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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진짜 농사는 학생 농사


이유경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부 교수

올해 1월, 선과학학술지 ‘네이처 지네틱스’ 표지는 빨간 고추가 장식했다. 
고추의 유전체를 모두 해독한 논문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논문은 다른 ‘게놈 분석’ 논문과 다른 점이 있다. 
식물 한종의 전체 게놈을 단 한 팀이 해독했다는 것이다. 
감자나 토마토 등 보통 식물의 유전체를 해독할 때는 국제 연구팀이 연합해 컨소시움을 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도일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부의 교수팀은 3만5,000개나 되는 고추의 거대한 유전체를 홀로 분석해 냈다. 
이 어마어마한 일을 어떻게 해 낸 걸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초. 서울대 연구실에서 최 교수를 만났다.

“가장 큰 복은 우리 학생을 만난 것”

제가 한 건 없어요. 다 우리 학생들이 한 일이죠.”

최 교수는 모든 공을 학생에게 돌렸다. 
그는 “고추 유전체 분석하느라 학생들이 아주 애 많이 썼죠. 
가장 큰 문제는 컴퓨터였어요.”

최 교수가 서울대로 부임한 2006년만 해도 고추의 게놈을 빠른 속도로 처리할 만한 사양을 갖춘 컴퓨터는 찾기 어려웠다. 
실험실 컴퓨터를 쓰면 게놈의 일정 부위를 서로 겹치게 붙이는 데만 2~3일이 걸리기 일쑤였다.

“결국 컴퓨터를 새로 사기로 했어요. 
학생들은 용산, 청계천으로 수소문하고 다녀야 했습니다. 
연구할 시간도 부족한데 말이죠. 
그런데 결국은 원하는 사양을 갖춘 컴퓨터를 찾아냈더라고요.”

최 교수는 “분석한 게놈을 알맞게 편집하고, 정렬할 소프트웨어를 찾는 것도 문제”였다고 회상했다. 
결국 한 논문에 나온 적합한 소프트웨어를 찾아내 구매했고, 학생들은 금방 이 소프트웨어에 완벽히 적응했다.

“생물학 공부하는 학생들이 컴퓨터 공부도 해야 했어요. 
누가 가르쳐줄 상황도 아니었는데, 자기들끼리 결국 해냈죠.”

최 교수는 누구보다 학생들의 노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누구 한명의 공을 더 높이 살 수가 없어서, 결국 학생 7명을 모두 고추 게놈 논문의 1저자로 올렸다.

“제가 어디 가서 이렇게 훌륭한 학생들을 만나겠어요. 
그야말로 우리는 ‘드림팀’이죠. 
제가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하기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리 학생들을 만난 것입니다.”

최 교수는 서울대로 오기 전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14년 동안 일했다. 
그는 “마침 자리가 나서 오게 됐다”며 당시를 담담하게 회상했다.
연구원에서 일할 때만 해도 본인이 교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이다.

“사실 여기 지원을 하고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오랫동안 일했던 곳을 떠나기가 쉽지는 않거든요. 
‘사람이 마흔 넘어서 자리 옮기면 죽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래도 큰 용기를 낸 만큼 복 받은 것 같아요.”

뛰어난 실력, 따뜻한 마음 갖춘 ‘천생 교육자’

사실 최 교수를 만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처음 최 교수를 만났던 것은 2011년 가을, 감자 게놈이 과학 학술지 ‘네이처’ 표지를 장식했을 때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네이처 논문을 들고 최교수 방문을 두드렸다.

당시 취재차 만나기로 한 날이 마침 최 교수가 말한 그 컴퓨터를 실험실에 들여놓는 날이었다. 
취재 중 한 남학생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선생님, 컴퓨터 지금 와요”라고 말했고 최 교수는 “응, 그래”라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최 교수는 연구실을 나가는 학생의 들뜬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보이는 미소와 비슷했다.

‘따뜻한 마음’은 필수, 그는 자타 공인 식물 게놈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석학이다. 
그에게 감자 게놈 논문을 들이밀자 최 교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연구 내용과 의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 교수는 감자의 친척이지만 당시에는 아직 분석이 안 된 토마토, 고추 등 가지과 식물 게놈까지 추가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후 지금까지도 ‘게놈’만 나오면 최교수만 찾고 있다.

이런 최고의 실력파가 모든 공을 제자들에게 돌렸다. 
그는 “조금 뒤에 제자 두 명을 소개해주겠다”며 “식물병리학의 패러다임을 확 바꿔 놓을 유망한 인재들”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여전히 학생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마침 최 교수가 손에 들고 있는 찻잔에 새긴 ‘선생님 사랑해요’ 문구와 묘한 조화를 이뤘다.

‘수학’ 피해 들어온 생물학의 길

누가 봐도 ‘천생 교육자’인 최 교수의 어린 시절이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어렸을 때 선생님을 동경하며, 선생님이 되기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을까.

“뭐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그냥 엄청 촌스러웠어요.”

최 교수는 경기 안성시 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는 “경기도라서 수도권으로 생각하겠지만 제가 자라던 1960년대에는 안성이 대구보다 멀다고 느껴질 정도였다”며 “평택과 수원을 거쳐 서울에 올라오려면 4시간 정도 걸렸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최 교수의 아버지가 그를 앉혀놓고는 어렵게 입을 뗐다.

“너 서울 가서 공부할래?”

농사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입에서 ‘공부’라는 의외의 단어가 나왔다. 
아마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 공부는 제대로 한 번 시켜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다소 갑작스러웠지만 소년 최도일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삼촌 집에 머물며 어린 나이에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린 나이에 혼자 서울살이를 했네요. 
그런데 그때도 그랬지만 저는 뭘 선택해야 할 때 깊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순간 판단에 따라 바로 결정했던 것 같아요.”

전공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대 가면 수학을 잘 해야하는데, 수학이 싫어서 농대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 역시 ‘수학이 싫어서’ 였다.

“농대에서는 ‘필드 실험’을 해요. 
실제로 밭에 씨를 뿌리고 거두는 건데, 이때 거둔 작물을 세워 두고 통계 분석을 하거든요. 
이 통계가 아주 머리 아프더라고요. 
그런데 분자생물학을 선택하면 필드 실험을 안 해도 되거든요. 
그래서 선택했죠.”

실험의 달인, 비결은 ‘옆 동료 나누는 수다’

수학을 피해 선택한 분자생물학이지만, 이 선택으로 최 교수는 몰랐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제가 아마 실험하는 손재주는 있었던 것 같아요.”

대학원에서 실험을 하며 생물학 연구에 재미를 느낀 그는 계속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실험실 선배의 권유로 국비 유학생에 지원하게 됐다. 
두 번의 도전 끝에 미국 UC데이비스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최 교수는 당시를 “세상에서 제일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힘든 시기였다. 
나라에서 3년간 유학 자금을 지원 받았지만 등록금을 내고 나면 남는 돈이 없었다. 
통장 잔고에 ‘0’이 찍힌 적도 있었다. 
혼자라면 어떻게 버틸 수도 있었겠지만, 최 교수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그래도 무슨 문제든 다 해결하게 돼 있어요.”

최 교수는 이런 어려움도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섯 학기를 휴학했고, 학비를 못 내는 바람에 학교에서 나가라는 학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실험할 때도 이런 긍정적인 태도가 큰 도움이 됐다. 
그는 “모르는 게 있으면 옆 학생한테 물어보면 된다”며 “한 번도 옆에 있는 사람이 경쟁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실험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다른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해답을 얻었다. 
또 새로운 실험 방법도 이런 대화에서 찾을 수 있었다. 
UC버클리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던 때도 최 교수는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그때는 미국도 분자생물학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던 시기였어요.
제대로 된 실험 장비를 갖춘 실험실이 몇 없었죠. 
저희 실험실도 그랬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아쉬운 놈이 우물 파야죠.”

최 교수는 다른 실험실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필요한 실험도구가 있으면 빌려 쓰고, 실험 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봤다.

그 결과 최 교수의 손끝에서 기적이 탄생했다. 
식물의 병저항성 유전자가 단 한 개도 클로닝(DNA 조각이나 세포 등을 복제하는 것)이 안 됐던 당시, 최 교수는 담배에서 병저항성 유전자를 클로닝 해냈다. 
심지어 이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의 도움 없이 혼자서도 저항성을 만드는 유전자였다. 
최 교수가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한 지 1년도 안 됐을 때 거둔 쾌거였다.

때맞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러브콜’이 왔다. 
해충의 천적을 이용한 ‘생물농약’을 함께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최 교수가 식물의 병저항성 유전자를 찾기는 했지만, 전공이 분자생물학이라 분야가 맞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가의 도움으로 학위를 마친 터라 그는 기꺼이 응했다.
그리고 선임연구원 시절 열심히 생물농약을 개발했다.

“매운 맛 맞춤형 고추 개발할 것”

책임연구원이 되고 나서야 다시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는 전공분야로 돌아오기로 했다. 분
자생물학으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유전자 하나의 시대는 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모든 생물의 유전자 전체를 다루는 ‘유전체’의 시대가 온 것이다.

“유전체를 분석할 식물 종을 정해야 했죠. 
그때 떠 오른 것이 고추에요. 
한국인의 음식에서 고추를 빼 놓고 말할 수 있나요. 
고추는 무조건 한국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최 교수는 이때부터 고추의 유전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석을 마친 유전자는 모두 유전자 공유 데이터베이스에 올렸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토마토 컨소시움에서 유전체 연구를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왔던 것이다. 
최 교수는 흔쾌히 승낙했다.

“제가 그때 승낙한 이유는 따로 있어요. 
토마토의 2번 염색체에는 고추의 캡사이신 유전자와 비슷한 것이 들어 있거든요. 
저는 그 유전자의 계보를 알아보려 냉큼 2번 염색체를 맡았죠.”

그렇게 토마토 컨소시움에 들어가 게놈 분석을 마쳤다. 
그리고 2012년 토마토 게놈이 실린 논문은 ‘네이처’ 표지를 장식했다.

토마토 게놈 분석을 마친 최 교수는 다시 고추에 집중했다. 
최 교수의 연구실 한쪽에 걸린 칠판에 여러 품종의 고추 학명이 가득했다. 
또 최교수 뒤에 있는 책장과 책상의 수북한 책과 보고서에서도 그가 오랫동안 고추 외길 인생을 걸어온 연구자임이 확연히 드러났다.

토마토 게놈 분석을 마치고 1년이 조금 지난 뒤 마침내 고추 게놈을 완성했다. 
이제 연구 목표를 다 이루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최 교수는 다음 연구 계획을 알려줬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먹는 고추 품종을 분석했는데요, 이제 다른 고추 품종의 게놈도 분석할 생각입니다. 
이런 데이터를 쌓아서 각각의 특성을 살려 용도에 딱 맞는 고추를 분자 육종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002&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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