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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분야

(애니메이션) 벼랑 끝까지 가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뚝심

아이코닉스
이우진 아이코닉스 팀장

<뽀롱뽀롱 뽀로로>(2003), <빼꼼>(2005), <변신자동차 또봇>(2010), <구름빵>(2010), <라바>(2011) 등 한국 창작 애니메이션의 연이은 성공은 국내 애니메이션 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 제작 환경은 아직 다른 선진국에 비해 열악하다. 
숱한 고생과 희생을 지불하며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의 자리에 서게 된 이우진 팀장. 
그를 만나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가 어떤 직업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는 건축가다?

“만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혼자서 만들 수 없어요. 
조직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시스템을 조직하고 관리하는 일,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하고 사업으로 이끌어가는 일 등 구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입니다.”

이우진 팀장은 「뽀로로」로 유명해진 아이코닉스의 콘텐츠개발팀 팀장이면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이다. 
최근 서울시에서 버스를 실제로 운영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한 <꼬마버스 타요>와 일본 회사와 합작해서 만든 <태극천자문>, 그 외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KBS에서 만들었던 <트라이킹덤>의 기획 및 전반적인 프로젝트를 맡았다. 
그는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를 ‘부동산개발업자’에 비유했다.

“땅을 가진 지주와 건축설계를 잘하는 설계사, 시공을 잘하는 건설사가 있어요. 
이 셋을 잘 설득하고 연결해서 건물을 짓는 부동산개발업자와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는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지주에 해당하는 투자자를 만나 사업의 가능성을 설득하고, 설계사가 설계도면을 그리듯이 기획사에서 소재를 발굴하고, 스토리와 캐릭터의 방향을 정합니다. 
시에 제작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 소요 기간 등 예산을 기획하죠. 
기획자가 아이디어를 내면 시나리오 작가와 캐릭터, 배경 디자이너가 함께 참여해 스토리와 콘티를 완성해갑니다. 
그렇게 설계도면이 완성되면 시공사에 해당하는 제작자를 선정해 하나의 건물을 만들 듯 애니메이션을 만듭니다. 
그렇게 제작한 영상에 배경음악과 캐릭터의 음성을 넣는 후반작업까지 마치면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완성됩니다. 
이렇게 세 집단을 잘 설득하고 연결해 작품을 완성하는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죠.”

이렇게 제작된 <꼬마버스 타요>는 2008년에 처음 기획되어 첫 방송이 나가기까지 2년이 걸렸다. 
이 과정에 참여한 수십 명의 의견을 조율하는 것 역시 애니메이션 프로듀서의 역할이므로 소통 능력은 프로듀서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능력이다.

영상학부를 부전공으로 다시 시작된 꿈

이우진 팀장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로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의 책에 대한 관심은 어느 순간부터 만화책으로 바뀌었고 매일 애니메이션, 게임 등을 하느라 그는 컴퓨터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다. 
새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학교에 가면 잠을 자기가 일쑤였다. 
읽고 싶다는 책을 다 사주면서 응원하시던 부모님이었지만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만화책만 읽자 만화책 금지령을 내리셨다. 
급기야 그가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유명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겠다고 선언을 하자, 부모님은 아들 설득 작전에 들어갔다. 
결국 그는 팀장은 ‘대학에 가면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대로 하겠다’는 조건 아래 러시아어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점수에 맞춰서 가기도 했지만 제가 어학을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일어를 할 줄 알면 일본만화를 읽을 수 있고 영어를 할 줄 알면 AFKN에서 하는 만화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아했던 거였어요. 
이제와 생각해 보니 실제로 제 관심은 어학보다는 새롭고 재밌는 콘텐츠에 있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의 기대와 사회적 가치에 타협해 대학에 들어갔던 그는 군대에 가기 전까지 전공 수업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겉돌았다. 
미가 없는 과목들은 모두 F학점을 받으면서도 학과실 연락 공책에는 매일 만화를 그렸고, 군대에 가서도 근무장에 만화를 그려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그는 제대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역시 나는 만화를 다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공모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침 새로 생긴 영상학부를 복수전공으로 선택하면서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꿈이었기에 전공자들을 제치고 그가 만든 졸업 작품이 유명한 해외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복학한 첫 학기에 장학금을 탔고 계절 학기를 듣는 것도 모자라 초과 학기까지 들으면서, 집에 가는 시간이 아까워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하면서 만들어낸 졸업 작품이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불안, 전공도 아닐뿐더러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에 항상 부족한 것 같았는데 해외에서 인정을 받자 그는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릴 적 만화책을 원 없이 사주시던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흥미 없는 일이라도 회사에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평범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어려운 일을 하려는지, 과연 잘할 수는 있는지 걱정되었던 거겠죠. 
어린 마음에 내심 아버지께 실망을 했어요. 
그런데 군대 제대하고 잠깐 아버지 회사 일을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아버지 책상 위에 제가 그 당시 웹사이트에 연재하고 있던 그림이 프린트 되어 놓여있더라고요.”

‘60만 원의 사나이’

이우진 팀장이 학교를 졸업하고 뛰어든 애니메이션 현장은 열악했다.
복수전공을 경제학과로 선택한 다른 친구들은 은행이나 증권사, 방송국에 취직했는데 그는 그들의 3분의 1도 안 되는 연봉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나마 수습 3개월 동안은 한 달 월급이 60만원밖에 되지 않았고, 기다리던 넉 달째 월급날에는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회사가 어려워져서 다섯 명이었던 동료들은 이미 회사를 떠났고 그는 혼자 남았다.

“그 당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위해 아내 몰래 신혼집을 담보로 사채를 빌리기도 했어요. 
회사 폐업신고를 하고, 회사가 망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사진을 찍어 행정기관에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큰소리치며 선택한 길이었기에 그는 도저히 거기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더 버티던 그는 준비하던 작품이 방송국의 투자를 받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사람들을 다시 모았다. 
기획하고 직접 시나리오까지 쓰면서 고군분투했지만 다시 경영이 어려워져 50명이던 직원이 뿔뿔이 흩어졌다. 
거기서 멈춰 설 수 없었던 그는 어떻게든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다섯 명을 모아 1년 동안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는 곳에서 먹고 자면서 작품을 계속 만들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해도 작품이 엉망이면 변명할 수가 없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해도 작품 외의 것들은 관객에게 보이지 않아요. 
작품으로 이야기해야 하는데 다 만들고 보니 작품이 엉망이더라고요. 
뭔가 많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죠. 
왜냐하면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프로젝트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투자자는 돈을 낭비했고, 직원들은 월급을 못 받았고, 사장님은 회사가 없어졌고, 방송국은 재미없는 작품 때문에 시청률이 나쁘고, 관객들은 재미없는 작품을 보는 데 시간 낭비했고, 저는 제 인생 3년을 낭비했어요.”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하나 남은 것이 있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애니메이션 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때가 제일 두려웠어요. 
누가 봐도 더 이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계속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아직도 나는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고, 아무리 힘들어도 재밌는 거예요.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도저히 자신을 설득할 수가 없었죠. 
결국 애니메이션을 계속 할 수 없다면 학계에서라도 이쪽 분야에 있고 싶다는 생각에 애니메이션 전공으로 유학 준비를 했어요.”

아이코닉스 입사

이우진 팀장이 유학 준비를 하는 동안 아이코닉스에서 채용 공지가 올라왔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 교수님의 추천으로 면접을 한번 봤던 곳이었다.
상도 받고 해외에도 갔다 온지라 자신감이 넘쳐 있던 당시, 아이코닉스 사장은 그에게서 자만심을 보았다. 
그때 채용되지 못했던 그 회사에 그가 다시 입사지원을 한 것이다. 
업계에서는 그가 몸담았던 회사가 문을 닫았고, 프로젝트는 신통치 않았으며 방송국 담당자는 엄청난 고생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장님은 오히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겸손해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다시 문을 두드리는 끈기를 높이 사 이번에는 기회를 주셨고, 그는 아이코닉스에 입사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니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동안의 실패를 경험삼아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노하우는 더욱 강화해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죠. 
그렇게 <태극천자문>과 <꼬마버스 타요>가 탄생했고, 지금은 다음 작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끈기와 인내심, 그리고 뚝심

이우진 팀장이 말하는 애니메이션 콘텐츠 기획자로의 덕목은 끈기와 인내심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면접을 보러 오는 친구들에게 애니메이션 콘텐츠 기획자의 덕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창의성’, ‘아이디어’라고 대답하죠.
하지만 경력자들은 ‘끈기와 인내심’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콘텐츠 기획은 아이디어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벼랑 끝에 서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뚝심, 이것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완성이 좌우될 때가 많아요.
이 일이 맞다고 생각하고 꼭 하고 싶다면 일단은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는 기획자라면 ‘소양’이라는 마일리지를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양이란 태어나서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 다녔던 여행지, 들었던 이야기, 읽었던 책, 음악, 영화, 사랑, 시련, 공상, 친구 등의 것들을 말한다. 
결국 창작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이고 기획자 역시 전략적 사고를 하기 위해 자신의 소양을 꺼내 사용해야 한다.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두어야 필요할 때 그것을 조금씩 꺼내서 쓸 수 있으니 다양한 경험과 경력이 작가에게는 최고의 자산이다.

그의 졸업작품 역시 대학교 1, 2학년 때 러시아 문학 수업 때 과제로 냈던 이야기였다. 
<태극천자문>도 <꼬마버스 타요>도 어렸을 때 좋아했던 작품, 만화영화, 액션물 등이 모티브가 되었고 자신이 그려왔던 만화와 써왔던 글이 리소스(자원)이 되었다.

지금 방황하는 것은 당연한 일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40대가 되어서 알게 되는 사람도 있고 평생 모른채 사는 사람도 있죠. 
30대에 5~6년 넘게 좋은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 중 자기가 왜 그 일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죠. 
그런 사람과 자기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이 똑같은 일을 할 때 성과 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출발이 늦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사람은 앞선 사람을 금방 따라잡게 되어 있어요.”

십대 중반에 벌써 자기가 좋아하는 직업을 찾았다면 굉장히 운이 좋은 것이다. 
그 나이에는 대부분 자신의 길을 몰라 방황한다. 
이우진 팀장은 방황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한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꿈이 명확했던 자신도 중간에 흔들려서 방황했고, 군대를 다녀온 다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붙잡았다. 
그러니 십대의 방황을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제의 꿈과 오늘의 꿈이 달라도, 남들이 앞서가더라도, 그런 혼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소양을 쌓는 일에 충실하기를 권합니다.
또 제 경험에 비추어볼 때 가까이 있는 친구 중에 취미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많이 만들어 서로 교류를 하면 사회에 나가서도 도움이 많이될 거예요.”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267&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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