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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분야

(대안학교) 많은 것에 가능성을 두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재영 농부

이재영씨는 국내에 세워진 7개의 간디학교(대안학교) 중, 3번째로 세워진 금산 간디학교의 첫 번째 졸업생이다. 
중학생 때 방황을 하기도 했던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지향하며 독립을 꿈꿨다. 
학교 졸업과 군 제대 후 그는 다수의 아르바이트와 간디학교 근무 등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농사일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농약을 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농사법을 추구하는 친환경농부이자 간디학교에서 농장수업을 하고 자전거를 통한 여행 프로젝트를 이끄는 강사이기도 하다. 
다양한 경험과 과정을 경험한 그의 이야기는 그의 인생만큼이나 스펙터클했다.

처음엔 대안학교에 절대 안 간다고 했죠

김해에서 살던 중학생 재영씨의 자유분방한 생활은 늘 부모님을 걱정케 하는 문젯거리였다. 
평범히 김해의 고등학교를 진학하려던 그와는 달리 그의 부모님은 대안학교에 관심이 많았다.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소개된 간디학교를 알게 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대안학교 진학을 권유했다. 
싫다는 아들과 한번이라도 가보자는 아버지의 치열한 싸움 끝에 재영씨는 입학 전 대안학교를 체험해보는 예비학교 캠프를 찾았다. 
원래는 경남 산청에 세워진 간디학교를 지원했지만 떨어지고서 그가 가게 된 곳은 금산에 있는 간디학교였다. 
체험예비학교에 와서도 그의 계획엔 대안학교 진학은 전혀 논외의 일이었다. 
그저 3박4일간 또래 아이들과 재밌게 놀고 가는 것뿐이라는 그의 생각은 캠프가 끝나갈 때 바뀌었다.

“밥 해주는 아줌마, 청소해주는 아줌마들이 몇 분 있을 뿐 학교에 선생님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런데 캠프를 마치고 돌아갈 때 그 분들이 선생님이란 걸 알게 됐죠. 중학교 때 선생님들은 전혀 살갑지 않고 권위적으로 거리를 두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정반대의 선생님이란 걸 알고서 감동을 받고 대안학교에 가야겠단 결심을 했죠.”

대안학교 1년 만에 그만두려 했어요

금산 간디학교에서 그는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통해 친구들과의 유대감도 늘어났고, 선생님들하고의 거리감도 없었기에 어른들과의 관계에서도 익숙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재영씨의 입학과 맞물려 신설된 금산 간디학교는 그 당시 학교 건물 자체가 없었다. 
폐교를 빌려서 한 달 지내기도 하고, 한 달 간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등 힘든 경험을 즐거움으로 생각했던 재영씨는 학교를 다닌 지 1년 만에 간디학교를 더 이상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간디학교가 좋긴 했지만 자신감이 생겼으니 이제 일반학교에 돌아가 학교 선생님들의 부당한 체벌이나 잘못된 시스템을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고향(김해) 친구에게 부탁해 주유소 일자리도 구했죠.”

1년 동안 자유분방하게 거침없이 살았으니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아들의 선언을 부모님은 크게 반대했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학교를 안 가는 대신 한 달 동안 지정해준 작업장에서 일을 하라고 말했다. 
그곳은 아버지 지인이 김해에서 운영하는 돼지 농장이었다. 
간디학교에는 체험학습을 한다 말하고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돼지 농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의 일은 그가 여태까지 해왔던 일중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케이지 안에 갇힌 80마리의 돼지 냄새는 코가 아플 정도로 지독했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거의 해외 이주 노동자들로(주로 중국의 한족, 연변족) 각종 사건사고가 비일비재했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혼자 직원 기숙사에서 지내는 일이란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그가 한 달의 일을 마치고 돈을 벌어 새 옷을 입고 찾아갔던 금산 간디학교의 친구들과 선생님은 재영씨를 환대해주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서 자신이 있을 자리가 그곳임을 깨닫고 학교에 남았다.

스무 살의 가장 큰 목표는 경제적 독립이었어요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신청한 인턴십에서 방송 코디네이터들을 따라다니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패션 관련 학과에 진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대학이란 곳은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기에 지금은 안 가고 싶다고 결론지은 그가 졸업 후 한 것은 돈을 버는 일이었다.

“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한 수순으로 독립을 하더라고요. 
그게 멋있어 보였고 제 자신도 진짜 그렇게 하고 싶었죠.”

목수 일, 레스토랑 서빙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통해 800만원을 모은 그는, 부모님이 만들어준 고향이 아닌 자신이 직접 고향을 만들겠단 생각으로 평소 좋아했던 대구에 내려가 일을 하기도 했다.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하든지 전문적으로 한다는 직업 정신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뚜렷한 진로는 없었지만 자신의 커다란 목표를 위해 다양한 경험을 쌓던 그는 국가의 부름을 받아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군 입대를 해야 했다. 
그때까지 남자들의 상하 관계나 유대 관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는 군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고 군대 시스템 안의 자신을 보는 게 익숙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긍정적인 성격으로 그는 무사히 전역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셋에 군 제대 후 사회에 나온 그는 간디학교 법인 쪽에서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법인에서 일을 하던 그는 법인에서 준비하는 필리핀 해외 캠프 자원 봉사를 떠나게 됐다. 
필리핀에서 1학기를 경험한 그는 사람이 필요하단 말에 법인을 그만두고 산청간디중학교의 해외이동학습 자원봉사 사감으로 한 학기를 더 보냈다. 
디학교 법인에서 일을 하던 그는 간디학교에 교사로 부임해있던 현재의 아내를 만나는 행운을 만나게 되었다.

군 제대 후 주변 사람들이 먹거리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이 뭘 하면 좋을지,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그는 전역 후, 주변 사람들의 먹거리 얘기에서 진로에 대한 힌트를 찾았다.

“군 입대 전까지 농사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생협, 친환경 먹거리 같은 단어는 생소한 단어였죠. 
그런데 전역을 하고서 사람들을 만나면 먹거리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산청 간디학교에서 기숙사 사감을 하던 그는 산청에 있는 500평 정도의 논농사를 해보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농사짓기를 결정했다. 
스물다섯 살에 처음 시작한 논농사는 아직까진 현실적으로 수익을 얻기 힘든 구조이지만 그는 농부가 돈이 안 되기 때문에 기피 직업으로 여겨지는 것에는 부정적이었다.

“사람은 죽지 않는 이상 먹어야 살고, 내가 건강한 먹거리를 만들어 팔면 그것이 안정적인 돈을 버는 블루오션이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 사람들은 건강한 먹거리를 찾아서 먹으려고 하더라구요. 
한하단 생각을 하며 농사를 시작했어요. 
그런데 농사를 하면서 먹거리와 농사라는 것이 연결되어 있단 것을 알았죠. 
농사를 하면 쉬운 수확을 위해 약을 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유기농이 힘들지만 결국 소비자는 그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재영씨와 같은 농부들이 적은 양을 농사짓더라도 제 값에 팔려면 로컬 푸드를 사용하는 수요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는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 직접 생산해서 실제 소비자들에게 전해지는 접점을 만드는 사이클을 운영하고 싶단 생각을 밝혔다. 
작은 시골에서의 삶은 그에게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시켰다.

“요즘은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어서 시골 땅 값이 계속 올라가고 주택난도 심해요. 
이런 문제점을 실생활에서 계속 부딪히다 보니 내가 도시에 살면 전혀 관심도 없을 그런 것들이 내 삶의 부분들로 계속 신경 쓰이게 되죠. 
시골에서 살다보니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다 같이 잘 됐으면 좋겠더라고요. 
젊은 친구들과 함께요.”

시골에서 젊은이들에게 농사를 지으러 오라고 하지만, 막상 실질적으로 자립기반이 되는 도움은 정작 받기가 어려웠던 그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젊은이들의 시골 정착에 대해서도 아직 많은 개선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많은 것에 가능성을 두고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간디학교가 아니었다면 농부를 하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그만큼 제 인생에 있어서 간디학교가 많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를 다닐 땐 의도치 않게 빈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제 생각도 하고 여러 가지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죠.”

비워진 시간동안 진로나 자신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현재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였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얘기하잖아요. 
네가 진짜 하고 싶은 거를 하고 뭐든 좋으니 적성을 찾아보라고. 
꿈 자체가 없는 애들이 많은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혼란스럽죠. 
내가 진짜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으니. 
많은 부분을 열어놨으면 좋겠어요. 
대안학교나 일반학교의 구분 같은 것 없이, 내가 또 남들을 따라하는구나 같은 생각 버리고 다양하게 열어놓고 도전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도시에 모든 기준을 두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많은 부분을 열어놓고, 시골에도 많은 기회가 있단 것에 눈을 뜨면 좋겠다는 생각도 밝혔다. 
도시에서 해야 되는 일을 반대로 시골에서 한다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일 수도 있단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자신의 경쟁력이라고 자부하였다. 
수 십 년 뒤, 지금과는 확연히 다를 자신의 미래를 기대한다 말하는 그의 두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146&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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