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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식을 줄 모르는 농구 열정, 그의 인생이 되다


손대범 스포츠전문기자

사람들은 농구 잡지 <점프볼>의 편집장 손대범씨를 ‘농구학자’라고 부르는데, 이는 농구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붙여진 그의 별명이다. 
그가 기획하고 편집하는 잡지와 오랫동안 기고해온 글 그리고 경기를 해설하는 입담에 이르기까지 그의 농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농구와 관련된 그가 하고 있는 다양한 활동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농구잡지 편집장, 스포츠 기자, 해설자 등 농구와 관련된 다양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그의 농구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슬램덩크> 같은 농구만화를 그리는 만화가를 꿈꿨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농구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학창 시절 대범씨는 매일 일기를 쓰며 그 내용을 어머니와 공유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는 글 쓰는 일에 흥미를 느껴 직업으로 삼고 싶었지만, 영화 촬영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그가 본인처럼 예술가의 길을 걷기보다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살기를 바라셨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글 쓰는 일을 반대하셨다.

“농구가 좋아서 어린 시절 <슬램덩크> 같은 농구만화를 그리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만화를 그려 출품을 한 적도 있었는데 떨어졌어요. 
그래서 만화가의 꿈은 포기했죠. 
그렇다고 선수가 되기에는 체력 조건이나 실력 면에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중학생 때부터는 농구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PC통신 농구동호회에 가입해서 매주 농구를 하곤 했던 그는 기자, 선수 등 다양한 직업의 동호회 사람들에게 종종 상담을 받았다.
‘졸업 후 기자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주된 상담의 내용이었다. 
때 프로농구연맹에서 일하는 분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안 받게 되면서 그는 농구장에서 대걸레질도 하고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을 하는 일을 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농구장에서 보내는 그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했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는 저의 글재주를 높이 산 분으로부터 번역 아르바이트를 받기도 했고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대학교 2학년 쯤, 그에게 한 농구잡지에 글을 기고할 기회가 찾아왔다. 
현재 그가 편집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점프볼>이라는 잡지다. 
미국 프로농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드물던 당시 그에게 찾아온 큰 기회였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모른 채 시작했지만 글 쓰는 재미에 빠진 그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연습을 했다.

“저에게 글을 정식으로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어요. 
어느 단체든 매년 스크랩북을 만들어요. 
그 스크랩북 3년 치를 빌려서 매일 줄을 쳐가며 읽었어요. 
좋은 건 적었다가 응용하기도 하고요. 
요즘 어떤 인터넷 기사를 봐도 옛날 신문사만큼 좋은 글이 많지가 않아요. 
기자는 빨리 써야하고, 사람들은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기 때문이죠. 
옛날 신문의 우아한 문구를 보며 많이 반성하고 있어요. 
바쁘게 기사를 쓰다 보니 저도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이 많거든요.”

처음 하는 기자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죠

신문매체에서 인터넷매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인터넷매체 기자로 일을 시작한 대범씨는 당시의 어려웠던 취재 환경을 기억했다. 
그 당시 신문사의 파워는 엄청나서,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기자였던 그는 기자석이 아닌 관중석에 앉아 취재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쫓겨나기도 했다.
가 기자임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그의 기자생활의 시작은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홍보팀에 연락해서 아무리 기자라고 해도 안 믿어줘서 회사에 전화해서 확인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이후 3~4년 버티다 보니 그때부터 알아주시더라고요. 
이제는 문호가 개방되고 온라인의 힘이 세지다 보니 상황이 바뀌었지만, 그 때는 힘들어서 그만 둘까말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기자로 인정을 받으면서 취재에 제약은 덜해졌지만 여전히 그에게 남은 숙제가 있었다. 
기자라는 일이 농구를 좋아하는 마음과 선수들을 향한 응원의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었다. 
아무리 좋아하는 선수라도 비판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을 기사로 써야하는 일이 대범씨가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팬의 입장에서 마음이 아파서 처음에는 비판하기가 어려웠죠. 
기자라면 이를 빨리 버려야 해요. 
취미가 직장이 되면 나쁜 점도 많아요. 
정하게 봐야 하거든요. 
축구 기자들 역시 축구가 좋아서 시작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힘들다고 말해요. 
단순히 좋아하기만 할 때와는 다르죠.
무언가를 반드시 몇 시까지 완성해야한다고 제약이 있으면 더 이상 취미가 아닌 것이 돼요. 
이를 이겨내는 방법은 즐기는 것밖에 없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해설자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해설은 22살에 처음 시작했어요. 
당시 방송국에서 젊은 느낌의 해설자를 찾았었거든요. 
선수들에게서 ‘저 사람은 뭔데 저기 있지?’하는 시선을 느꼈어요. 
피나는 노력을 해서 선수가 되고, 해설자가 된 사람들이 보이는 경계심은 어쩌면 당연한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1년 가까이 했는데, 솔직히 반응은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여기저기서 많은 기회가 생기고 조금씩 성장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로부터 6년 뒤인 2007년부터 대범씨는 다시 해설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올림픽 중계를 비롯해 크고 작은 중계를 하다가, 2013년에는 KBS예능 프로그램인 <우리 동네 예체능>의 해설자로 출연을 하기도 했다.
기회가 하나씩 쌓이며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그저 신기했던 그는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해설자로서의 제 장점은 우선 해외농구 정보를 많이 안다는 점 같아요.
그리고 주로 운동의 관점에서 보는 선수출신 해설가들과 비교해서 시청자들이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지를 안다는 점이에요. 
시청자들은 딱딱한 내용보다는 뒷이야기도 알고 싶어 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아직 젊다는 것이 어필되는 것 같아요.”

편집장으로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바쁘게 살아요

“편집장은 기자보다 객관적이고 넓게 바라봐야 해요. 
기자가 어떤 책에 대해 훌륭하다고 했다면, 편집장은 그 책이 훌륭한 면도 있지만 나쁜점도 찾아야 하고, 주변의 평가는 어떤지도 찾아봐야하고, 저자도 만나보라고 해요. 
놓치는 부분 없이 다각도로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돼요. 
물론 글도 더 잘 써야 돼요. 
월등히 잘 써야지 기자가 써온 기사를 잡아줄 수 있어요. 
편집장은 대외관계도 신경 써야 해요.
주변에서 저에 대한 인식이 나쁘면 저희 기자들이 취재를 가도 출입 시키지 않겠죠.”

2006년 대범씨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기고하던 농구잡지 <점프볼>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잡지를 인터넷으로 읽는 이 시대에 독자들의 코드에 맞추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기자 때와는 또 다른 시각이 필요했던 그는 농구뿐만 아니라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을 쌓으며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했다.

“저는 사무실에 있지 않아요. 서점에도 가고, 다양한 사람들도 만나요. 
저의 신조는 ‘사무실에 있으면 나올 것도 안 나온다.’예요.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서 고민하는 것보다, 카페든 서점이든 나가서 쓰는 편이 낫거든요.”

하루 평균 4~5명의 광고주를 만나 진행하고 싶은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하고 제안서를 전달한다는 그는 하루 일과를 모두 마무리하고 나면 자는 시간이 채 4시간도 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독자의 댓글은 일을 하는 원동력이 되죠. 
물론 좋지 않은 말도 있지만, 제 글을 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돼요.
독자의 편지를 받을 때도 있어요. 
저에게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큰 감동이에요. 
그리고 글을 통해 방송 같은 기회가 생길 때 일의 성취감을 느끼죠. 
출연료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전공으로 공부했던 것이 일하는데 정말 많이 도움이 됐어요

“학창시절에 저는 대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꼭 가야할까?’, ‘2년제 전문대학이면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죠. 
그저 농구에 대한 글을 쓰는 것만 좋아했지, 대학 진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많이 달랐어요.”

그는 결국 부모님의 뜻에 따라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경영정보학과에 들어갔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그와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생각에 선택했던 것이었는데 막상 공부를 하다 보니 흥미가 생겼다. 
그는 장학금을 받고, 서울캠퍼스로 올라갈 정도로 공부에 열심이었다. 
서울 캠퍼스에서는 미국학을 전공했는데 미국 스포츠를 좋아하던 그가 미국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정작 배우게 된 것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의 문학, 예술이었지만 서울을 오가며 공부를 하는 시간만큼은 즐거웠다고 했다.

“전공으로 공부했던 것이 일하는데 정말 많이 도움이 됐어요. 
제가 전공한 경영정보학은 데이터를 분석하고 가공해서 어떻게 쓰는지를 공부하는 것이거든요. 
스포츠는 기록에 관련된 것이 많잖아요. 
제 나름대로 기록을 가지고 상황을 만들어가며 어떤 선수가 공을 많이 넣는지 결과를 내보기도 했어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계산기를 이용해서 하나하나 계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리고 미국학을 전공하며 배웠던 것들은 미국 출장을 다니며 미국인들과 얘기할 때, 정서나 문학 등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어요.”

죽을 때까지 기사를 쓰는 기자로 살고 싶어요

대범씨가 기자생활을 하는데 가장 많은 영감을 받은 사람은 <아이비스포츠>라는 스포츠마케팅 회사의 상무님이었다. 
상무님은 그에게 항상 정직해야 하고, 남을 속이면 안 된다는 기자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늘 말씀하곤 하셨다. 
또 한 사람은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이라는 잡지에서 마이클조던 선수를 전담하던 '샘 스미스‘라는 기자였다.

“2000년 초반만 해도 NBA(전미농구협회) 잡지를 구할 수가 없었어요. 
스물 한 살쯤이었는데, 답답한 마음에 미국에 있는 잡지사에 메일을 모두 보냈어요. 
‘당신의 글이 재미있는데 볼 수 있는 곳이 없다.’라는 내용이었어요. 
메일을 300개 정도 보냈는데, 신기하다며 10명의 기자가 답장을 보냈어요. 
그 때부터 그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정보들을 구했죠. 
그중에서 가장 잘 대해줬던 사람이 ‘샘 스미스’ 기자였어요. 
분은 저에게 ‘기자는 남들이 놀 때도 열심히 일하고, 남들이 일하기 싫어할 때도 기꺼이 즐겁게 일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이메일로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국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어요.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이메일 보냈었다고 말하면서 제가 쓴 책도 드리고 같이 사진도 찍었어요.”

대범씨는 한 때 대한농구협회의 회장을 꿈꾸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죽을 때까지 현장에서 기자로 사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70세가 넘어서도 기자로 활동하는 미국과 비교해 우리나라는 나이가 들면 편하게 일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 70세까지 기자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는 가능한 오래 현장에 남아 기자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1세대 스포츠 기자 중에 ‘조동필’이라는 기자가 있었는데, 그분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원고를 쓰셨어요. 
언제 어떤 경기가 있었는지 물어보면 백과사전처럼 모르는 일이 없었죠. 
저도 그분처럼 되고 싶어요. 
을 때까지 해설을 하면서 글을 쓰고 싶어요. 
가장 어려운 꿈이지 않을까 싶어요.”

힘든 과정을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어있어요

“꿈을 정했다면 차근차근 밟고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기자든, 연기자든 그 어떤 일이 됐든 처음부터 화려한 모습만 기대하지 말고, 최대한 많은 것을 고생하며 경험했으면 해요. 
저는 농구와 관련된 것을 정말 많이 경험했어요. 
농구장에서 걸레질도 하고, 공고판도 세우고, 현장 진행도 해보고, 곰 인형 탈을 쓰기도 했죠. 
그런 경험들이 나중에 글을 쓸 때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대범씨는 잠시 동안이었지만 어른들을 도와 외국 선수들의 에이전트 역할을 했었다. 
그러한 실무 경험을 통해 그는 사실에 경험담이 담긴 보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었다. 
경험은 돈이라는 가치로 곧바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자격증보다 더 값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기자를 뽑을 때도 자격증이 아닌 지원자의 농구에 대한 애정과 농구와 관련된 경험의 정도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2000년도에 스포츠마케팅 회사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한 스포츠마케팅 회사의 직원 모집에 많은 사람들이 지원을 했다. 
서울대학교 졸업생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지원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일을 그만두었다. 
결국 끝까지 회사에 남은 사람은 오히려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다들 화려한 면만 보고 왔던 거예요. 
대학까지 나와서 천막을 치는 등 궂은일은 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결국 끝까지 남은 분은 처음에는 엑셀도 다룰 줄 모르는 분이었는데, 현재는 매우 높은 직책에 계세요.
그 분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면, 별의별 경험을 다 하셨더라고요. 
정은 화려하지 않고, 힘이 들지 몰라도 묵묵히 견뎌내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어있어요. 
누구나 해설자, 칼럼리스트가 되는 건 아니에요.
다양한 경험을 토대로 자기 색깔을 찾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242&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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