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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분야

(미술)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역사로 남는다


김달진 김달진미술연구소 소장

1999년 ‘한국 신지식인’에 선정되고 2013년에는 자신의 취미를 직업으로 만든 인물로 중학교 도덕교과서(금성출판사)에 소개되기도 한 김달진 소장.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에는 김달진 소장이 중학교 때부터 40여 년간 수집해온 수많은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그 당시 수집하지 않았으면 천만금을 주어도 구할 수 없었을 귀중한 역사 자료들이 김달진 소장 개인의 노력으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큰 감동이다.

헌책방과 전시장을 다니며 수집

충북의 한 농촌 마을에서 5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 김달진 소장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모으고 정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우표나 상표, 담뱃갑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컬러 화보가 흔치 않았던 시절 여성잡지에 나왔던 세계적인 명화나 화보 등을 뜯어모으기 시작했다. 
미술에 대한 관심보다 수집 자체에 대한 열의가 컸던 그가 만들어온 스크랩북의 일부가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에 남아있다.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해서 우등상을 받았고, 중학교 때도 입학성적 순으로 뽑는 반장을 하기도 한 총명한 학생이었던 그에게 주위 어른들은 ‘법관’이 되라고 했다. 
형들도 공무원이나 회사원을 하고 있었기에 법관이 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그저 모으고 수집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나마 생각해서 정했던 장래 직업은 ‘교사’였다.

형들의 도움으로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 그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청계천 7, 8, 9가에 있는 헌책방을 다니면서 화보를 사서 수집하고, 인사동이나 전시장에 가서 도록이나 팸플릿 등을 수집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생이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달진 소장의 첫 직장은 「월산 전시계」라는 미술잡지사였다. 
그는 사관 겸 편집기자로 일을 하며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80년대 ‘언론통폐합’이 되면서 잡지의 발행이 취소되고 회사는 공중분해 되면서 새로운 직장으로 옮길 수밖에 없게 된 그는 1981년 당시 덕수궁에 있던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가 일당을 받는 일용직부터 일을 시작했다.
자료실 수집을 담당하던 그는 미술관이 과천으로 옮겨지면서 별정 7급이라는 정식 직급을 받아 3년간 근무하기도 했지만, 계약직이었던 터라 다시 기능직 10등급으로 강등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가나화랑(현 가나아트센터)으로 직장을 옮겨 2001년 11월까지 5년 10개월 동안 자료실장으로 일했다. 
정규 교육이 아니라 책을 통해 독학을 했던지라 지식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 고졸이라는 학력 때문에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것이 내내 안타까웠던 그는 서른네 살의 나이로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모 대학교 한국 사서교육원에서 사서교육을 수료하고 ‘준 사서’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학업에 대한 갈증을 채워주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학력고사를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개방대학을 선택했지만 영어와 미술 실기는 반드시 해야 했기에 낙방을 거듭하여 3년 만에 금속공예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때 서양미술사와 기본적인 미술이론을 배웠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재직하고 있을 때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자료 실태연구와 개선 방향’에 대한 주제로 논문을 썼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교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금요일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금요일만 되면 숄더백을 메고 신문회관, 인사동, 사간동 등 화랑가를 돌며 자료를 모았다. 
그것이 원인이었을까. 2011년, 20년 동안 돌덩이처럼 무거운 가방에 짓눌린 어깨에 문제가 생겨 큰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은 젊은이들이 메고 다니는 ‘백팩’으로 바꾸어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고 한다.

2등별, 3등별이 잊혀지지 않도록

마지막 직장이었던 가나아트센터에서 나온 김달진 소장은 2001년 말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김달진 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이듬해 「서울아트가이드」라는 잡지도 창간했다. 
‘김달진 미술연구소’는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역사자료를 남기는 아카이브(특정 장르에 속하는 정보를 모아둔 정보 창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아트가이드」와 정보포털 ‘달진 닷컴’을 통해 미술 정보를 제공하는 일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는 수집한 미술 자료를 2008년에 설립한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에 전시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틈틈이 서적을 출간해 현대미술을 주제별로 정리하는 일도 함께 하고 있다.

“2010년 『대한민국 미술인 인명록』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그 책은 제가 「월간 전시계」에서 근무할 당시부터 꼭 만들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미술작가들을 기억할 때 유명한 사람, 시장에서 작품이 많이 거래된 사람으로 ‘이중섭, 박수근,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등만 기억하는데 사실은 동시대에 수많은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거든요. 
밤하늘에서 1등별이 가장 빛나 보일 수 있는 것은 2등별, 3등별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당시에는 활동이 미비했던 사람들이라도 그들의 자료가 잊혀지지 않도록 모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1850년대 조선시대 초상화로 유명한 최영신 이후의 작가들에 대한 책을 만들었어요.”

재야작가와 월북작가, 재외작가 등 잊혀졌던 작가들까지 폭넓게 수록한 이 책은 미술계, 언론계에서 많은 호평을 받았다. 
몇 십 년간의 카드수집 작업과 끈질긴 조사를 통해 만든 결과물이었던 만큼 김달진 소장 개인에게도 보람 있는 프로젝트였다. 
빛나는 별이 아니었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왔던 그에게도 멘토가 있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뀌고 직업관이 바뀌죠. 
가 미술 자료 수집에 관심이 많다 보니 열심히 모은 그 자료를 들고 고등학교 때 찾아가 인사드린 분이 있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 평론가시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셨던 이경성 선생님이시죠. 
어린 학생이었지만 자료 수집에 대한 저의 열정을 인정해주셨어요. 
나중에 그분이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재직하실 때 추천서를 써주셔서 제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할 수 있었죠. 
1995년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출간할 때도 추천사를 써주셨어요. 
저의 멘토이자 인생의 롤모델이 되어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아카이브와 아키비스트

우리나라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미술계에서 가장 유망한 직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현재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법적 등록을 하려면 큐레이터를 한 명 이상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수요에 따라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아키비스트(보존 기록인 아카이브를 관리하는 전문가)라는 직업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다. 
아키비스트는 ‘기록 관리자’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란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증거물이나 문서에 의해 증명하면서 보존하는 것이다.

‘아카이브’란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보존 가치가 있는 기록물과 물질(말하자면 작가가 썼던 편지, 일기, 사용했던 화구 등) 그 자체가 아카이브이기고 하고, 이런 아카이브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 혹은 건물 자체를 일컫기도 한다. 
우리 미술계에서도 아카이브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여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2013년 11월에 동숭동 예술가의 집에서 ‘한국 아트 아카이브협회’를 창립했고 김달진 소장이 회장을 맡고 있다.

아키비스트를 직업으로 삼기 위해서 예전에는 도서관학과를 나와야 했다. 
요즘에는 도서관학과가 문헌정보학과로 바뀌었는데, 최근에는 기록관리학과라는 별도의 학과도 생기고 ‘과학기록 정보대학원’이라는 특수대학원도 생겨 아카이브에 대해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

“기록과 미술, 이 둘을 다 전공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기록과 문서의 관리만을 공부해서는 미술에 대한 특성, 장르, 개념에 대해 파악하기가 어려워요. 
예를 들어, 학부에서는 기록관리학과를, 대학원에서는 미술사학과나 예술학과를 나오면 양쪽의 특성을 모두 이해할 수 있으니 미술 자료를 분류하고 기록해서 남겨주는 일을 할 수 있죠.”

김달진 소장은 앞으로 예술 관련뿐만 아니라 모든 관공서에서 기록관리자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업을 할 때도 초안부터 진행 과정, 전개와 결과 등을 문서로 남기면 이것이 기관의 역사, 나아가 한국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법적으로 규모가 일정 이상이 되는 곳에는 기록 관리자, 즉 아비키스트를 두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는 게 김달진 소장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기관에서도 전문 인력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수요가 늘고, 점진적으로 전문 인력의 일자리로 이어질 것이라는게 그의 전망이다.

평생 모은 자료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

현재 김달진 소장은 「서울아트가이드」라는 잡지에서 발생하는 수익금으로 직원들 월급을 챙기고, 미술자료박물관과 한국미술정보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처음에는 광고비를 받아 제작하여 무료로 배포하는 무가지여서 전혀 수익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 몇 년간 고생을 하며 콘텐츠를 풍부하게 싣고 외국 몇몇 국가에 통신원을 두어 외국 전시 소식을 알리면서 국내 미술계의 새로운 소식들을 소개하며 자리를 잡아 수익이 발생하는 현재에 이르렀다.

하지만 올해 연구소 건물의 국가 지원(예술전용공간 임차지원사업)이 끝나서 40여 년간 모아온 미술 관련 자료 2만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18톤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었다.

“이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디지털화 하는 작업은 국가에서 예산을 들여 진행해야지, 개인이나 연구소가 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미술에 대한 역사를 보전하는 일이니 국가 차원에서 진행했으면 합니다.”

좋아하는 일에 미쳐서 참을성 있게 차근차근 해나가야

마지막으로 김달진 소장이 학생들에게 세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전공과 관련 없는 직업을 선택해서 힘들어하고 실망감도 느껴서 이직을 합니다. 
첫째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단순히 취향이나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이 되는 일을 하세요. 
둘째는 그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미쳐야 합니다. 
번째는 차근차근 쌓아올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욕심을 내서 급하게 이루려 하지 말고 참을성 있게 기초를 튼튼히 다져야 합니다.”

자신의 꿈이 남들에겐 관심 밖의 일이라고 해도 열심히 매진하다 보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새로운 장르를 만들 수 있으니, 끊임없이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보라는 게 김달진 소장의 당부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227&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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