렀던 타임스퀘어에서 ‘한복데이’를 해보려고 한 달 동안 혼자 배낭을 메고 뉴욕에 갔어요. 
물론 실패했죠. 
문을 열어주지 않는 뉴욕한인회, 한국문화원에 한 달 내내 전화를 했고 어쩔 수 없이 이메일을 통해 뜻을 전달해야 했어요. 
길거리 버스킹을 하며 제가 한복 입고 등장해 같이 춤추면서 한국인 유학생,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어요. 
다음 기회를 위해 함께 움직일 지지자들을 만들어 놓은 셈입니다. 
뉴욕은 한복 이외에도 기획할 것이 너무 많았어요.”

그는 마흔 살부터가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아직 10년이나 남은 셈이다. 
어린 나이에 열 명의 직원을 책임지며 대표라는 이름으로 회사에 묶이는 바람에 그는 인생에서 느끼고 경험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배워야 할 것, 쌓아야 할 것이 많은데 자리를 지키기 위해 손을 놓지 못하고 있을 때가 더 배고프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마흔 살까지 함께할 동료들을 만드는 일에 집중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거침없이 배울 거예요.”

그는 불혹의 나이가 되면 진짜 창업자, 도시기획자로서 인생을 펼칠 것이라고 한다. 
그곳이 어떤 곳이든, 아프리카든 남극이든 뉴욕 맨해튼이든 그 도시를 지구에서 가장 특색 있는 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그전에,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조금이라도 적을 때 전 세계를 밟아보고 그 일을 하기 위해 갖춰야 할 일들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문화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박세상 대표는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가 놀이공원처럼 재미있는 곳이라고 생각해 보라고 조언했다. 
보이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들여다보고, 귀를 기울여 보고, 뭔가 발견하려고 하면 재밌는 것들이 보인다는 말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꾸고 좋은 것들이 있다면 실행하는 도전정신이 필요한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이라고 그는 말했다.

“대한민국의 중심은 누군가에게는 서울이겠지만, 적어도 저는 전주가 전 세계에서 가장 한국적인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이곳이 재미있습니다. 
세상의 중심에 서있다고 착각하며 살아보세요. 
세상의 중심에 서있으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161&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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