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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컨텐츠) 감동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때가 행복해요

한국문화기획꾼
문현우 한국문화기획꾼

한국문화기획꾼(창조직업), 아리랑유랑단·한글유랑단 단장, 2013년 대한민국 인재상 수상자(대통령상), 창조관광사업 공모전 대상자(문화체육부장관상), 삼성그룹, 현대그룹 신입사원 하계수련대회 메인 강사, 코아유(코리아 아유 레디) 대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문현우 씨는 28살의 청년이다. 
그는 발품정신으로 자신의 열정을 세상에 보여주느라 늘 바쁘다.

나만의 창조직업 ‘한국문화기획꾼’

“네이버를 검색하면 제 직업이 ‘공연기획자’로 나와요. 
하지만 저는 나만의 창조직업인 ‘한국문화기획꾼’이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다른 사람이 만든 카테고리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직업으로 살다보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하는 직업군 카테고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학생들도 세상에 힘이 될 수 있는, 자신만의 직업을 만들 수 있어요.”

문현우 씨는 어린 시절 3년 동안 말레이시아에서 조기 유학을 했다.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외국인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고 방학이 되면 아버지와 방콕이나 싱가포르 등을 다니면서 세상이 정말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원정 경기를 왔을 때 신나게 응원했던 응원가가 ‘아리랑’이었다.

그 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어머니와 단둘이 고시원에서 살게 되었다. 
그때 그에게 가장 힘이 되었던 것이 광화문에서 들리던 붉은 악마의 응원 소리였다. 
고시원에서 큰 소리 내지 못하고 억눌려 생활을 하던 그에게 그 소리는 해방감과 설렘을 안겨주었다. 
처음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여 응원을 시작했을 때는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얼마 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소리쳐 응원을 했다.

“누군가는 미쳤다고 하는 일을 증명하면, 결국 하지 않는 사람이 더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지금은 저에게 ‘그게 무슨 직업이냐’고 하겠지만 제가 계속 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 직업을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될 거예요.”

방방 뛰어다니며 보낸 중·고등학생 시절

중학교 때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문현우 씨는 밖에서 플스방, 노래방, PC방을 오가며 실컷 놀았다. 
실업계 학교라서 야간자율학습도 없었던 고등학교 때는 공부는 뒷전이고 인터넷상으로 지식이나 정보를 공유하는 활동에 몰두했다. 
남에게 배우고 들은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자신이 아는 것을 남들에게 다시 알려주는 일들이 너무 재미있었던 그는 온라인상에 올라온 질문에 답변을 하면서 지식을 쌓았다. 
또 만화책이 너무 좋아서 만화방에 다니며 읽은 수많은 만화책을 읽었는데, 그에게 만화책은 다양한 콘텐츠의 밑거름이 되었다.

“어린 시절 말레이시아 유학을 갔을 때 비행기에서 손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승무원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내 돈 들이지 않고도 세계를 누빌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남자 승무원이 되는 꿈을 꾸었죠.”

그에게 남자 승무원이 된다는 꿈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는 취직이 잘 되는 과를 선택해 전문대에 갈 생각이었다. 
승무원이 될 수 있는 전공은 4년제 대학 관광경영학과인데 그의 성적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문현우씨는 그때부터 수능공부를 시작했다. 
플스방, 노래방이 아니라 도서실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 결국 원하는 대학의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특정 대학이나 직업을 권유하신 적은 없지만 대학은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가 공부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업계 학교를 들어갔는데도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늘 바라셨다.

자신의 기획물로 자신의 판을 만드는 꿈

대학에 입학하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저 신나게 놀기만 했던 문현우 씨의 눈에는 친구들이 모두 ‘엘리트’처럼 보였다. 
공부로는 안되겠으니 다른 쪽으로라도 자신감을 키우고 싶어서 생각 끝에 그는 연극동아리에 들어갔다. 
2년 동안 활동했는데 외우는 것을 잘 못해서 단역만 맡았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사회 과목을 할 때 세계지도가 나오잖아요. 
지도를 보면서 뭔가를 만들곤 했죠. 
군대에 가서도 수첩에 전국지도와 세계지도를 붙여 놓고, 제대를 하면 이런 저런 테마여행을 해야겠다고 상상을 했어요. 
예를 들면 영덕 대게, 상주 곶감처럼 각 지역마다의 특산물을 먹어 보면서 여행을 하겠다는 식이었죠. 
그런 콘텐츠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군대에서 당시 행정보급관이 일간지를 구독해서 게시판에 붙여놓았는데, 늘 제가 그 신문들을 가져다가 스크랩을 해서 모았어요. 
전국에 있는 우리나라 술에 대한 기사,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을 발견할 때마다 차곡차곡 모았어요.”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기 위해 학비를 벌려고 삼성전자에서 1년 동안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다. 
사내 임직원들의 외국어 교육장을 세팅하고 운영하는 일이었는데 재미있기는 했지만 그는 역시 조직에 속해서 판에 박힌 일을 하는 것이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 승무원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항공사에 대한 자료들을 많이 찾아보던 그는 ‘버진에어’의 ‘리처드 브랜슨’과 ‘사우스웨스트 항공’의 ‘허브 캘러허’ 대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난독증으로 공부를 잘 하지 못했는데도 버진에어, 버진미디어 등 많은 사업체를 일으켜 CEO가 된 리처드 브랜슨. 
저가항공인 데도 불구하고 기내의 안전수칙을 랩으로 하는 등 펀(Fun) 경영을 하는 허브 캘러허. 
하지만 그의 꿈을 키워준 그들은 사실 승무원이 아니라 오너였다. 
그들은 자신의 기획물을 실현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는 막연히 자신의 기획물을 가지고 자신의 판을 만드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포기하지 않고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봤어요

그러던 어느 날 문현우 씨는 아는 선배로부터 해외봉사를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투어’라는 기업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짜로 간다는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해진 그는 해외투어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기회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부터 그는 해외투어 프로그램에 열네번이나 지원했다.

“물론 모두 다 떨어졌어요. 
하지만 포기하기 않고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봤죠. 
자기소개서를 살펴보니 제가 봐도 재미가 없더라고요. 
너무 뻔한 이야기고. ‘나를 재미있게 표현해야겠다.’ 고 마음먹고 나의 인생그래프를 그리면서 키워드를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설문조사도 했어요. 
그러자 자기소개서가 술술 써지더라고요. 
그걸로 ‘기아자동차 워크캠프’에 합격해서 프랑스에 갔죠. 
그게 처음이었어요. 
이후 ‘G마켓 해외봉사’로 또 해외에 나갔고요. 
‘대학생활이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를 그때 느꼈어요.”

그는 복학을 하고 나서 군대에서 배운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인드를 대학에서도 활용해보자는 마음에 열심히 공부해서 4학기 연속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대외활동을 많이 하던 그에게 교내 신문사에서 학우들에게 그 활동을 소개해달라는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는 그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신 교수님으로부터, 1학년을 대상으로 글쓰기 강연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 강연을 본 또 어떤 분의 요청으로 경희대에서도 강의를 하게 되고 그런 식으로 그는 계속해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소통의 힘을 가진 아리랑

“다양한 경험이 쌓이다 보니 다른 기획자가 만든 판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내 자신의 판을 만들어보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스물여섯 살에 처음 제가 만든 판으로 공모전에 지원했는데 거기에서 1등을 했어요. 
것이 아리랑 유랑단입니다. 
베트남에 가서 아리랑 스쿨을 진행했죠.”

일주일간의 일정이었는데 반응이 좋았다. 
게다가 베트남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리랑’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면서 아리랑이 실시간 검색어로 올라왔다. 
덕분에 아리랑을 검색하던 사람들이 문현우씨의 ‘아리랑 유랑단’의 활동도 같이 보게 되었는데, ‘숨은 주역’이라는 내용으로 그에 대한 기사가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가능성을 봤고 이것을 더 구체화하고 싶었어요. 
세계일주 제안서를 제대로 만들어서 여러 기업들에 후원을 요청했죠. 
그때 저와 대외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카페베네’에서 후원을 받았어요. 
또 작년에 한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해서 유럽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죠. 
런 기회로 얻은 자료들을 ‘한국관광공사 창조관광사업 공모전’에 제출해서 대상을 받았어요. 
그 덕분에 이렇게 사무실까지 만들 수 있게 되었죠.”

아리랑 스쿨’은 걸어 다니는 한국이다.
화를 전공한 청년들이 외국에 가서 ‘한국문화가 모두 왔다’는 느낌을 외국인에게 주는 것이다. 
직접 해보니 반응이 좋았고 그는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을 보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서예로 아리랑을 써보고, 눈을 감고 판소리로 아리랑을 부르고, 눈을 떠보면 눈앞에 문방사우(종이, 붓, 벼루, 먹)가 놓여 있어서 자신이 느낀 감정을 문방사우로 써보는 체험을 했어요. 
칠레의 친구들은 한국 문화의 전반적인 것을 배우고 한국의 역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무척 신기해했어요. 
아리랑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외국인도 있었어요. 
파리 에펠탑에서 공연을 본 사람들이 다음 공연장까지 따라오기도 했죠. 
그때 ‘이 노래가 가진 힘이 정말 대단하다. 분명 이것으로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느꼈어요.”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문화소통가

문현우 씨는 뉴스에 중국 동북공정(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중국이 추진한 동북쪽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연구 프로젝트) 문제가 나오면서 우리의 역사를 중국에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는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인터넷에 ‘악플’을 다는 것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아리랑유랑단이 외국에 나가 중국 동북공정에 맞서 한국을 알리는 데 앞장서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노선이 바뀌었다고 그는 말한다.

“막상 외국 길거리에서 공연을 했을 때 가장 반응이 좋은 이들은 중국인, 일본인이었어요. 
정작 중국인들은 동북공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해요.
‘너희 음악이 참 좋다’며 열심히 박수를 보내주죠. 
‘외국에서 아시아 노래를 들으니 행복하다’라는 반응도 있었어요. 
그때 저는 ‘우리 노래지만 어느 나라에서건 그 나라의 아리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우리 문화가 최고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세계인과 소통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큰 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노선이 바뀌었다. 
‘우리 노래, 우리 땅’에 대한 역사적인 잣대로 펀치를 날리고자 시작했다면, 지금은 문화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태권도, 한글 등 우리 문화를 가지고 외국인들과 좀더 재미있게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감동하는 사람들의 표정 변화를 볼 때 행복해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가사에 웃음을 보이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문화소통가가 되고 싶어요.”

그는 한국문화기획꾼으로서 외국에서는 공연으로 한국을 알리고 국내에서는 교육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조차도 거문고와 해금을 구분하지 못하고 선조들이 서예를 쓰던 방식도 잘 모르는 형편이니, 이렇게 잊혀져가는 우리 문화를 일반인들이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되기 위한 기준

“외국의 유명한 CEO들을 보면 겉모습만으로는 고민이 없어 보여요.
그런데 인터뷰를 보니까 ‘거의 8할은 잡무의 연속이다’라고 하더라고요. 
공과금 내러 가야하고, 포장해야 하고, 청소해야 하는 등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이처럼 표면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겨야 하는데, 창업을 해보니 그런 시각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아요. 
창업을 하면서 어른이 되는 것 같아요. 
저한테 어른이 된다는 기준은 창업, 결혼, 아이를 낳는 것, 독립,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내는 것인데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창업밖에 없으니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죠.”

문현우 씨는 하려는 것은 무엇이든 말로 해야 한다고 한다. 
말을 해놓아야 행동으로 옮기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전에는 강연에 가서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말해버린 적도 있었다.

“추석에 인사동에 가서 프리절(Free절)을 할 겁니다.”

말을 던져 놓고 나니 막막했지만 말을 했으니 지켜야 했다. 
한복을 차려 입고 인사동에서 무작정 절을 했다. 
서양에서 시작한 프리허그(Free Hug) 운동을 보며 사랑과 공경을 담은 우리만의 인사법인 절을 통해 외국인에게 한국문화의 따뜻함을 알려주고 공유하자는 캠페인이었다. 
람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좋았다.

소통을 꿈꾸는 신조선통신단

문현우 씨의 다음 계획은 ‘태권도 유랑단’이다. 
이어서 음악, 글자, 스포츠 등 한국문화로 모든 유랑단을 만들 계획이다.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신(新)조선통신단을 만들어 예전 조선통신사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걸으며 일본과의 역사적 충돌이 아닌 소통을 꿈꾸고 있다. 
또한 ‘적이 없는 노래, 아리랑’을 가지고 북한에서 노래를 부르고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남과 북,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매개로 재미와 행복을 주는 일을 계속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아르헨티나에 갔는데 동포들이 장구가 없어서 박스로 장구를 쳤다고 해요. 
처음에는 ‘세계여행’에 집중했던 한 번의 이벤트였는데 가는 곳마다 저희에게 거는 기대가 컸어요. 
‘멋지게 잘해서 힘이 되어 달라’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어요. 
다니다 보니 아르헨티나처럼 어려운 곳이 너무 많았어요. 
이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문화정책을 하고 싶어서 요즘은 ‘국회의원이 되지 않고도 문화정책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고 다녀요.
우선 실무와 현장경험을 더 많이 해서 내공이 쌓이면 후학을 양성하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포장만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후학을 양성할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이 깊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165&cur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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