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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북극에 가면 행복해지는 과학자


이유경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

“중학교 선생님, 선배 과학자 그리고 하나님.”
극지연구소의 이유경 책임연구원(46·북극환경자원연구센터)이 자신을 과학자의 길로 이끌어준 이들이라며 꼽아준 세 존재다. 
어린 시절 과학이 좋아 막연하게 ‘퀴리 부인’을 롤모델로 삼았던 이유경 박사는 이들과 만나며 진정한 과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과학반에 들어가다

자신을 ‘내향적인 성격’이라고 소개한 이 연구원의 초등학생 시절은 의외로 활달함의 연속이었다. 
한 마디로 ‘잘 놀고 이곳저곳 열심히 다녔던’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이 박사는 “밴드부에서 아코디언 연주도 했다”며 “경기 성남에 살았는데 혼자 버스 타고 서울에 있는 과학관에 다녀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대학교라는 걸 잘 몰랐어요.” 뜻밖의 고백이었다.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과외나 학원 한번 안 다녔고(당시에는 정부의 ‘과외 금지’조치로 그런 학생들이 많았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배치고사라는 것도 모르고 무작정 시험까지 봤다는 것이다.

“그래도 성적이 좋아지면 부모님이 기뻐하고, 선생님이 더 예뻐하는 것을 보고 중학교 들어가서는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진로는 조금 엉뚱하게 정해졌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동아리를 정하는 시간이었는데 과학 선생님이 오시더니 “넌 과학반”이라고 하셨다. 
“과학이 뭔지도 잘 모르고 과학반에 들어간 거지요. 
만일 음악 선생님을 먼저 만났다면 지금쯤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엉겁결에 들어간 과학반은 동아리 활동을 제대로 하는 곳이었다. 
1학년 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매일 실험실에 가서 실험을 했는데 3년 동안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실험을 했다.

“우연히 과학반에 들어갔지만 결국 성격이나 적성이 맞았으니 계속한 거겠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과학이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과학자가 되어야겠다 생각하고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알아봤어요. 
그때 처음으로 대학교를 가야 한다는 걸 알게 됐지요. 
그 다음부터는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지요.”

전공으로 생물(식물)을 선택하게 된 과정도 우연이 많이 작용했다.
이 박사는 고등학교때 물리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물리를 전공으로 해야 할지는 자신이 없었다. 
과학경시대회가 열렸는데 학교에서 분야별로 학생들을 보내게 됐다. 
“당시 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제가 전공했으면 하는 분야로 뽑혔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했어요. 
그때 생물로 뽑혔고, 마음속으로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죠. 
결국 서울대 생명과학부(당시식물학과)로 진학하게 됐어요.”

다들 분자생물학을 선택할 때 홀로 해조류를 연구하다

이 박사가 대학에 들어간 1987년은 민주화운동이 한창 거셀 때였다.
많은 학생들이 시험을 거부하고 시위에 참가할 때였다. 
“대학교에 들어와 사춘기가 왔다”며 웃는 이 박사는 한동안 책을 놓았다가 3학년이 되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면접을 볼 때 이 박사는 ‘왜 생물학과로 지원하게 됐나’라는 질문에 “유전공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지원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외웠던 대답을 말한 거지만 실제로 이 박사는 처음엔 유전공학에 호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사촌오빠에게서 “대학교에 가면 유전공학이나 컴퓨터공학을 공부하라”는 말을 들은 뒤 유전자를 조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교 3학년때 다시 전공 공부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관심을 끌었던 것은 해조류였다.

“생물을 유전자 수준에서 잘게 쪼개어 보는 것보다 개체 하나로, 생태계 전체로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죠. 
특히 해조류를 키우는 실험을 했는데 너무 예뻤어요. 
해조류의 형태는 바닷속에 있을 때와 실험실에 가져와 키울 때가 많이 달라져요.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많은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뜻인데 이런 모습을 보며 해조류에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
다른 친구들은 대학원에 진학하며 주로 분자생물학을 했지만, 저는 홀로 해조류를 공부하게 됐죠. 
특히 해조류의 성(sex) 분화를 연구하고 싶었어요.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 도전한 셈이죠.”

호기롭게 말하던 이 박사는 “후회를 조금 하긴 했다”며 “남들이 안 한 부분을 했더니 고생을 많이 했다”고 웃었다. 
석사 과정까지는 괜찮았단다.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해조류에 대해 썼던 논문이 좋은 학술지에 발표돼 자신감도 가졌다. 
그러나 중간에 분자생물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시련이 닥쳤다. 
이 박사는 “지도교수의 권유로 분자생물학을 공부하게 됐는데, 제가 있던 실험실에 아무도 분자생물학을 전공 하지 않아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다. 
전문적인 이야기지만 분자생물학을 하려면 일단 세포 안에서 DNA를 뽑아내야 하는데 해조류는 다당류가 너무 많아 DNA를 뽑아내기 어려웠다. 
더구나 해조류를 키우는 데만 3개월이 걸리기 때문에 실험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계속 실패하면서 갈등이 많았어요. 
박사 과정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세계적으로도 가지 않는 길을 제가 가는 바람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은 거죠.”

과정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 박사는 “겸손해졌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 전에는 모든 일이 쉽게 잘 됐기 때문에 ‘내가 도전하면 다 되는 거다’라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도전해도 안 되는 게 있더라고요. 
절망을 많이 하면서 겸손해졌죠.”

실험실에 박사 연구원(포닥)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실험방법을 알려주면서 다행히 해조류에서 DNA와 RNA를 추출하게 됐다. 
그토록 찾고 싶어 하던 해조류의 성 분화와 관련된 유전자도 찾아내 논문까지 발표하고 졸업까지 하게 됐다.

출산을 4달 앞두고 직장을 구하다

박사 학위만 받으면 문이 활짝 열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결혼을 하게 됐는데, 직장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신까지 하게 됐다. 
모든 여성 과학자들이 겪는 문제였다. 
배가 점점 불러오는 이 박사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다시 기도를 하게 됐어요.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었을 때는 무언가 계획이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불평만 했구나,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당시(2000년) 갑자기 정부에서 여성만을 위한 ‘유망 여성 과학자’라는 연구과제가 시작됐다. 
여성들이 취업에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하니 일단 연구소에서 여성 과학자를 채용하면 나라에서 일정 기간 월급을 주고, 그 뒤에 정말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면 정식 채용을 하게 하는 제도였다. 
여성과학자를 위한 좋은 제도였지만 이 박사가 ‘임신’한 상태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몇 달 뒤면 아이를 낳으러 갈 이 박사에 관심을 가져 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때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센터(나중에 극지연구소로 독립)의 이홍금 책임연구원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같은 여성이고 선배였기에 이유경 박사의 고민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제가 채용된 게 9월이었는데 4달 뒤인 12월에 제가 아이를 낳았지요. 
처음 넉 달도 아무래도 임신한 몸으로 최선을 다하기는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그런 상황을 다 이해해 주신 거예요. 
지금도 이홍금 전 소장님께 정말 고마움을 느낍니다.”

육아 역시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남편도 많이 도와줬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첫 아이는 친정에서 많이 도와줬다”는 이 박사는 “어린 아이들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육아시설이 사회적으로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정말 많이 일하기를 원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임신, 육아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입니다.”

화성 생명체 밝혀내고 싶어

인생의 고비를 넘겨가며 지금은 극지연구소에서도 꽤 인정받고 있는 이 박사에게 과학자로서 목표를 물었더니 “우주에도 생물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푸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엉뚱하다 생각했는데, 극지연구가 그런 궁금증과 아주 관련이 깊다는 것이 이 박사의 주장이다.

“달이나 화성에 과거 외계 생명체가 있었다면 최소한 땅속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지금도 깊은 땅속에는 살고 있을지 모르지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도 조만간 화성에서 토양을 파서 흙을 가져오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텐데 그 샘플을 저도 분석해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 과정이 극지에서 토양을 연구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화성이나 달의 토양은 동토인데, 극지에서도 동토를 뚫어 샘플을 채취한 뒤 미생물 등을 조사하거든요.”

실제로 이 박사는 내년에 국제 우주생물학회에 가서 NASA의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볼 계획이다. 
지금부터 미리 참여하기 위해서다. 
이 박사는 “중학교 때 블랙홀에 대해 읽은 글이 마음 한켠에 계속 남아있는 것 같다”며 웃었다(이 박사는 그렇잖아도 과학동아 2014년 7월호에 화성에서 토양 미생물을 분석하는 연구에 대해 흥미로운 글을 쓰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가 우주만 생각하고 있는 건 물론 아닙니다. 
지금은 환북극, 그러니까 북극을 둘러싸고 있는 영구동토층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어요. 
기후변화가 일어나면서 기온이 가장 변한 곳이 환북극입니다. 
국 알래스카, 그린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캐나다 극지 등이죠. 
몇 년 전부터 알래스카에 매년 연구팀을 보내 꾸준하게 연구하고 있는데 이걸 그린란드, 캐나다, 시베리아 등으로 확대하는 게 목표입니다. 
동토층이 녹으면서 식물이 어떻게 변하는지, 토양에서 탄소가 더 많이 배출되고 있는지, 그곳에는 어떤 미생물이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연구과제예요.”

이 박사는 이런 연구를 위해 최근에 새로 공부하게 된 책이라며 뜻밖에 통계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도서를 보여줬다. 
생태계 전체를 연구하다보니 통계학이 필수가 됐고, 요즘은 생물학에서 빅데이터를 다루는게 매우 중요해져서 컴퓨터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저는 공부가 재미있어요. 
새로운 것을 알아갈 때 흥분도 되고요. 
통계학이 어렵다고 하지만 저는 재미있더군요. 
새로 나온 좋은 논문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이처럼 새로운 공부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 것은 이 박사가 평생 해온 일과 같았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면 제가 현재 이런 일을 할 거라고 계획을 세우고 온 것은 아닙니다.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졌던 선택의 순간에서 ‘일단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해봤죠. 
처음에 해조류를 전공했지만, 미생물을 해야 했어요. 
‘어떻게 하지’하고 걱정만 했다면 못 했을 거예요. 
대신 ‘그래, 미생물 한번 해보지’ 하고 시작했죠. 
지금도 생태학이라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를 하고 있지만 역시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계속 공부를 하고 현장에 나가고 있어요. 
앞으로 세상은 점점 자기가 안 해봤던 것들이 올 겁니다. 
더 이상 익숙한 것만 하고 살 수는 없어요. 
사실 이렇게 도전하는 게 편하지는 않지만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과학자가 된 이유

이 박사는 평소에도 책 읽는 걸 좋아한다. 
기자가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말해줬더니 바로 메모를 한다. 
침대와 화장실이 책을 많이 읽는 장소란다. 
아이를 낳으면서 어떻게 양육을 해야 할 지 몰라 육아 서적을 읽게 된 게 책을 읽게 된 계기라고 하는데 이제는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자본주의(EBS)’일 정도로 분야가 넓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일부분이고, 내가 살아가면서 진짜 필요한 것들이 책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틈틈이 책을 읽는 이유다.

이 박사에게 인생에 도움이 되었던 책 하나를 물었더니 ‘남편 성격만 알아도 행복해진다’라는 책을 들었다. 
“사람은 타고난 성격이 다 다르다는 내용이에요. 
남편과 아이들, 동료 연구원들 모두 나와 타고난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왜 저러지?’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럴 수도 있지!’ 하게 됐죠.” 
이 박사의 큰 아이가 음악을 하고 싶어 한단다. 
처음엔 ‘음악을 전공해서 뭘 하려고?’ 했다가 이제는 아이의 꿈을 인정하고 음악과 관련된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 출퇴근 때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저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아요.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아 학원에 보내야 하나 고민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학교와 도서관에서 혼자 끝까지 해보라고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너무 내몰리고 있어요. 
물론 제 경험을 봐도 암기식 공부가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거에 내몰려서 불행하게 공부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이 말을 하며 이 박사는 “은퇴를 한 뒤에는 교육과 관련된 봉사를 하고 싶다”며 “내 이웃을 행복하게, 특히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소박한 꿈을 밝혔다.

이 박사의 연구실에는 여성 연구원이 많았다. 
자신도 선배 과학자에게 도움을 받았던 만큼 여성 과학자를 좀 더 많이 키우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이 박사가 이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것은 ‘호기심’이다.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라는 것이다. 
이 박사는 “생물학자는 물리학이나 수학에 비해 천재성이 덜 필요한 것 같다”며 “호기심이 있고 성실하다면 누구나 좋은 생물학자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생물학은 직접 손으로 실험을 잘 해야 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을 많이 도운 사람들이 실험을 잘 하는 것 같다며 설거지와 청소가 연구에 좋다는 독특한 관점을 들려줬다.

“사실 저도 부모님께서는 의대나 한의대를 원하셨어요. 
경제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의사가 더 좋았겠죠. 
하지만 제 성격엔 안 맞을 것 같아요. 
1년 내내 환자만 보고 있으라니요. 
지금처럼 1년에 3주씩 북극에 가서 자연 속에 있다 오는 게 너무 좋습니다. 
아까 과학자가 된 이유 물어보셨죠? 
이렇게 재미있는 게 또 어디 있나요.”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999&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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