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슬이 한번 울리면 전반전 시작이고, 두 번 울리면 하프타임 시작이기 때문에 선수들이 들어가는 시간 2분정도를 기다렸다가 뛰어 들어가서 묘기를 선보였어요.
카메라들도 특별히 잡을 것이 없으니까 저를 찍기 시작한 거예요.
저를 막으려고 하다가도 관중들이 좋아하니까 잡지도 못하고 후반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다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외국인 기자가 저와 인터뷰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전 세계에 제 존재를 알렸습니다.”
이태리행 비행기를 탔던 것이 제 운명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희용씨는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따라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혼자 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마침 신문에 난 국가대표 여행사 광고를 발견한 그는 여행사에 전화했다,
“무작정 전화해서 혹시 티켓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스탭 중 한명이 부친상을 당해서 한자리가 남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제 운명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만약 그때 비행기 티켓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제가 뭘 하고 살고 있을지 상상이 안돼요.
지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반인들도 그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거였지만요.”
그렇게 이태리로 떠난 그는 3전 전패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혼자 남아 도시를 돌며 경기를 보고, 또 개인기 공연을 했다.
사람들은 그의 공연을 보며 동전을 던져줬다.
“처음에는 공연에 방해가 되어 동전을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6강전을 하던 기간중에 나쁜 집시를 만나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뺏겼어요.
당장 먹을 것도 살 수 없게 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죠.
그때 문득 제가 공연을 할 때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로마공원으로 간 그는 가운데 모자를 두고 공연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운 좋게도 경찰도 그 자리에 없었다.
어쩌면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경찰이 보고도 그냥 봐줬는지도 모르겠다며 희용씨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빵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생활이 한 달을 이어졌다.
그러던 중 이태리의 한 마을 페루지아로 간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유학생은 그가 헤딩으로만 5시간 6분 30초의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재즈 페스티벌로 굉장히 유명한 페루지아에서 돈을 모았다.
한국 축구성적이 좋지 않은 그 때 희용씨는 당시 유명했던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마라도나 못 지 않게 한국인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했다.
프리스타일 축구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박영길 회장님께서 저를 잘 봐주셔서 영상도 찍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그리고 제게 한 사람을 소개시켜주며 독일로 가보라고 권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독일로 가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 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다음날 경기가 열리는데 경기 전에 오프닝 세레머니를 하라’고 하더군요.”
독일에서의 첫 공연이 인연이 되어 그 사람은 희용씨의 매니저가 됐다.
그가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공연이 들어왔다.
시간이 날 때면 독일슈트트가르트 시내를 돌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90년대 초반 독일에서 5~6년간 활동을 통해 유명인사가 됐다.
사람들은 그를 ‘풋볼아티스트’라고 불렀다.
공연으로 번 돈을 부모님께 보내드리며 독일에서 생활하던 그는 프리스타일 축구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94년 월드컵이 개최될 미국으로 무작정 향했지만 막상 가보니 그곳에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축구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공연으로 돈을 벌기 어려웠어요.
주유소 같은 곳에서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축구 지도자로 스카우트 되어 낮에 축구코치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LA에서 그렇게 1년을 있었는데 누군가 라스베가스로 가서 쇼를 해보라고 하더군요.
라스베가스에 가서 비디오 영상을 만들어 계속 돌렸고 한군데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사람은 남미에서 저글링을 하던 사람인데 같이 하와이에서 공연을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저녁에 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차차 알려지게 되면서 연봉10만 달러의 좋은 조건의 축구 지도자 제안도 받았다.
한국은 지도자 경력이 있어야만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었지만, 이미 훌륭한 지도자가 많았던 상황이었다.
그는 그런 지도자 중에 한명이 되기보다는 프리스타일 축구의 창시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축구 종가 영국을 간 희용씨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고, 거리공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한 사람의 열정이 세계적인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2003년도가 되자 세계적인 유명한 브라질 축구스타 호나우지뉴가 제게 사인을 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호나우지뉴와 제가 대결하는 광고를 촬영하며 만났죠.
나이키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그 회사는 젊은 세대들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회사였어요.
나이키 광고 이후에 세계적으로 프리스타일 축구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도 세계최초로 네덜란드에서 프리스타일 축구 대회가 열렸다.
우승을 거머쥔 사람은 다름 아닌 희용씨였다.
그는 유명 축구선수 못지않은 유명인이 되었다.
그 이후로 세계대회에 도전하고, 또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살아왔다.
외국 생활을 계속해나가던 그는 2008년 프리스타일 축구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세계프리스타일 축구연맹 회장이 되어, 프리스타일 축구 창시자로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모님께선 제가 성인이 된 후에는 저에게 ‘해라.’, ‘하지 마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20년 정도를 하다 보니 프리스타일 축구가 세계적인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150개국에서 프리스타일 축구가 열리고 있고 각 국마다 몇 천 명씩 하고 있죠.
한 사람의 열정이 세계적인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마음과 열정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어요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며 세상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또 아름다운 기여를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생을 사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저의 최종 꿈은 프리스타일 축구가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되는 겁니다.
물론 축구 발전에도 기여하고 싶고요.
만약 프리스타일 축구가 올림픽종목으로도 만들어지고, FIFA(국제축구연맹) 못지않은 단체로 만들어진다면 저는 제 꿈을 이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용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축구가 아직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꿈이 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공을 선물하고, 그들이 어디서든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 그것은 그의 또 다른 꿈이자 목표였다.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만 있으면 할 일은 널려 있습니다.
아직 목표설정을 하지 못해 방황하는 것뿐이지 목표와 관심만 있다면 세상에 못할 것은 없죠.
나름대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하고, 거기에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