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 인터뷰

여러 분야의 진로∙직업 전문가와 사회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의 인터뷰를 통해
다양한 직업 세계를 확인하고 진로선택 방법을 알아보세요.

커리어패스

과학분야

(과학) 적성과 재능은 부딪쳐 ‘발굴’하는 것이다


이상희 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

모래바람이 부는 메마른 땅을 파헤치자 오랫동안 파묻혀 있던 사람의 뼈가 드러난다. 
2000년 전부터 중세시대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뼈다. 
비록 흐트러지긴 했지만, 아직 하나하나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하다. 
뼈를 조심스레 파낸 뒤, 뼈에 붙은 흙을 떼어내며 소중히 다듬는다. 
30년 전, 발랄한 대학생 시절 주말과 방학 때마다 전국을 다니며 발굴지에서 삽을 들고 땅을 파던 생각이 난다. 
장소는 한국과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으로 각각 달랐지만, 땅을 파고 무언가 소중한 것을 발굴하는 느낌만은 똑같았다.

이상희 미국 UC리버사이드 인류학과 교수가 지난 2014년 8월,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의 방어성 발굴지에서 겪은 일이다. 
인류 진화 전문가이자 고(古)인류학자인 이 교수는 오랜만에 직접 인류의 뼈를 발굴하며, 마치 첫사랑과 재회한 듯한 감동을 받았다. 
자신의 마음의 고향은 바로 땅 아래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인문학도가 과학에 눈뜨기까지

고인류학은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인류의 몸 특징과 진화를 화석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마치 법의학자처럼, 땅에 묻힌 뼈를 통해 당시의 삶을 재구성한다. 
대상이 아주 먼 과거의 인류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고고학자도 비슷한 일을 하지만 고인류학자는 화석을 직접 연구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 교수는 고인류학을 정통으로 전공한 몇 안 되는 국내 출신 학자다.
고인류학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을 때(사실 지금도 그렇다) 과감하게 해외로 나가 공부했고, 지금도 꾸준히 국내외를 오가며 연구하고 있다.
한국, 몽골, 아제르바이잔 등에서 직접 발굴에 참여했고, 발굴한 화석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인류 진화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연구를 미국 학자와 함께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고인류학과 인류 진화에 대해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글을 발표하는 작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고인류학은 대표적인 통합 학문이다. 
한국 학교에서 나누는 ‘문과’나 ‘이과’의 구분으로는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이 말은 한국의 대학에서는 제대로 공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 교수가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던 시절에는 사정이 더 나빠서, 과학 관련 수업은커녕 과학 전공자를 주변에서 만나보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기회가 생겼어요. 
대학 2학년 때 젊고 열정적인 소장학자(이선복 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오셔서 저를 ‘과학’으로서의 고고학에 눈을 뜨게 해 주셨죠.”

이상희 교수는 이선복 교수 덕분에 과학과 고고학을 접목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졸업논문도 한국 선사시대 토기의 성분을 X선 회절분석기술을 이용해 분석한 논문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고인류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고인류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졸업 뒤였다. 
미국으로 유학을 갈 기회를 얻었는데, 이선복 교수가 다시 고인류학을 공부해 보라며 추천을 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분야를 외국에서 새롭게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이 교수는 호기롭게 세계 최고의 고인류학자 중 한 명이자, 인류진화 이론의 양대 산맥 중 한 명인 밀포드 월포프 미국 미시건대 교수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워낙 낯선 분야인데다 생물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 보니, 입학 당시까지도 뭘 공부할지 제대로 준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이 분야가 내게 맞는가’ 같은 고민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부딪혔다.

“이런 말 해도 될까 모르겠는데요(웃음),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만큼 엉뚱했어요. 
학업계획서에 ‘한국의 청동기 시대를 연구하겠다’고 썼거든요. 
월포프 교수는 그런 연구를 하는 분이 전혀 아니었는데요. 
즘이라면 대학원 문턱도 못 넘었을 거예요. 
하지만 월포프 교수는 저를 뽑아줬을 뿐만 아니라, 잘 공부할 수 있도록 끝까지 믿고 지도해 주셨답니다. 
나중에 왜 저를 뽑았는지 여쭤봤더니, ‘가르치면 어쨌든 공부는 잘 할 것 같아서’였대요.”

대학원은 입학했지만, 이 교수는 예상대로 무척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낯선 이과 공부를 해야 하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고인류학은 멀리는 수백만 년 전의 인류 조상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발굴을 통해 오래 전 뼈 화석을 얻고, 이를 통해 당시 인류의 몸에 대한 정보와 삶, 생태, 진화 등을 연구한다. 
따라서 뼈만으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생물학과 인체를 많이 공부해둬야 한다. 
유전학과 진화론도 잘 알아야 한다. 
이 교수는 입학하자마자 의대와 생물학과에서 해부학과 유전학을 들으며 생물학을 기초부터 새로 배웠다. 
고등학생 때부터 문과 공부만 한, ‘뼛속까지 문과생’이었던 이 교수는 말할 수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외롭고 힘들어 학교에 가면서 펑펑 울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때 문과와 이과로 나누는 교과 과정이, 인류학 등 여러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게 됐어요.”

고등학생들이 문과와 이과로 나뉜 채 공부하는 풍경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점점 많은 학문이 문과와 이과의 통합적인 사고를 필요로 한다는 걸 생각하면 더 아쉽다. 
하지만 아쉽다고 그냥 접고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교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열심히 읽어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또 이 교수는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게 맞을까’라는 고민이나 망설임으로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눈 딱 감고’ 과감하게 뛰어들기를 권한다. 
자신이 모르던 적성과 재능은, 그렇게 해서만 ‘발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좌충우돌 끝에 9년 만에 대학원 과정을 끝내고 고인류학 전문가가 됐다. 
그리고 인류의 진화를 이끌어 온 굵직한 주제들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남녀 사이의 성차나, 평균 수명의 증가에 따른 ‘노년’의 탄생과 진화, 200만 년 동안 이뤄진 두뇌 크기의 증가 추세 등이 이 교수가 매진해 온 분야들이다. 
모두 우리 인류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됐는지 알려주는 분야다. 
최근에는 고국으로 눈을 돌려 한반도에 어떻게 인류가 살기 시작했는지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조만간 관련 연구를 시작할 계획도 세우고 있다.

적성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변한다

땅에서 무언가를 캐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그게 귀한 금이든 흔한 돌이든, 땅에 숨어 있는 것을 발굴해내는 과정은 지난한 일이라는 걸. 
아무리 보배를 캐낼 수 있더라도, 발굴 과정 자체는 힘들고 느리고 지루한 노동일 뿐이다. 
하지만 반짝이는 순간이 온다. 
마침내 찾던 대상을 발견해 냈을 때의 기쁨과 보람은, 그 이전의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한꺼번에 보상해 줄 만큼 강렬하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땅을 파고 무언가를 발굴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길고 지루한, 그저 견뎌야 할 시간으로 가득하다. 
물론 이런 삶에도 잠깐의 빛나는 순간, 기쁨의 시간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덕분에, 우리는 남은 시간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살아 보니까, 학생으로서도 그렇고 교수로서도 그렇고, 혹은 아내나 엄마로서도 비슷해요. 
삶은 한 80%의 시간은 그냥 지겹고 지루한 일의 연속이에요. 
하지만 나머지 20%가 너무나 좋다 보니 대부분의 지루한 시간도 다 감내할 수 있는 거예요. 
직업도 마찬가지겠죠? 
만족할 만한 직업을 찾기 위해서는 그렇게 자신이 좋다고 여길 수 있는 20%를 찾는게 관건이에요. 
근데 이게 사실 어려워요. 
열정과 재미, 적성이 맞는 일이어야 할 텐데, 그냥 기다려서는 찾을 수 없거든요.”

이 교수는 미래의 직업을 고민하는 젊은 학생들에게 과격한 방법을 추천한다.

“가장 재미있는 일, 가장 적성에 맞는 일 따위 찾고 고민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말고, 그게 무엇이든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뛰어드세요.”

무모해 보이는 조언이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어떤 일이든 모든 부분이 적성에 맞지 않고 싫기만 한 것은 아니고, 반대로 모든 점이 좋은 일 같은 건 없거든요. 
해보지 않고는 전혀 몰라요.”

이 교수는 이 교훈을 몸으로 직접 배웠다. 
이 교수는 처음 교수가 되고 나서 무척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의외로 자신이 교육과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일에 적성이 없다는 걸 그 때 알았다. 
늘 캐묻는 듯한 미국 학생들의 스스럼없는 태도는 낯설고 불쾌했고, 끊임없는 질문에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교수면 연구와 교육이 가장 중요한 임무인데,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마음을 고칠 수 있었다. 
계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왔다.

“기왕 하는 건데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어요. 
성경을 보면 최고의 사도들도 예수에게 질문을 하잖아요. 
학생들이 스승에게 질문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강의법을 공부하고 좋은 강의를 할 방법을 궁리하기도 했어요. 
근데 신기하게도, 생각을 바꾸니 제가 그토록 싫어하던 가르치는 일 안에서도 제 적성과 맞는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이 교수는 자신이 무언가를 기획하고 구성한 뒤에 발표하는 데에 재미를 느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능도 있어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이런 사실은 이 교수가 쓴 대중적인 글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주제를 잡고 적절한 사례를 동원해 흥미롭게 풀어내는 데 그는 천부적인재능이 있다). 
반응은 금세 왔다. 
이 교수의 강의에 각박한 평가를 내리던 학생들이 하나 둘 “감동적이었다”고 말하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일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이 아니더군요.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제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더 알아보고 생각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참 재미있어졌어요.”

이 교수는 플루타르크의 격언을 소개했다. 
“정신은 채워야 하는 그릇이 아니라, 불 붙기를 기다리는 불씨다.” 
누군가가 재능이나 적성 때문에 고민한다면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비어 있는 그릇’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채워졌나 혹은 채워지지 않았나만으로 가치를 판단한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가능성이 작은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자신조차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다. 
이 사실은 수백만 년 인류의 역사를 연구해 온 이 교수가 누구보다 잘 안다.

“게다가 적성은 고정돼 있지도 않아요. 
한 사람 안에서도 변하죠. 
20대 때는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도, 30대가 되면 그렇지 않을 수 있어요. 그 반대도 가능하고요.”

사람들에게 불씨가 되는 멘토가 됐으면

이 교수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작가로도 활약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 2~3년 사이에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글들을 썼다.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인류가 걸어온 길에 대한 글이었다. 
신문 ‘동아일보’와 과학잡지 ‘과학동아’에 동시에 연재된 이 글들은, 인류가 태어나 험난한 환경을 극복하고 문화를 이룩하는 긴 여정을 따뜻하고 친근한 말투로 소개하고 있다. 
작고 연약하며 외로운 존재였던 인류는 아프리카의 척박한 땅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고, 두 발로 위대한 첫 발자국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예술과 언어, 지능, 협력 같은 ‘인간적인’ 특징을 꽃피웠고, 이제는 70억 명으로 번성하고 있다.

자신의 진정한 ‘뿌리’에 대해 궁금해 하던 독자들은, 한 달에 한 번 실리는 이 교수의 아름다운 글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줬다. 
이 교수는 이런 대중적인 글 역시 사람들 안에 있는 플루타르크의 불씨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저는 멘토의 중요성을 아주 높이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 지금의 제가 있었잖아요. 
저 역시 그 분들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학생을 사랑하고, 좋은 멘토가 되고 싶어요. 
강의와 글역시 그런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고요.”

이 교수는 “미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에게도 멘토를 찾으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말이 그저 자신을 도울 사람을 배나무 아래에서 배 떨어지듯 기다리라는 뜻은 아니다. 
기회는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온다. 
자신에게 불을 붙여 줄 멘토 역시 구하고 찾는 사람에게 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땅 속에 수천, 수백만 년째 잠들어 있는 인류 화석을 찾는 일과 비슷하다. 
화석은 노력하는 사람, 스스로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발굴의 기회를 준다. 
자신의 미래를 발굴하려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998&curPage=2

목록보기

교육부 한국직업능력연구원 국가공인 웹 접근성 품질인증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