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 인터뷰

여러 분야의 진로∙직업 전문가와 사회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직업 세계를 확인하고 진로선택 방법을 알아보세요.

커리어패스

스포츠분야

(스포츠) 1등만이 성공은 아니에요


성해연 한국배구연맹 심판

프로 직업 심판은 심판 교육 과정과 캐스터 교육 과정을 거쳐 입문한다. 
대한배구연맹에서 받는 심판 자격증에는 A급 , B급, C급이 있는데 국제심판으로 활동하고 싶다면 A급 과정을 취득해서 5년 이내에 배구국제연맹에 등록하고 활동 보고서를 써야 한다. 
한배구연맹에서 활동한 내용이 있어야 하고 대한배구협회에서 실시하는 테스트도 거쳐서 선발된다.

프로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심판 역시 하나의 전문적인 직업이다. 
배구 분야의 국제심판이며, 프로배구의 심판으로도 활동 중인 성해연 심판을 만나 그녀의 오랜 배구인생에 대해 들어보았다.

연습게임 때 호루라기를 불어보며 심판이 되는 꿈을 꾸다

성해연 심판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오빠가 야구를 해서인지 그녀는 스포츠에 익숙했다. 
부모님은 딸이 힘들고 고달픈 운동으로 진로를 결정하지 않고 교사가 되기를 바라셨지만 그녀는 운동이 좋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를 시작하면서 그녀의 꿈은 최고의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쉬라고 해도 배구코트를 벗어나지 않을 정도로 배구에 열심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초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수업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만 해야 했다. 
친구들처럼 영어도 배우고 수학도 배우고 싶었으나 운동만 해야 하는 생활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녀는 공부할 시기를 놓치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나는 이제 이 길로만 가야 돼’라는 생각으로 비로소 운동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선수생활에 전념하던 그녀는 경기 중에 심판의 모습을 보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연습게임을 할 때 호루라기를 불어보기도 하면서 막연히 ‘미래에 나도 기회가 된다면 심판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너에게는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성해연 심판의 선수생활은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프로배구가 없었기 때문에 실업팀이나 대학, 일반회사로 진로가 나뉘는데
그녀는 삼성팀에 들어갔다가 다시 대학교로 갔다. 
공부를 깊이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배구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노력을 하지 않아서 후회되는 것도 없고요. 
열정을 가지고 만족할 만큼 배구를 했어요. 
하지만 신장에서 오는 한계를 느꼈고 무엇보다 공부에 대한 욕심이 생겼어요.”

선수로 성공한다는 확신이 없었던 그녀는 대학에 가서 학문을 비롯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최근 프로가 생기면서 심판이 직업으로 정착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심판을 직업으로 한다는 개념이 없었고 직업과는 별도로 본인이 좋아서 자진해서, 또는 명예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 심판 분들은 체육전공자들이 많고 대부분 남자예요. 
고분자공학이 전공인 저는 특이한 경우죠. 
우리나라에 여자 국제심판은 저까지 4명이 전부에요.”

전공공부를 하다가 영어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녀가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중학교 다닐 때의 코치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그녀는 유학 준비 기간 동안만이라도 자신이 맡고 있는 선수들을 지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지켜보니 그녀에게 가르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 선생님은 중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초등학교 배구팀을 창단하는 바람에 손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얼떨결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선수 지도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당시 중·고등학교의 전국대회에서 심판을 맡고 계셨던 선생님은 심판 일도 부탁하셨는데, 해보니 그것 역시 그녀에게 너무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시합이 있으면 심판으로 활동했어요.
마침 제 고향 부산에서 아시안게임이 있었는데 심판으로 참가하게 되었죠. 
저는 국내심판이었는데 국제심판이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그때 국제심판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확고해졌죠.”

그렇게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4년에 프로배구가 생기면서 심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망설임 없이 도전을 했고 합격했다. 
그렇게 프로심판에 입문한 성해연 심판은 국내심판으로 활동하다가 2009년에 국제심판 시험을 보고 국제심판이 되었다.

몇 천 명의 관중 앞에서도 담담하게 스탠드에 서야 한다.

심판은 규칙서의 기준을 경기에 적용해야 한다. 
규칙서의 기준이란 국제연맹에서 만들어 각 국에 배포하는 것이라서 국제심판들은 반드시 영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해석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꾸준히 공부를 하고 정기적으로 시험도 본다.

“바뀌는 룰도 많아요. 
현대 스포츠는 상업이에요. 
올림픽도 월드컵도 돈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관중이나 미디어가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해요.
재미없으면 보지 않으니 재미있는 경기를 보여줄 수 있도록 룰을 과감히 바꾸기도 해요. 
룰이 바뀌었을 때 관중이나 선수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심판이 빨리 공부해서 알려야 합니다. 
작년과 올해가 다른 경우도 있으니 변화에 적응하려면 꾸준히 공부해야죠.”

공부뿐만이 아니라 건강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국제 심판은 혈압이나 다른 질병이 있는지 자신의 건강 상태를 일 년에 한 번씩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허리 사이즈가 100센티미터 이상이 되면 안 된다는 등의 기준이 점점 강화되고 있다.

또한 상황에 빨리 대처할 수 있는 임기응변도 필요하다.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고 짧은 시간에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해야 한다. 
웃어서도 안 되고, 찡그려서도 안 되고, 두렵다는 표정을 지어서도 안 된다.
선수나 관중들이 봤을 때 심판이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몇 천 명의 관중 앞에서도 담담하게 스탠드에 서 있어야 한다.

“많은 눈들이 동시에 저를 쳐다보는 순간이 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콩닥거려요. 
하지만 담담한 척 해야 하죠.”

실수를 했어도 당황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이 심판이다. 
오심이 생길 때는 관중석에서 욕설도 들리고 심할 때는 물통이 날아오기도 한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우르르 몰려오는 경우도 있다.

“경기가 끝나면 이긴 팀과 진 팀이 분명히 갈리잖아요. 
경기가 끝나 악수를 하고, 진 팀도 만족하고 이긴 팀도 만족하는 모습을 볼 때, 양 팀 감독이 공정한 경기 진행에 대해 고맙다며 웃으며 인사하고 갈 때가 제일 기분이 좋아요.”

국내 경기에서는 승패에 따라 감독 자리가 위험해지도 하고 선수들의 연봉이 좌우되기도 하기 때문에 굉장히 민감하고 치열한 부분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심판을 할 때는 스트레스가 많다.

“오히려 국제경기가 편해요.
국제심판은 직업으로서 한다기보다는 봉사의 개념이거든요. 
심판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는데, 그때 자신의 실수를 스스로 알거든요. 
그런데 실수를 할 때마다 판정을 번복할 수는 없어요.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도 넘어가야 하고 자신의 실수로 불리하게 된 팀을 다음번에 한 번 봐준다는 식의 보상판정도 해서는 안 되죠. 
심판의 신뢰가 떨어지면 외면을 받게 되니까요.”

심판은 체력이 필요한 직업

국제심판이라고 해서 계속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제연맹에서 어디에 어떤 심판을 보내야 할지 결정해서 티켓을 보낸다. 
대회에 나가면 관련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실수를 하면 모두가 안다.
그러면 다음 국제대회에는 나갈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국제심판은 남녀 통틀어서 열두 명이다. 
국제연맹이 있고 그 밑에 대륙연맹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시아존에 있다. 
아시아존에서 경기가 있으면 아시아연맹에서 관할한다. 
만약 우리나라 팀이 경기를 가면 우리나라 심판도 같이 가는데 국제연맹은 모든 대륙을 아우르는 연맹이기 때문에 아시아 심판도, 남미 심판도, 유럽 심판도 모두 부를 수가 있다.

성해연 심판은 국제연맹의 지명을 받아서 월드리그에서 활동하는 세 명 중 한 명이다. 
대회에 나가면 관계자가 심판의 이론 능력, 심판 능력 등을 평가해서 보고서를 올리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대륙연맹에서 심판을 추려서 국제연맹에 보내는 시스템이다.

프로 배구의 경우 보통 매년 10월, 11월에 경기를 시작해서 5~6개월 동안 총 238회의 경기를 한다. 
정규시즌 238회에 플레이오프(지역 우승팀끼리 싸워서 각 리그의 우승을 결정하기 위해 치르는 우승 결정전)나 챔프전(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리기 위한 경기)까지 하면 남녀 통틀어 250경기 정도 된다. 
일주일에 다섯 번의 경기에 가는데, 혼자서 다섯 번 다 가는 것은 아니고 보편적으로 세 번 정도 간다. 
그중 주말은 빠지지 않는다. 
지방에서 하는 경우는 하루 전에 미리 도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다음 경기 장소로 이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런 만큼 체력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기도 하다.

“이번에 대한체육회에서 ‘직업심판제’를 시작했어요. 
스포츠의 승부조작 등 여러 사건들이 이슈화되면서 그 원인이 심판의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죠. 
직업으로 하지 않을 경우, 뒷돈을 받아 승부를 조작하는 일이 생길 수 있으므로 심판에게 월급을 지급함으로써 청탁을 없애자는 취지예요. 
더 이상 비정상적인 심판으로 선수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심판을 직업화하여 청탁을 뿌리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실패자로 혼자 음지에 있던 사람이 현장에서
전문가로 일하고 있어요

1등밖에 모르는 세상, 그 분야에서 특출해야 살아남는 현실, TV에 나오는 선수들만 관심을 가지는 세상. 
하지만 그들은 사실 100분의 1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1등만 바라보지만 1등이 아니었던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물론 개인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1등이 아니더라도 전문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면 분명히 기회가 있다는 점이다. 
현재 팀의 감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유명하지 않았던 선수 출신이 더 많다.

“저와 나란히 선수생활을 했던 제 친구는 화려한 선수생활을 했어요.
주변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선수로서 최고로 인정받았죠. 
지금은 은퇴를 하고 결혼을 해서 배구장에서 가끔 생활체육 수준의 배구를 가르치고 있어요. 
반면 저는 여전히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그 친구가 저를 많이 부러워해요. 
인생은 나중 일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그 친구가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저는 눈물을 흘리며 다른 일을 찾았는데, 세월이 지나니 실패자로 혼자 음지에 있던 제가 현장에서 전문가가 되어 있더군요.”

성해연 심판은 자주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이라서 쉬는 날은 취미 활동보다는 집에서 쉬는 것을 편이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산으로 가벼운 산책을 다니기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경기 시즌 중에는 학원을 다닐 수 없으니 평상시에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고 있다. 
성해연 심판은 한국 프로심판 중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 심판이 되기 위해, 국제심판으로서는 올림픽에 나가 활약하는 것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되 한정된 좁은 틀에서 선택하지 말고 꿈을 크게 꾸었으면 좋겠어요. 
그 꿈에 맞는 더 큰 세상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율성에 바탕을 둔 선택이 만족감을 주는 것 같아요. 
저는 배구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배구로 성공한 사람은 아니에요. 
도중에 단절된, 어찌 보면 실패한 사람이죠. 
하지만 스포츠는 선수로서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 역시 한 가지만 보고 뛰어들었다가 절망한 경험이 있으나 잘 살펴보니 연결된 다른 길도 많더라고요. 
세상에는 참 다양한 직업, 다양한 삶이 많아요. 호기심을 가지고 많이 경험해 보세요.”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261&curPage=1

목록보기

교육부 한국직업능력연구원 국가공인 웹 접근성 품질인증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