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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분야

(대안학교) 타고난 개그 감각으로 사람들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전하다.


김 진 개그맨

2005년 개그맨 시험에 합격한 김진씨는 그 해 나이 스물 하나였다. 
개그우먼 신봉선과 함께 공채 20기에 당당하게 합격한 그는 KBS 역사상 가장 나이가 어린 개그맨이었다. 
그가 개그맨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3년 전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축제날 MC로 맹활약한 후부터였다.

틱 장애로 인해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맞서 스스로를 ‘못된 아이’로 만들어가다가 스스로 선택한 대안학교라는 길에서 참스승을 만난 후 개그맨이 되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활기찬 그의 성격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자유롭게 생활하는 간디학교에 다니고 싶었어요

중학교 시절 김진씨는 조금 독특한 아이로 통했다. 
미술을 좋아하던 그가 아버지의 반대로 더 이상 미술에 꿈을 둘 수 없게 되고, 또 그 무렵 ‘틱 장애’가 찾아오면서 그는 스스로를 ‘못된 아이’로 만들어야 했다. 
지와는 상관없이 얼굴 근육이 움직이고 눈이 깜빡여지는 ‘틱 장애’ 증상으로 인해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향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당시 그는 그런 사람들의 무신경한 말과 태도에 화를 내거나, 주먹으로 맞서며 스스로를 지켜나 갈 수밖에 없었다.

“강남 8학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제게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저를 유학 보내려고 하셨고, 아버지는 유학을 반대하셨죠. 
저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아이는 사고를 겪을 수 있다고요. 
그 때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간디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알게 되었는데, 자유로운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어요.”

그 날 이후 그는 간디학교에 다니겠다고 부모님을 조르기 시작했지만, 쉽게 허락받지는 못 했다. 
대안학교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던 시절, 간디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궁금하셨던 그의 아버지는 교육청에 전화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 학교는 없다’는 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인문계 대안학교가 11개 정도 있었고, 간디학교 같은 학원이 23개인가 있었어요. 
다시 한 번 자세히 알아봐달라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교육부에 계신 친구 분께 간디학교에 대해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는 그 분으로부터 앞으로 대안학교 붐이 일 것이니 아들이 원한다면 보내라는 말씀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릴 대안학교 설명회에 대한 정보를 얻으셨죠.”

대안학교 설명회에 다녀온 그의 부모님은 그의 뜻대로 대안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셨지만, 간디학교가 아닌 화랑고를 추천하셨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 안에 있는 대안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화랑고는 서울에서 가장 먼 경주에 있는 학교였다. 
그는 서울에 자주 올라오지 않아야 동네 친구들과 말썽을 덜 피울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버지가 서울에서 가장 먼 학교를 추천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

저를 믿고 기회를 주신 선생님들께 너무 감사한 마음이었죠

“대안학교 1세대는 천재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한 아이들, 유학을 다녀와 일반학교에 적응하지 못 하는 아이들, 그리고 왕따나 문제아들 이렇게 세 분류로 나눌 수 있어요. 
저는 보통 선생님들 기준으로 문제아 그룹에 속했죠. 
장난도 많이 치고, 애들이랑 치고 박은 적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화랑고 선생님들은 달랐어요. 
저를 그냥 밝고 예쁜 학생으로 대해주셨죠.”

화랑고에 들어간 이후에도 김진씨는 여전히 말썽을 피우는 ‘못난 아이’의 모습을 유지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것은 담임선생님이셨던 황인랑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엇나가려고 하는 그에게 벌을 주시거나 소리를 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쓰레기를 버리면 보통 주우라고 혼을 내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본인이 직접 주우시면서 저한테 ‘진아 내가 치울게. 앞으로는 많이 버리지마.’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러시니까 다음부터는 죄송해서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릴 수가 없어요. 
그렇게 제가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 하셨어요.”

화랑고의 선생님들은 진씨에게 체벌보다는 스스로 깨달을 기회를 주었다. 
시내 애들과 싸워 파출소에 있는 그에게 선생님은 나무라는 대신 상대방 학부모에게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구하기도 하였다. 
막무가내로 반항심을 드러내며 학교생활을 하던 그는 그런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학교에는 김진씨가 지금의 꿈을 찾고 키워나갈 수 있게 하신 분도 있었다. 
바로 서종호 교장선생님이다.

“저는 사람을 웃기는 능력을 타고 난 사람이니까 개그맨이 되거나 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평소 선생님은 제게 꿈이 뭐냐고 묻지 않으셨지만 제가 연예인을 꿈꾼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하루는 저에게 ‘진아 연예인이 되어 우리 학교를 빛내주면 안 되겠니? 선생님이 보기에 네가 너무 잘 할 것 같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뭐든지 도와주시겠다면서요.”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아버지는 연예인이라는 꿈을 응원해주시는 선생님에게 항의를 하셨다. 
선생님은 오히려 그와 평소에 대화를 나누는 일이 없는 아버지를 나무라시며 보란 듯이 그에게 축제 MC를 맡기셨다. 
축제 MC는 레크리에이션과를 다니고 있던 졸업생이 할 예정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졸업을 앞둔 3학년 학생이 맡아야 했지만 당시 2학년이었던 그에게 그 영광스러운 기회가 주어지자 학생들은 몹시 언짢아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MC를 맡기 위해 축제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졸업생에게 정중히 사과하시고는 저에게 기회를 주셨어요. 
제가 사회자를 맡는 것에 불만이 있는 학생들도 전부 설득해주셨고요. 
제가 개그 능력을 부모님께 보여드릴 기회를 주시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셨던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축제를 보러 오신 분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야말로 대박이 났었다니까요. 
모두가 뒤집어졌죠.”

텔레비전에 나오면 졸업하기로 교장 선생님과 약속했어요

축제를 계기로 개그맨의 자질을 인정받은 김진씨는 그 때부터 개그맨의 꿈을 키워갔다. 
3학년이 된 그에게 교장 선생님은 1학기만 다니고 여름방학부터는 출석을 대체해줄테니 연기학원에 다니라며 그를 응원해주셨다. 
연기학원을 다니며 오히려 흥미를 잃게 된 그는 학원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기 위해 무언가 해야만 했던 그는 고민 끝에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텔레비전에 나오면 졸업을 시켜달라고 이야기했죠. 
그랬더니 인터뷰나 뉴스에 나오는 것 빼고 방송에 출연한다면 졸업장을 주시겠다고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요. 
제 이름으로 방송에 출연해서 학교의 자랑거리가 되면 졸업을 시켜준다는 내용의 각서를 썼죠.”

막상 약속을 했지만 그는 방송에 출연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래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그 때 운명처럼 그에게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에서 신인 코미디 연기자를 찾는다는 이메일이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사람에게도 전부 도착한 광고 메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곧바로 접수했다.

“저는 당연히 뽑힐 줄 알았어요. 
그저 사람을 웃기면 뽑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생각을 했던 거죠. 
시험장에서 다른 개그맨 지망생들을 보고 바로 알았어요. 
저는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요. 
저는 달랑 수건이랑 사이다 두 개 들고 갔는데 어떤 사람은 삐에로 전신분장하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리어카에다가 쓰레기만 한 가득 싣고 왔고…, 염소를 데리고 온 사람도 있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때 뽑힌 사람들이 김신영, 김태현, 윤택, 김형인이에요.”

그는 개그맨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도전에서 비록 실패했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 때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그의 중학교 선배와 친구였던 개그맨 홍동명이었다. 
홍동명 씨는 그에게 함께 팀을 이루자고 제안했다.

“홍동명 형이랑 KBS코리아 채널의 <한반도 유머총집합>이라는 프로그램에 오디션을 보러 갔어요. 
대본을 만들어서 윗사람한테 올려서 통과되어야만 방송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배웠죠. 
그러는 사이 4개월이 지나 고3 9월이 되었어요. 
두 달 안에 방송에 출연하지 못하면 졸업을 못 하는 상황이었죠. 
불쌍해서라도 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1분짜리 코너를 만들었어요. 
‘번데기쇼’라고 쫄쫄이 입고 나와 하는 개그였는데 운 좋게도 반응이 좋았어요.”

10월 방송이 나가기까지 그는 학교에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오신 햄버거를 나눠먹는 시간인 것처럼 속이고 전교생을 모은 그는 자신이 나오는 방송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방송 촬영 후 PD님에게 부탁한대로 그가 등장하는 모습에 ‘경주 화랑고등학교 재학중’이라는 자막이 떴다. 
인기리에 첫 방송 시사회를 마친 그는 약속한 졸업장과 함께 표창장을 받으며 화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지금의 일에 만족하지만
방송에서도 더 많이 찾아뵙고 싶어요

김진씨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백제예술대학교, 한국영상대학교, 동아방송예술대학교, 예원예술대학교 등 7개의 학교에서 연락을 받았다. 
아홉의 나이로 개그맨 시험을 봤던 그를 졸업시켜 홍보효과를 누리고 싶었던 여러 대학에서는 그를 장학생으로 졸업시켜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는 <한반도 유머총집합>에 출연하며 인연을 맺게 된 PD님의 제안으로 그분이 교수님으로 계신 인덕대학교 방송연예과에 들어갔다.

“선배가 있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텐데 제가 그 대학의 1기로 들어갔어요. 
등록금도 17만원만 내고 졸업했죠. 
지금 3년제인데 당시 2년제였던 인덕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술종합학교에서 또 장학생 제안을 받고 다녔어요. 
그렇게 두 개의 대학을 나왔어요. 
등록금도 거의 내지 않고서요.”

대학교 2학년, 스물한 살의 나이로 156대 1의 경쟁을 뚫고 KBS 역사상 최연소 공채 개그맨이 된 그는 사회 경험이 없었던 탓에 방송에서 살아남는 법을 미처 알지 못했다. 
군대에 다녀오니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그는 방송활동은 왕성하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행사전문 MC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방송에서 1년은 10년과도 같아요. 
하루하루가 전쟁터처럼 복잡하고 많은 일이 벌어지는 나날이죠. 
그렇기 때문에 2년 동안 방송을 쉬면 그냥 새로운 사람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죠. 
지금 <폭소클럽>이나 일요일 아침에 하던 복권 당첨 프로그램인 <쇼 행운열차> 이런 예능프로그램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요. 
저 같은 개그맨들이 갈 데가 없어지고 있죠. 
그래서 저는 행사 MC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가 지금 하는 일은 워크숍, 입소식, 환영의 밤 등의 행사에서 레크레이션과 진행자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얼마 전에는 남양주시 공무원 400명을 대상으로 금학산 관광농원에서 진행한 워크숍에 다녀왔다. 
근엔 청소년들을 위한 강연가로써도 활동을 시작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의 상담코칭심리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유도 강연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어요. 
매주 방송에 출연하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들과 비교하면 수입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하는 회사원들에 비하면 또 적은 수입은 아니에요. 
돈벌이 뿐만 아니라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도 저는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미 꿈도 이루었고요. 
그렇지만 방송을 포기한건 아니에요. 
재기해야죠. 
더 많은 분들을 만나 뵙고 웃음을 드리고 싶거든요. 
계속 노력할거에요.”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반항심 넘치던 그가 긍정적인 사람이 된 것은 대안학교 화랑고등학교의 생활의 영향이었다. 
그는 화랑고에서 생활하며 가장 감사하고 기억에 남는 일로 소록도 봉사활동을 꼽았다.

“14박 15일, 2주일 정도 전교생이 다 함께 소록도에 봉사활동을 갔었어요. 
소록도는 나병 환자들이 사는 섬이라서 그곳의 사람들은 손가락이 없기도 하고 눈이나 코가 없기도 해요. 
그래서 처음에 사람들이 소록도에 들어가면 울면서 도망을 가요. 
함께 벌초도 하고 돼지우리도 치우면서 그렇게 2주 정도의 시간을 보냈는데, 손가락이 없는 분이 고맙다며 힘겹게 박카스를 따주시는 거예요. 
눈물이 났어요. 
감사의 마음을 배우게 되었죠. 
살면서 그런 경험을 할 기회가 좀처럼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도 소록도에 봉사활동을 다녀요.”

지망생이라는 이름 뒤에 숨으려하지 마세요

“꿈은 가지되 현실을 잘 파악해야 하죠. 
제가 연예인 하고 싶다는 친구들한테 노래를 해보라고 하면 100명 중에 99명은 ‘마이크도 없이요?’, ‘음악도 없이요?’, ‘준비한 것도 없는데’라는 말을 해요. 
이런 친구들은 연예인이 될 수 없어요.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준비도 안 하고 있으면서 연예인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는 영원히 ‘지망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지망생’이라는 이름에 숨어서는 안 돼요.”

김진씨는 방송연예과, 연극영화과, 영상영화과 등 다양한 연예계와 학과 졸업생이 해마다 만 명씩 졸업하는 상황에서 꿈만 꾸는 지망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가수의 경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0위안에 들어야 겨우 데뷔가 가능하고, 그렇게 신인이 된 가수들 중에서도 인기를 끌며 꾸준히 방송에 출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은 외면한 채 최소한 오디션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연예인을 꿈꾼다고 하는 친구들을 그는 걱정했다.

“기획사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명함주면서 연예인이 될 수 있다고 하면 꿈을 꾸면서도 자기 합리화만 시키는 친구들이 있어요. 
데뷔하는 친구들은 운이 좋은 것이고 자신은 운이 없어서라고 말하는데 실력이 있다면 벌써 데뷔하고 활동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인기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굉장히 커요. 
돈도 사람도 인기에 따라 있었다가 사라지죠.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면 다른 길을 찾는 편이 나을 거예요.”

그는 자신이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마이크만 있으면 2~3시간 사람들을 웃고 떠들게 만드는 재능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은 그만큼 많은 준비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직업인 것이다.

앞으로의 목표는 예술대안학교와 틱 장애협회를 만드는 것이에요

개그맨의 꿈을 이룬 그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또 다른 꿈은 연기, 노래, 무용 등 예체능 중심의 예술대안학교를 만드는 것과 틱 장애 협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틱 장애인들을 위한 제도가 없어요. 
특히나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한 고용법이 있는 것에 반해 틱 장애인은 일할 기회를 얻기조차 힘들죠. 
틱 장애인 중에는 의지와는 상관없이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게 되는 사람도 있거든요.”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른 고통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목을 자꾸 움직이게 되는 그는 목 근육의 노화가 일찍 찾아와 앉아있기조차 힘들 때가 있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틱 장애의 고충은 알지 못한채 마치 잘못된 습관쯤으로 알고 개인의 의지 문제로 여기는 사람들로 인해 틱 장애인들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틱 장애인 협회를 만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157&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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