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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꿈꾸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정형민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어렸을 적 꿈 중 하나가 문학가가 되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그 꿈 유효합니다.”

늦가을 바람이 제법 쌀쌀한 이른 아침 건국대학교에서 만난 정형민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꿈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정 교수는 “초등학교 때 품었던 꿈이 아직도 바뀌지 않고 있다”며 “하나는 연구를 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고, 하나는 문학가가 되는 꿈인데, 하나는 이뤘으니 나머지 하나도 언젠가는 이룰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내가 하는 일? 인류를 위한 약쟁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묻자, 정 교수는 방긋 웃으며 ‘약쟁이’라고 답했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일하고 있으니 약쟁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정 교수의 전공은 생명공학, 그 중에서 발생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은 뒤 그는 자신의 전공과 의학기술을 접목해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불임 부부들에게 시험관 아기 시술 연구를 했다. 
계 최초로 유리화 난자 동결법이라는 기술을 개발해 1998년에는 세계불임학회 및 미국생식의학회(IFFS/ASRM) 우수논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축산대 출신인 그가 수 많은 불임 부부들에게 웃음을 가져다준 ‘천사’가 됐던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들이 지금은 중학생, 고등학생, 심지어 대학생까지 있단다.

불임치료 연구의 대가였던 정 교수가 줄기세포 연구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1998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연수를 가서부터다. 
1998년 10월 줄기세포가 처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는 재생의학, 줄기세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줄기세포를 이용해 난치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줄기세포 구축에 필요한 재료들이 그동안 자신이 다루어왔던 정자와 난자, 배아였기 때문에, 이 분야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이다.

“항상 만져왔던 재료들을 다른 방식으로 연구하는 것이 뭐 어렵겠냐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죠. 
당시 의학계에서 치열한 경쟁이 있었던 불임치료나 생식의학 분야에서도 주목을 받았던 것이 어쩌면 자신감? 아니면 자만감으로도 작용을 했구요.”

귀국과 동시에 당시 근무하던 차병원에 줄기세포 연구실을 차렸다.
그렇지만, 연구를 거듭하면서 단순히 줄기세포를 만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환자들 치료에 적용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부딪쳤다.

쓸모 있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

과학자는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해볼 수 있다. 
자연 현상과 원리를 규명해 다른 연구의 바탕이 될 수 있도록 돕는 기초과학자가 있는가 하면, 그런 기초연구를 바탕으로 기술을 실용화해 어떻게 하면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응용과학자가 있다. 
사실 정 교수는 기초과학자에서 응용과학자로 전환한 스타일이다.

의사가 아닌 기초과학자로서 동물을 복제하고, 유전자의 기능을 살펴보고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연구하다가, 차병원에 들어가 임상의들과 연구하면서 자신이 연구해왔던 조그만 지식들이 실제 불임환자들에게 아기를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이 흘리는 기쁨의 눈물을 보면서 ‘전율’을 느꼈다고 그는 표현했다.

어찌보면 무모한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줄기세포 연구에 뛰어든 것도 “내 연구가 실험실에만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과학자로 기억되고 싶은 그의 학창시절은 어땠을까.

정 교수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부모님을 잘 만나서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던 학생”이었다. 
그저 좋은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으며, 호기심이 많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그런 학생이었단다.

그는 학창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심지어 성적을 잘 받아와도, 성적이 떨어졌어도 잘 했다 못 했다는 말씀을 안 하셨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었던 가정에서 자란 정 교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양한 운동과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이전부터 스케이트를 타고, 학교 다니면서 테니스와 농구, 야구 등을 배울 수 있었다. 
서울에서 자라 자연을 접할 기회가 적다는 판단에 부모님들은 그를 데리고 여행을 자주 다녔다.

또 정 교수의 아버지는 매주 그에게 책을 한 보따리씩 사다 줬다. 
인전부터 소설 분야 등 다양한 전집류를 사줘서 많은 책을 접할 수 있게 했던 것.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뭔가 하나에 몰입하는 스타일인 그는 넘쳐나는 책 무더기를 마다하지 않고 끊임없이 읽어댔다.

정 교수는 이런 어린시절의 경험이 연구자로서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단언했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운동을 접하면서 운동의 즐거움을 알고 아직도 계속 하면서 밤새워 연구할 수 있는 체력이 다져졌고, 닥치는대로 읽었던 책들 덕분에 많은 생각을 하게되고 다양한 상상을 하면서 꿈을 꾸게 해주고 있다는 것.

그래서 정 교수는 석사과정 학생들에게는 관련 분야 연구논문을 많이 읽고 배우라고 얘기하지만, 박사과정 학생들이나 박사후 과정 연구원들이 논문만 읽고 있는 것을 보면 혼을 낸다. 
자기 스스로 연구 주제를 정하고 연구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박사과정에서 논문만 읽으면 머리가 굳어져 하나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이론이나 기술을 만들어내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꿈을 많이 꾸고, 실험을 많이 해보고, 실패도 많이 해보라고 충고한다.

재수를 꿈꾸던 학생, 실험실 귀신이 되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단순히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돼 연구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진학을 고민해야 할 때, 그는 한참 인기를 끌던 공과대학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의과대나 생명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지만 정 교수에게는 시험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고등학교 입시를 위해 치러야 하는 연합고사를 준비하던 1979년 10월 26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일주일만에 깨어나 시험을 못 볼 뻔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친구의 장난으로 4층 계단에서 굴러 한 쪽 눈을 다치고 발목이 부러져 학력고사장에 안대를 끼고 목발까지 짚고 시험을 봤다. 
제대로 공부를 못해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아 원하던 의대에 갈 수 없게 되자 그는 재수를 결심했다.

재수 결심을 알렸더니 어머니와 작은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째가 재수하면 동생들도 재수할 수 있다는 어찌 보면 단순한 논리였다.
그래서 나온 점수를 들고 담임교사에게 적당한 곳에 보내달라고 했단다. 
그래서 추천받은 곳이 건국대학교 축산대.

“제가 강남 한 복판에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그 때는 경기고, 상문고, 서울고 등등 해서 서울대 입시경쟁이 한참 붙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학교가 서울대를 더 많이 보내냐 할 때였는데,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농대가 아닌 뜬금없이 건국대 축산대를 추천한거예요. 
좀 황당했죠. 
난 건국대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거든.”

담임은 정 교수에게 재수는 학교 다니면서 해도 되고, 건국대 가면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그는 4년 장학생으로 건국대 축산대에 입학했다. 
당시 장학생들은 기숙사에 반드시 들어가 생활해야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정 교수는 재수를 위해 새벽 4~5시에 일어나서 학원수업을 듣고, 심지어 친구도 사귀지 않았었단다.
내가 계속 다닐 학교도 아닌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체력적으로 재수공부와 대학생활을 병행할 수 없어 6개월만에 포기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1지망으로 수의학과를 지원했지만, 선배들이 쫓아와 건국대에서는 축산학을 공부해야 된다고 설득해, 결국 1지망 축산학과를 지원해 진학하게 됐다. 
그렇지만 수의학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복수전공으로 수의학 공부도 했다.

2학년 전공을 정할 때 그는 당돌하게도 학부생이 정길생 교수(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를 찾아가 연구실에 받아달라고 요청했던 것.
정길생 교수 연구실에는 현재 삼육대 이상진 교수가 조교였고, 제주대 박세필 교수가 석사 과정 학생으로 있는 등 현재 줄기세포와 발생학 분야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었다. 
정 교수는 이 때를 회상하면서 “당돌한 학부생을 받아준 교수님도 그렇지만 귀찮아하지 않고 생명공학 공부가 뭔지,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지 알려준 선배들을 만났던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가 공부를 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밀고 왔던 것도 주변의 좋은 선배와 후배,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중요한 것은 ‘꿈을 꾸는 것’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오면서 뒤돌아 보면 중요한 것은 꿈을 꾸는 것입니다. 
학창시절에는 꿈을 많이 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10년 뒤, 20년 뒤에는 내가 과연 뭐가 돼 있을까 꿈을 꾸는 것입니다. 
그냥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끊임없이 작성하는 겁니다. 
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뭔지 찾을 수 있는겁니다.”

정 교수는 바쁜 연구 생활 속에서도 중고등학생, 대학생을 비롯해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하고 있다. 
입시 경쟁이 심한 가운데 부모나 교사들이 제대로 멘토링을 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본인 처럼 현장 연구자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실 그가 학생들 멘토링을 시작한 것은 친한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아들이 이공계를 진학하고 싶어하는데 정확히 뭘 하고 싶어하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 혼란을 겪는 것 같으니 연구자인 네
가 좀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 
그렇게 시작한 멘토링이 소문이 나면서 확대된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쪼개 멘토링을 해준 학생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고,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찾아오면 그는 ‘이 일을 잘 했구나’하는 생각이 든단다.

“꿈을 많이 꾸고, 포트폴리오를 끊임 없이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게 하다보면 자신이 누군지를 찾고, 자기를 만들어가게 되니까요.
포트폴리오를 만들려고 하면 당연히 다양한 체험과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나중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바탕이 됩니다.”

연구자는 최종 산물에 대해 고민할 수 있어야

그가 생각하는 연구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뭘까.

정 교수는 자신이 불임연구할 때는 물론 줄기세포를 연구하면서 목표로 삼았던 것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실용화 기술을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기초연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응용과학자에게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중에 어떻게 쓰일 수 있을 것인지는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 교수의 지론이다.

또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해 머리와 마음을 열어둘 수 있는 개방성과 네트워킹이 현대 연구자들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유리화 난자 동결법도 사실 전자공학 연구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도움을 받았던 것. 
자신이 하는 연구분야에만 몰입해서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융합하는 것이 시너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정 교수가 연구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좋은 차병원에서 건국대로 자리를 옮긴 것도 다양한 연구자들을 만나고 싶어서 였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만나기 위해서는 오픈마인드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을 잘 알아야지요. 
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석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동료, 선후배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겁니다. 
지금 옆에 있는 이들은 연구현장에 나가서 같이 경쟁하고 일할 수 있는 동료 과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연구하는 줄기세포 분야는 이제 임상 치료와 연결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는 3~5년 뒤에는 좋은 품질의 줄기세포가 환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정 교수의 활약이 기대되는 시점인 것이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675&cur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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