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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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인 인터뷰

interview 인권운동가 장향숙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골든서클재단 인권운동가

어린 시절을 깊은 산골에서 보낸 장향숙은 정식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주로 독서와 자기성찰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만의 인생관을 만들어갔다.

궁금해요
어렸을 때 꿈은 어떤 것이었나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세상을 책을 통해서 접했잖아요. 그래서 당시 제 생각에 시인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지요. 결국은 시인은 되지 않았지만.
궁금해요
제가 다른 인터뷰를 보니까,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 계셨고, 책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책을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태어나서 16년 간 경북 영주에서 자랐는데요. 소백산맥 자락에 자리 잡은 완전히 시골이에요. 아주 깊은 산골이었죠. 거기에서 16년 동안 자랐어요. 그게 제 정서의 밑바닥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는 자양분인거죠. 그 후에 부모님께서 부산으로 이사를 가셔서, 거기서 30년을 넘게 살았죠. 그리고 국회의원을 하게 되면서 서울로 오게 되었고, 올해로 5년 째 된 것 같아요. 여기 중계동에 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궁금해요
시골에서의 삶이 선생님 삶의 자양분이 된 것 같다는 말씀이신가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네, 그런데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통적인 유산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제가 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는 건 이런 이유들 때문이에요. 한국에는 아직도 문맹자가 참 많아요. 그런데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조건이 있죠. 나도 당시에 학교 가는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농사 지으셨고 당시 형제들 다니던 학교도 지금은 다 폐교 되었지요. 그런 학교를 형제들은 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다녔어요. 그런 길을 부모님이 나를 업고 다닐 수도 없었죠. 그래서 우리세대는 나 같은 사람이 학교에 못 가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그래도 제게 있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증조부님 때부터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었어요. 그래서 이런 가치관이 있었죠. 자식이 장애인이면 세상 어느 부모가 좋다고 하겠어요, 비관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종교심 때문에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그래서 귀하게 키워야 한다’는 그런 게 있었어요. 우리 부모님 의식 저변에도 있었고. 그래서 다른 건 기대 못 해도 정신적으로는 신앙을 가졌고, 성경도 읽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익히게 되었죠. 인류 문명사를 봐도, 문명의 발전이 다 문자, 기호 때문에 이루어 진 것이잖아요. 내게도 어찌 보면 ‘문자를 알게 된 것이 일종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제게는 굉장히 중요했고, 바로 그것을 통해서 내가 남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궁금해요
음, 그 이후에 대한 질문을 드릴게요. 부산에는 선생님께서 16세 되셨을 때 오신 건가요? 그러면 재활원에는 부산에 오시고 바로 가신 건가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그렇지는 않아요. 재활원에는 서른 넘어서 갔습니다. 부산에서는 오로지 집안에만 있었어요. 밖에도 못 나가고 해서 더 힘들었지요. 더군다나 사춘기도 겹쳐서. 그런데 저는 그럴수록 더 독서에 매달렸어요. 아마 23세 때 처음으로 바깥에 나간 거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굉장히 장애인들에게 힘든 사회입니다. 제가 휠체어를 타고 나간 게 늦은 건 아니었는데, 부산 길에서 같은 장애인을 본 기억이 없어요. 부산이 어떤 도시입니까, 우리나라 제2의 도시 아니에요? 어쨌든, 그러다가 한 수녀님과 인연이 맺어져서 지금 제가 여기까지 온 거 같아요. 그 분 말씀이 장애인들을 부모가 집안에 가두어 놓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셨죠. 그 이후로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해야 되겠다’ 그리고 서로서로 만나도록 모임을 권유하게 된 거죠. 바로 그 일에 제가 참여하게 된 것이에요. 사실 별 것 아니었어요. 그냥 정기적으로 만나서 서로 얘기도 하고 도움도 주고받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당시 제게는 굉장히 엄청난 계기가 되었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큰 영향을 줬는지 그렇지 않은지 본인을 모를 텐데, 아마 수녀님도 모르실 거예요. 하지만 결국 그 수녀님을 만난 것이 제 인생에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분명하답니다.
궁금해요
지금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할 일 있으면 하고, 책 보고, 친구들 만나서 얘기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 거죠. 내가 앞으로 인사이더로 살 것인가, 아니면 계속 아웃사이더로 살 것인가? 아웃사이더로 살아도 사회에서 장애인들을 이해해 주겠어요?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에요, 사회는 특별히 요구하지도 않지요. 그냥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은, 흡사 도인처럼 사는 게 아웃사이더지요. 그러다가 40살이 되면서 결정을 내렸어요. 이제 스스로 인사이더로 끼어들어야 되겠다, 이루든 못 이루든, 직접 현장에 뛰어 들어서 만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죠. 어릴 적 꿈인 시인으로 살아도 나쁠 건 없지만, 결국은 사회 속에서 나 자신을 찾지 못 한다면 내 존재에 대한 의문이 가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회가 질문을 던져주지 않으니까, 안 해도 되는 건 아니거든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생은, 행복한 인생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삶, 사회라고 했잖아요. 저는 인사이더로 살기로 선택한 거지요. 장애인으로서, 여성 장애인으로서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장애인 협회도 남자 중심이고, 가부장적이에요. 내가 그런데서 있거나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위로 올라가는 건 체질상 맞지 않고. 생각에, 장애인 운동 중에서 안 하는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여성 장애인 운동이었어요. 물론 몇몇은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이런 게 필요하다고, 어렴풋이 알았지만 공식적으로, 직접적으로 얘기가 표면에 나오지는 못 했었지요. ‘이걸 내가 하면 되겠구나!’ 또 때 마침 그 시절 같이 일할 친구도 있었고, 처음부터 ‘내가 역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진보여성운동사를 보면 여성단체협의회에서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한 건 여성 노동자 운동부터 시작이라고 볼 수 있어요. 가부장 사회에 대한 거부, 호주제 폐지 등의 운동은 과거에는 상당히 정치적이었고, 큰 이슈별로 하다 보니, 장애인에서 여성이 소수인 것처럼, 거기에서도 여성 장애인 문제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두 운동의 접합점으로서 역사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죠.
궁금해요
국회의원 하실 때, 어려운 일은 공인으로서 책임감이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그게 제일 무겁죠. 진짜 힘든 거는, 일의 무게가 크다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제가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비례대표로서 장애인, 그리고 시대적인 사명으로서 여성으로서의 책임감. 이런 것이 끊임없이 마음을 눌렀죠. 내 일이면서 장애인 등의 소외계층이 바라는 입법을 수행하는 것이 의원직 활동이기도 했죠.
궁금해요
혹시 다시 정치인으로서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또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입법은, 수많은 소외계층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요. 가령, 어디 지방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 노령 연금 입법을 성사시킨 후였을 거예요. 그 법안을 처리하고 나서 한 교수님을 뵈었는데 저에게 너무 고맙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거든요. 자기 가족, 지인이 너무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고요. 내가 주도적으로 한 역할을 아셨던 거죠. 이럴 때 입법자로서 책임감과 함께 보람을 느낄 수 있었죠. 이렇게 큰 법을 제정하는 것도 중요하기도 한데요, 장애인 관련 입법은 이런 직접적인 효력뿐만 아니라 10년 후, 혹은 20년 후 우리 사회에 인식적으로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보람이죠. 물론 큰 법 안에서 조그마한 개정도 중요하죠.
궁금해요
선생님만의 건강유지 비법이 있나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저는 오히려 독서에요. 제 에너지 공급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죠. 누구든지 지속적으로 마음을 꾸준히 다스리기가 어렵잖아요. 누구나 침체기가 있고, 다시 용기를 내곤 하는데, 저는 의원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책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어요. 내 정신건강을 유지하고, 또 회복시켜주죠. 이게 나에게 주어진 한도 내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부분에 대해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궁금해요
할 수 없는 건 하지 않고 말인가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제 생각에 장애인은 이 부분에 대해 잘 훈련된 사람이라고 봐요. 저 같은 사람이, 산을 못 올라가는 걸 한탄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요? 그래서 결국은 한계, 환경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는 거예요. 깊이 있게 하든, 혹은 다양하게 하든 자기 선택인 거죠.
궁금해요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커리어를 생각하는 청소년들에게 자기 성찰 및 자기의 한계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을 해 주시고 싶으신가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네, 그렇죠. 가령 누구는 건강하더라도 평생을 접시 하나 드는 것도 싫어한다면 건강한 몸이 주어지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어요? 하지만, 가령 호주에 한 장애인은 다리도 절단되고 팔도 절단되고 해서 10살 때 자살도 시도한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강연도 하고 수영도 잘 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장애인은 컴퓨터를 굉장히 잘 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렇게 꾸준히 하는 사람은 성공하게 되어 있다고 봐요. 결국 인생은 남의 것이 아니에요. 못 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도 우리의 책임이구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문명이 발달해 왔으니까 내가 지식인이구나, 하는 생각이에요. 그런데 그런가요? 그렇지 않죠. 문명은, 그 옛날 이집트 때에도, 마야 때에도 찬란했습니다. 앙코르와트도 그렇죠. 우리가 눈부시게 기술이 발전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은 먼 미래에는 사라질 수도 있는 거예요. 긴 시간으로 봤을 때는 모르는 거죠. 그런데 그 시대마다 예술, 철학 등등의 분야에서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간 사람은 늘 존재했죠.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리를 한 사람들이에요. 최초로 동굴에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 없었다면 현재에 문자나 컴퓨터가 존재했겠어요? 따라서 이 시대 사람들은 겉으로의 문명에 현혹되어서 정작 나 자신, 내 속의 시선에 대해서는 놓치기 쉬운 것 같아요. 이는 결국 내 인생을 놓치게 되는 거죠. 나는요, 평생 직업 없이 살아온 사람이에요. 직업을 가질 생각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끝없이 꿈꾸고, 독서하고, 자기 성찰하고, 그런데 결국 그런 게 커리어이고 자기 경력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이력서에 쓰는, 겉으로의 경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경력이 더 중요해요. 결국은 개별 사람이나 청소년에게 말한다면, 제가 얼마 전에 터키를 다녀왔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거기 유명한 것 중에 하나가 ‘블루 아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참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건 이 세상의 수많은 시선 중에서 내 속에 눈이 있다는 걸 뜻합니다. 즉, 그 눈을 의식할 때마다 날 지켜준다는 거죠. 내 속의 눈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또 결국 자기 성찰에 달려있어요. 그것이 바로 부(富), 직업, 문명을 만들어가는 것이죠.
궁금해요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처럼 창의적으로 일을 찾기 보다는 남들처럼, 가령 경영학을 전공한다든지, 그 이후로 대기업만을 목표로 삼는다든지 하는 획일적인 진로를 찾아가는데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고 싶으신가요?
인권운동가 장향숙 장향숙
역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거 같아요. 가령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원이면 안정되고, 또 집단 속에 있으면 안정된다는 생각이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에요. 결국 그런 삶을 만족한다면 살아간다면 좋은 거죠.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켜주지는 못 하는 거예요. 아무리 좋은 집단 안에 있어도, 그 집단에서 하루아침에 ‘나가라!’ 이러면 어떻게 할 건가요? 믿었던 주식시장이 붕괴하면 어떻게 하죠? 그야말로 깽판 나는 거예요. 즉, 외부에 의존하는 삶은, 설령 겉보기에 안정적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밖이 아닌, 내 안에 시스템을 가져야 어딜 가든 성공할 수 있어요. 저는요, 예수나 붓다가 장사를 해도 굉장히 잘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대기업에 있더라도, 내일 경비원이 되더라도 속이 튼튼하면 문제가 될 게 없지요. 나도 마찬가지에요, 국회의원이 성공한 건가요? 안정된 건가요? 이 세상에 무엇이 진정한, 영원한 교회이고 사원이 될 수 있겠어요? 직업이든, 혹은 인생이든 내 안에 시스템을 가지는 것이 성공하는 삶이랍니다. 사람들이 불안을 많이 겪고 있는데, 실제로 불안, 희망은 끝없이 우리 삶에 존재해요. 그 가운데에서 선택하는 것이 내 인생이구요. 그럴 때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죠. 쇼펜하우어가, ‘사회는 우리의 표상’이라고 했습니다. 부조리도 마찬가지에요.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사회, 사기가 만연하는 사회, 라고 해서 저렇게 하는 사람이 무섭고, 피해야 한다고 사람들이 말하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 자화상인거죠. 결국 사회의 변화, 인류의 변화는 별 게 아니에요. 내가 내 인생을 잘 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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