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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분야

(대안학교) 뭐라도 하자, 지금 당장!


김수강 대한국밥 점주

대안학교를 선택하기까지

김수강 씨는 중학교 시절 여자 짝한테 연필 빌려달라는 한 마디를 못해서 하루 종일 필기를 못할 만큼 소극적인 학생이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진학을 선택해야 할 즈음 부모님은 그에게 일반 인문계 학교, 조리고등학교, 대안학교, 인터넷학교, 실업고등학교 등 몇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셨다. 
그의 선택을 돕기 위해 일부러 일주일 간 휴가를 낸 아버지와 함께 그는 대안학교 두 군데와 조리고등학교, 실업계 고등학교를 탐방해보았는데 그 중 간디학교가 가장 그의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며 신발을 건네주는 간디학교 선배의 모습 인상적이어서 간디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을 했어요. 
조리고등학교에 가기를 은근히 바라셨던 부모님들도 흔쾌히 허락을 하셨고요.”

그의 어머니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주말이면 주말농장학교에 보내는 등, 대안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분이었다. 
그가 입학할 당시만 해도 대안학교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는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아들이 가는 곳이라는 소문에 내심 걱정을 했던 그의 눈에 비친 선배들의 모습은 그를 긴장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첫 오리엔테이션 때 형들이 술을 먹는 것을 보고 정말 무서웠어요.
하지만 절대 강요하는 법은 없었죠. 
그 뒤 큰 행사가 끝나면 선생님, 학부모들 함께 모여서 맥주 한 캔씩 마셨어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니까요. 
금연위원회에서 담배 피우는 아이들 명단 만들어서 어떻게 하면 금연을 시킬까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죠. 
무조건 ‘너 하지 마. 혼난다.’하고 윽박지르지는 않았어요.”

쉽지 않았던 공동생활

소극적인 성격으로 남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힘들었던 김수강 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학생들끼리 회의를 하는 ‘식구들의 솔직한 회의’라는 자리에서 손을 들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일 보고 같이 생활하는 친구들 앞에서조차 발표하기가 힘들었다. 
선생님께서 ‘수강이가 이야기를 한번쯤 해야겠다.’ 하시면서 일부러 안건을만들어 이야기하게 만드셨을 때는 너무 긴장한 탓에 식은 땀을 흘렸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에게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죠. 
나와는 너무 다른 친구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으니까요. 
한번은 친구를 붙들고 펑펑 운적도 있어요. 
담배 피우는건 너무 나쁘고 커다란 죄악처럼 느껴지는데 친구가 담배 사러 간다고 하길래 붙잡고 울면서 ‘담배 피지 마’했죠.”

그가 6주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서 중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면 ‘그러다가 너 대학은 갈 수 있겠냐?’, ‘너 인생 어쩌려고 그러냐?’며 걱정을 했다. 
잘 가르친다는 학원을 옮겨 다니고 저녁 늦게까지 야간자습을 하며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목표밖에 없던 친구들에게 그는 이해하기 어려운 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구였던 것이다.

간디학교는 1학년 때부터 많은 경험을 한다. 
명상에서부터 흙집 짓기, 40일간의 국토순례, 2학년 때는 3개월 동안 호주에 다녀오기도 한다. 
대안학교에서 생활하며 사람들과 만나는 것,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던 그는 점점 달라졌다.

“3년 내내 방학이면 해외로 워크캠프를 가기도 했어요. 
외국에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그 나라의 일을 체험해보는 캠프였는데, 필리핀에서 쓰레기도 줍고 망고를 따기도 하고 그 나라 학생들에게 우리나라 문화를 알려주기도 했죠.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저도 모르게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가고 싶은 학과 교수님 찾아가기

김수강 씨가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는 그에게 『총각네 야채가게』라는 책을 한 권 주셨다. 
그 책을 읽고 난 그는 고3 여름방학 때 ‘총각네 야채가게’가 있는 대치동 은마아파트 앞에 가서 하루 종일 가게를 지켜봤다.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고 신기했다. 
책을 읽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다른 가게와는 사뭇 달라보였다. 
그때 ‘장사가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이 든 그는 조금 더 공부하고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학교는 당시 가장 대안적인 대학교라고 생각되었던 ‘성공회대학교’로 결정하고 전공은 진로상담 선생님과 상담한 후 장사를 배우기 위해 유통 분야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그는 3개월 동안 수능공부에 돌입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하는 공부가 재미있을 리 없었다.

“대안학교 전형이 있다고 해서 찾아봤더니 간디학교는 있는데 ‘간디자유학교’는 전형대상 학교에 올라와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성공회대학교 유통정보학과 교수님께 전화를 해서 한번 찾아뵙고 싶다고 말하고, 찾아갔죠. 
입학을 하려면 수험공부를 하라던 교수님께 대안학교 전형에 왜 우리학교는 없냐고, 5분 면접으로 어떻게 사람을 판단하느냐고 따지듯이 물었어요. 
그 말을 들은 교수님이 그 자리에서 모의면접 자리를 마련해주시더라고요.”

교수님은 그에게 유통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아직 이론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어머니에게 엄청 혼이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매일 대학교 홈페이지를 확인하던 그는 어느 날 대안학교 전형 대상에 ‘간디자유학교’도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헛걸음만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팀 프로젝트나 발표를 할 때 대안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것이라고 기대하던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는 다른 친구들처럼 군대 갔다 와서 토익 공부도 하고 자격증도 준비하면서 평범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트럭을 타고 다니며 계란빵을 팔다

“3학년 2학기 때 ‘생산관리’라는 수업을 듣는데 후배들이 트럭으로 계란빵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그 친구들 장사를 조사하고 분석하다 보니 내가 하면 더 잘할 것 같은 거예요. 
마침 후배들이 트럭을 판다고 하기에 얼른 내가 사겠다고 말해놓고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했죠. 
방학 동안에만 경험삼아 하겠다고 하니 60만 원을 투자하셨어요. 
후배랑 둘이 60만 원씩 120만 원 만들어서 트럭 100만 원에 사고 20만 원으로 재료를 사서 무작정 시작했죠.”

한겨울에 노점으로 시작한 장사.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지, 아무 허가 없이 열었다가 영화에서처럼 단속반이 달려와 막 엎어버리지는 않을지 김수강 씨에게 두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배짱이 좋던 후배가 ‘안 되면 그냥 가면 되지’라고 한 말에 힘입어 첫날 장사를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날 준비해간 것을 다 팔았다. 
‘진짜 하면 되는구나. 우리가 만든 게 팔리는구나’ 싶어 그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침 7시에 나가 지하철역 앞에서 팔기도 하고 아파트 장터에 들어가 팔기도 했다.
공무원 단속에 걸려 범칙금 우편물이 날아오는 날도 있었다.

“운 좋게 학교에 들어가서 계란빵 장사를 할 수 있었어요. 
허가 받기가 무척 힘들었죠. 
경영학과 학생인데 수익의 10%를 기부하겠다고 설득을 해서 겨우 허가를 받아냈어요. 
학교에서 하면 무조건 장사는 된다고 봐야 해요. 
오후 3시까지 장사하다가 친구들에게 아르바이트비를 주면서 장사를 맡기고 수업에 갔다 오곤 했어요.”

처음으로 그가 사람을 고용한 경험이기도 했다. 
5개월 정도 계란빵 장사를 하다가 날씨가 더워져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에 트럭을 팔던 날, ‘가리고리’라는 회사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것을 영상으로 남겨 유튜브에 올려 취업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회사였는데 사람 만나는 일이 좋아졌던 그는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런데 몇 달 해보니 수익구조도 불안하고 앞으로의 비전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다시 장사를 하고 싶었다.

“가리고리 일을 할 때 마케팅 관련 강연을 들으러 갔다가 ‘청년장사꾼’ 대표를 만났어요. 
그 대표가 총각네 야채가게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총각네 야채가게’를 보고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장사를 시작했으며 앞으로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장사꾼을 모집하고 있는데 같이 하자고 제안했어요. 
당장 지원을 했죠.”

4학년 2학기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면 경복궁에 있는 ‘열정감자’라는 곳에서 장사를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달려가야 하는 피곤함도, 임금이 적은 것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그는 손님과 대화하는 것, 손님의 기뻐하는 얼굴을 보는 것, 하나하나 새롭게 배우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계란빵을 팔던 때와는 또 다른 경험이었다. 
장사를 잘하는 친구를 보고 따라하면서 손님들에게 어떻게 말을 걸고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아가게 되었다.

남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너무 두려워, 초등학교 4학년 때 조장으로서 단 한 번 발표를 하기 위해 한 한기 동안 스피치 학원을 다녔던 김수강 씨가 처음 보는 손님들에게 말을 걸고 웃으면서 신나게 장사를 했던 것이다. 
지금도 학교 친구들은 그가 장사를 한다고 하면 의외라며 놀라워한다.

27세, 내 장사를 시작하다

김수강 씨는 ‘청년장사꾼’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의 장사가 더욱 하고 싶어졌다. 
‘청년장사꾼’을 그만둘 때 아버지에게, 자신은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월급을 주고 싶다고 말을 했었던 그였다. 
아버지는 취업해서 자금을 모은 다음에 그 돈으로 창업을 하라고 하셨고 그는 정말 그래 보려고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봤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려고 쓰는 이력서에서 취업하고 싶은 절실함이 묻어날 리가 없었다.
이력서를 쓰는 시간조차도 아까웠던 그는 하루라도 빨리 장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처음에는 반대를 하셨어요. 
계란빵 장사는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아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지만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어요. 
명절 때도 인사만 드리고 나와서 장사를 했고 너무 추웠던 날도 쉬지 않고 나갔어요. 
그때 아버지가 놀라셨던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장사를 하겠다고 하니 장사는 반대하지 않으셨지만 동업은 반대하셨죠.”

그의 의욕은 반대하던 아버지가 먼저 두 손을 들 만큼 대단했다. 
란빵 장사를 하며 모은 돈과 적금 들었던 돈, 그리고 아버지에게 투자를 받아 「대한국밥」 1호점을 시작했다. 
아는 선배와의 동업이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동업은 쉽지 않았다. 
동업을 그만두었을 때 며칠 동안 가게 문을 닫고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그는 아픈 경험을 딛고 현재는 혼자서 ‘대한국밥’을 운영하고 있다.
회사에서 최연소 점주지만 계속 매출이 오르고 있고 혼자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프랜차이즈로 창업을 시작한 것이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조만간 다시 자신만의 장사를 시작할 계획으로 현재 열심히 영업 하고 있다.

“가맹점이라고는 하지만 1호점이라서 그런지 본사에서 레시피만 주고 아무 지원이 없었어요. 
새벽 2~3시까지 무를 썰고 깍두기를 담그다가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허다했죠. 
나이가 든 이모들을 고용하면 편할 거라고 주변에서 이야기했지만 저는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일하는 게 좋아요. 
아이디어가 나오거든요. 
복날이면 수박 돌리기를 한다든지 남은 소주도 보관해 준다든지 뭐 그런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죠. 
또 제가 계획하고 있는 요리가 있으면 쉬는 날 친구들이 먹어 보고 이야기를 해줘요. 
손님들에게 서비스하고 싶으면 뭐든 하라고, 그런 권한도 주고요.
주 5일제로 근무하도록 하고 아르바이트생보다는 직원을 채용하려고하죠.”

독학으로 하나하나 배워야 했던 시기는 정말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해 헤쳐 나왔다. 
조금씩 체계를 갖춰가는 지금은 차별화된 경영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최종목표는 장사를 잘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당신은 행복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 행복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147&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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