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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우주에 ‘우리별’을 띄우다


박성동 쎄트렉아이 대표

대전광역시 대덕 연구단지 내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위성 개발 전문기업 쎄트렉아이.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하자 버선발로 마중 나온 박성동 대표가 보인다. 
그는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위성 개발 현장으로 안내한다.

“1m급 해상도의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소형 지구관측 위성 ‘데이모스 2호’랍니다. 
곧 스페인으로 이송할 예정이죠.”

쎄트렉아이에서 개발해 스페인으로 수출하는 위성이다. 
벌써 4번째로 해외에 수출하는 국산 위성이다. 
1999년 위성 개발 불모지에서 쎄트렉아이를 창립한 박성동 대표.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의대 진학을 꿈꾸다 KAIST로

“난 의사가 되고 싶은데, 왜 여기 와 있을까?”

학창 시절 그는 그냥 공부 잘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당시의 장래 희망도 위성 개발과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TV를 통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한국을 방문했다가 심장병 어린이 2명을 데리고 돌아가는 장면을 봤는데, 그때 ‘의대를 가서 심장전문의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났으면, 선천성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던 우리 어린이를 국빈 방문 때 미국 대통령이 데리고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3형제 중에서 막내였다.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을 했는데, 한 집에서 대학생 둘을 키우기 힘든 형편이었다. 
둘째 형이 대학에 입학하니, 대학에 다니던 큰형이 군대에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 KAIST에 진학했다. 
진로도 자연스럽게 의학계에서 이공계로 바꿨다.

하지만 KAIST에 진학한 뒤 고민에 빠졌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직업으로 의사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대학 공부도 재미가 없었고 학교 생활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KAIST가 개교하면서 첫 신입생으로 입학한 상황이라 선배가 없었고 교수도 ‘초보 운전자’처럼 느껴졌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막연하게 KAIST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품고 있었다. 
막연히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별도로 준비하는 것은 없었고 고뇌의 시간만 흘러갔다.

우연이 필연으로
인공위성 개발 유학생에 뽑히다

그러다가 대학 졸업을 앞두고 4학년 1학기를 마친 시점에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학교에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할 유학생을 모집합니다!” 
교에서 유학경비를 지원해 영국 서리대로 한국의 위성 개발에 참여할 학생을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하러 유학을 떠난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Devotion(헌신)!’ 당시 위성 개발에 참여할 유학생을 모집하는 프로그램을 설명했던 최순달 교수가 아무 말 없이 흑판에 백묵으로 썼던 단어다. 
그리고 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잘나서 누리는 혜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여기서 공부하는 돈의 일부는 시장에서 일하시는 할머니의 전대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이제 사회에 기여할 바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을 개발할 팀을 짜려고 하는데, 여기에 참여할 유학생을 모집하니 지원해라.” 
그 순간, 사회에 갚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그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박 대표는 최 교수가 자신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최순달 교수는 국내 전자통신 분야와 인공위성 개발분야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라 스탠퍼드대에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휴렛팩커드 연구원, 미국항공우주국 제트추진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귀국 후 한국전기통신연구소(한국전자통신연구원 전신) 초대 소장, 체신부 장관, KAIST 초대 학장 등을 역임했다. 
1982년 한국전기통신연구소 소장 시절에는 “전전자교환기(TDX)를 개발하지 못하면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다”는 각서를 쓴 뒤, 1000억 원이 넘게 투입되는 무모한 국책사업이라는 비난을 극복하고 4년 만에 TDX 국산화에 성공해 ‘1가구 1전화 시대’를 열었다. 
1989년에는 KAIST 내에 인공위성연구센터를 설립해 초대 소장을 맡으며 한국 최초의 인공위성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쓰레기통 뒤지며 악착같이 배웠던 유학 시절

“제대로 못 배우면 도버해협에 빠져 죽어라”

1989년 영국 서리대로 유학을 떠날 때는 각오가 비장했다. 
최순달 교수도 “가서 위성 제작 기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도버해협에 빠져 죽어라”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이 말을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첫해에 그를 비롯해 5명, 이어 4명이 서리대에 파견됐다.

다들 영국 서리대에서 무척 열심히 위성 기술을 배웠는데, 한밤중에 실험실에 우리 학생들밖에 없었을 정도다. 
영국 연구원들이 레이저 프린터로 자료를 출력하다가 제대로 안 나온 것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 자료 중에서 충분히 볼 만한 것은 가져오기도 했다. 
당시에는 레이저 프린터가 너무 고가여서 모두가 한 대의 프린터를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위성 기술을 배우는 동안 한국에도 그림자처럼 ‘그림자(Shadow) 연구팀’이 꾸려져 운영됐다. 
한국에서 똑같이 관련 기술을 적용해 본 뒤, 안 된다고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찾아줘야 했다. 
악착 같이 위성 기술을 배운 덕분에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를 개발할 수 있었고, 또 무사히 위성을 우주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유학을 떠난 지 3년 만인 1992년에 거둔 성공이었다.

그리고 국내에 돌아와 영국에서 기술을 제대로 배웠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에서 우리별 1호와 거의 똑같은 ‘우리별 2호’를 1년 만인 1993년에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제 우리만의 기술로 인공위성을 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로부터 6년 뒤인 1999년 드디어 100% 토종 기술로 만든 인공위성 ‘우리별 3호’를 우주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는 소형 위성 분야에서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건이었다. 
영국 서리대에서 설립한 소형위성 회사인 SSTL에서도 이 성과를 놀라워했다.

위성 개발 기업을 설립하다

“대한민국이 위성을 수출한다고?”

그런데 1999년 말 국가에 외환위기가 닥치자 국내 위성 개발 분야에서도 효율화가 검토됐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위성 제작 집단이 2군데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 제기를 하며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1999년 12월 동료들과 함께 KAIST 인공위성연구센터를 나와 쎄트렉아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연구센터에서 외국 출장을 가장 많이 다니며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이유로 그가 대표를 맡았다.

우리별 개발 과정에서 쌓은 기술력이라면 세계의 소형 위성 시장에서도 통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특히 우리별 3호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특별한 위성이었다. 
박 대표는 “당시 정부는 진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우리별 3호는 당시 영국 위성보다 좋은 위성이었다”며 “우리는 위성을 수출할 수도 있다고 자신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1년 11월 말레이시아로부터 지구관측용 소형 인공위성 ‘라작샛’을 개발하는 사업을 수주했다. 
회사 설립 2년 만에 190억원 규모의 위성 사업을 따냈던 것이다.

말레이시아도 우리나라처럼 영국 서리대(SSTL)와 기술이전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바라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기술이전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포르투갈, 터키, 알제리 등 10개국처럼 영국 서리대로부터 위성개발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것이다. 
쎄트렉아이는 말레이시아 정부에 위성을 함께 개발하고 그 기술을 함께 공유하자고 제안해 라작샛 사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쎄트렉아이는 소형 지구관측 위성 시스템 기술과 관련해 인공위성 본체, 전자광학카메라, 그리고 위성관제 및 영상 수신처리 지상국 개발을 위한 핵심기술을 확보해 왔다. 
라작샛 이후 아랍에미리트로부터 두바이샛 1호와 2호, 그리고 3호를, 스페인으로부터 데이모스 2호를 수주했다. 
무게 200㎏에 해상도 2.5m급의 라작샛과 두바이샛 1호는 2009년 7월 우주 궤도에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또 인공위성 자세제어용 부품, 지구관측용 전자광학카메라 등을 터키, 싱가포르 등에 수출했다.

우리나라 위성 개발에도 참여했다. 
다목적실용위성(아리랑)과 통신해양기상위성(천리안)에 들어갈 서브시스템과 모듈을 개발했다. 
특히 야간이나 구름 낀 날에도 지구관측이 가능한 전천후 위성 ‘아리랑 5호’에는 태양센서를 개발하는 데 기여했다.

박 대표는 “회사 역량의 70%는 해외 위성 제작에 투입해 왔다”며 “2012년 말 기준 누적금액으로 외국 수출액이 1300억 원이 넘고, 2013년에는 1800억 원 이상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쎄트렉아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위성 수출 기업이자 우리나라의 위성 관련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회사로 우뚝 성장한 것이다.

<우리나라 인공위성 현황>

국가 주도 개발, 운용


민간 분야 운용(외국서 구매)



창업 전도사, 진로 도우미
“아프니까 청춘이다”

박 대표는 사실상 쎄트렉아이의 대표이사 사장 자리를 김병진 사장에게 넘겼다. 
그는 “지금까지 이만큼 온 것도 좋고 내 인생의 목표는 다 달성했다고 본다”며 “나머지는 덤”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연구원의 창업을 돕는 전도사로 일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는 “연구자로만 사는 것보다 창업하는 것도 좋다”며 “연구원 생활과 창업을 경험해 봤으니까 다른 연구자가 창업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멘토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평소 그는 책을 많이 읽는다. 
2001년부터 ‘느낌표 -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란 TV프로그램에 소개된 책을 모두 읽으면서 책 읽는 재미에 빠졌다. 
출장 가면 책을 2권씩 들고 다녔으며 1년에 50권 정도의 책을 읽었다. 
경영, 미래 전망에서 인문, 역사에 이르기까지 읽는 책의 분야도 다양하다. 
그는 학생들에게 김난도 교수의 책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권했다. 
청춘은 실패할 수 있다는 특권을 지녔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며.

그는 학생들에게 직업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로도 얼마든지 직업을 가질 수 있다”며 “정말 자기가하 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양한 기회가 있고, 선택의 폭이 넓다”며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이 답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전 그는 광주에서 열린 진로박람회에서 중고생, 부모, 공무원 등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강의를 했다. 
박 대표는 “우주라는 게 매력적이라 많은 사람이 모였던 것 같다”며 “대학과 학과는 진로나 직업 결정에서 생각만큼 결정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쎄트렉아이의 경우 항공우주공학 전공자는 15% 정도이며 나머지는 수학, 천문학, 기계공학, 컴퓨터공학 등으로 다양한 분야를 전공했다. 
항공우주공학 이외의 분야가 인공위성 개발에 중요한 유관 분야지만, 이 분야들의 전공자는 얼마든지 인공위성 개발 이외의 다른 직업을 택할 수 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683&curPag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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