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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멈출 수 없는 축구 열정, 묘기 축구의 황제를


우희용 세계프리스타일 축구연맹 회장

1989년 우리나라 최초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람이 있다. 
단 한 번도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은 채 헤딩으로만 5시간 6분 30초의 기록을 세운 묘기 축구의 달인 우희용씨의 이야기이다. 
는 2009년 바다 위를 가르는 17M 다리를 건너며 세운 4시간 46분 34초의 기록으로 20년 만에 자신의 기록을 갱신했다.

프리스타일 축구 묘기로 예술가의 경지에 오른 희용씨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축구를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의 인생은 갑작스런 축구부의 해산과 선수를 포기해야할 정도로 심각했던 부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고, 그를 묘기축구의 달인이자 프리스타일 축구의 창시자로 만들었다.

축구에 대한 저의 강한 의지를 누구도 말릴 수는 없었어요

희용씨는 1남 4녀 중 장남으로, 경기도 하남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전 학년이 4개 반밖에 되지 않았던 작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그 때, 그는 한 동네에 살던 형으로 인해 축구를 시작했다. 
당시 축구선수였던 동네 형은 그에게 축구를 가르쳐줬고, 곧잘 따라하는 그에게 자신의 유니폼을 입혀 축구시합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6학년이 되던 해 하나뿐인 아들을 공부시키겠다는 부모님의 성화에 희용씨는 서울의 남구로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됐다. 
그는 축구에 열심인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부모님께 ‘더 이상 축구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전학 일주일 만에 축구부를 발견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사실 처음에는 그 학교에 축구부가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1주일쯤 지난 뒤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축구부가 연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 다시 축구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어요. 
그 이후로 집에 가도 공부도 안 되고 머릿속에는 온통 축구 연습하는 모습만 떠올랐어요. 
공부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던 거죠. 
한두 달 정도 참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싶어 코치님한테 가서 축구를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일주일정도 테스트를 하더니 같이 연습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동안 쌓아온 실력이 있었던 그는 축구 실력만큼은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그가 약속과는 달리 여전히 축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다.

“저희 어머니는 장남이라고 늘 챙겨주시기 바쁘셨는데, 아버지는 군대생활을 오래 하셔서 그런지 엄하신 편이었어요. 
아버지는 제가 축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고는 제가 연습하고 있는 학교로 쫒아 오셔서 코치님을 막 혼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다음날 또 축구연습을 하러 갔어요. 
부모님이 축구에 대한 저의 강한 의지를 말릴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부모님이 조금씩 도와주시기도 하셨어요.”

중학생이 된 그는 강서중학교에서 3년 간 더욱 열심히 연습에 임했다.
축구부 연습이 끝나면 개인운동을 했고, 새벽 5~6시부터 혼자 연습을 했다. 
선배들의 구타와 체벌이 많던 시절 함께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그만두는 와중에도 희용씨는 끝까지 참고 버텼다지만, 전국대회나 서울시대회의 4강에 들지 못 한 그의 팀으로 인해 그는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구타가 심해지면서 그는 시흥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야만 했다.

TV에서 브라질 축구선수 펠레와 우리나라 김용식 선수가 공을 가지고 묘기를 부리는 것을 보게 된 희용씨는 공을 가지고 노는 연습을 하면서 개인기 연습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매일 3~4시간씩 연습을 하고, 밤이 되면 가로등 밑에서 연습을 했다. 
허정무 선수의 축구묘기를 선보이던 <이것이 한국 제일>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1등을 하기도 했다.

축구부 해산과 무릎 부상으로 축구를 쉬어야 했을 때
사형선고를 받은 것 같았죠

“당시 지도자는 건국대학교 대학원과정을 마친 분으로 기억을 하는데 학구파였습니다. 
무조건 축구만 시킨 것이 아니라 유연성훈련도 시키고 공부도 시키면서 체계적으로 배웠어요. 
그렇게 겨울에 합숙훈련을 하면서 잘 담금질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외인구단처럼 전국에서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선수들이 뭉쳐서 준비를 했는데 고3 3월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어요. 
축구부가 없어진다는 소식이었죠.”

학교 이사장님이 바뀌면서 탁구부만 남겨두기로 하고 축구부를 없애겠다고 했다.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당시 다른 친구들에 비해 2살이 많았던 그를 받아주는 학교 축구부는 없었다. 
그는 대학 진출을 해야 했으나 그 현실 역시 굉장히 암담했다. 
렇게 혼자 남은 그는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도 운동을 쉬지 않았다. 
한발 계단 뛰기, 줄넘기 등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서 했다.

“무릎이 아픈 걸 느꼈는데 참고 계속 했어요.
그러다가 통증이 가라앉질 않아서 병원에 갔더니 운동을 그만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연골이 거의 찢어져 있어서 걷지도 뛰지도 말고 쉬어야 한다고요. 
사형선고를 받은 거죠. 그렇게 1년을 쉬었습니다. 
1년 후에 다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반 정도 붙었다고 하기에 그때부터 다시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뛰지는 못하니 공을 가지고 노는 연습을 했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에 제 존재를 알렸죠

축구를 할 수 없게 된 이상 축구를 하기 위해 들어갔던 고등학교에 그가 남을 이유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군입대 영장이 나왔다. 
군대에서도 시간만 나면 축구 연습을 했지만, 이미 그는 한국에서 축구선수로 활동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는 전역을 하고 고등학생 시절 출연했던 <이것이 한국 제일>에서 만나 인연이 되었던 허정무 선수를 찾아갔다.

“외환산업이라는 곳에 일자리를 얻어서 월급 17만원을 받으며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 평균 월급이 30만원이었던 것과 비교해 적은 월급이었죠.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하기는 했지만, 17만원 받는 제 인생이 너무 암담했어요. 
부모님도 모시기 어려웠고요. 
축구는 텃새도 심하고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일을 하면선도 쉬는 시간이 있으면 운동을 했고, 일을 끝마치고 서도 또 다시 운동을 했다. 
3년 반 정도 돈을 모으며 외국으로 나가는 꿈을 키워나가던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축구결승전이 있던 날, 대형사고에 가까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폐막식 참석을 위해 대통령 입장이 예정되어 그 어느 때보다도 삼엄했던 경계 속에서, 그는 양복차림에 선글라스를 끼고 당당하게 문을 통과했다. 
들어가자마자 화장실로 숨어들어간 그는 옷을 갈아입고 바깥 소리를 살피며 전반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묘기축구를 선보이게 되는 순간이었다.

“휘슬이 한번 울리면 전반전 시작이고, 두 번 울리면 하프타임 시작이기 때문에 선수들이 들어가는 시간 2분정도를 기다렸다가 뛰어 들어가서 묘기를 선보였어요. 
카메라들도 특별히 잡을 것이 없으니까 저를 찍기 시작한 거예요. 
저를 막으려고 하다가도 관중들이 좋아하니까 잡지도 못하고 후반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다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외국인 기자가 저와 인터뷰를 하더라고요. 
그렇게 전 세계에 제 존재를 알렸습니다.”

이태리행 비행기를 탔던 것이 제 운명의 터닝 포인트였어요

희용씨는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따라 해외로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혼자 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마침 신문에 난 국가대표 여행사 광고를 발견한 그는 여행사에 전화했다,

“무작정 전화해서 혹시 티켓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스탭 중 한명이 부친상을 당해서 한자리가 남는다고 하더군요. 
그게 제 운명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만약 그때 비행기 티켓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제가 뭘 하고 살고 있을지 상상이 안돼요. 
지나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반인들도 그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거였지만요.”

그렇게 이태리로 떠난 그는 3전 전패한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혼자 남아 도시를 돌며 경기를 보고, 또 개인기 공연을 했다. 
사람들은 그의 공연을 보며 동전을 던져줬다.
“처음에는 공연에 방해가 되어 동전을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6강전을 하던 기간중에 나쁜 집시를 만나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을 다 뺏겼어요. 
당장 먹을 것도 살 수 없게 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죠. 
그때 문득 제가 공연을 할 때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줬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로마공원으로 간 그는 가운데 모자를 두고 공연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운 좋게도 경찰도 그 자리에 없었다. 
어쩌면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상황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경찰이 보고도 그냥 봐줬는지도 모르겠다며 희용씨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빵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런 생활이 한 달을 이어졌다. 
그러던 중 이태리의 한 마을 페루지아로 간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한국인 유학생을 만났다. 
유학생은 그가 헤딩으로만 5시간 6분 30초의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재즈 페스티벌로 굉장히 유명한 페루지아에서 돈을 모았다. 
한국 축구성적이 좋지 않은 그 때 희용씨는 당시 유명했던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마라도나 못 지 않게 한국인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했다.

프리스타일 축구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꿈이 생겼어요

“박영길 회장님께서 저를 잘 봐주셔서 영상도 찍고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그리고 제게 한 사람을 소개시켜주며 독일로 가보라고 권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독일로 가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 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면서 ‘다음날 경기가 열리는데 경기 전에 오프닝 세레머니를 하라’고 하더군요.”

독일에서의 첫 공연이 인연이 되어 그 사람은 희용씨의 매니저가 됐다. 
그가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공연이 들어왔다. 
시간이 날 때면 독일슈트트가르트 시내를 돌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는 90년대 초반 독일에서 5~6년간 활동을 통해 유명인사가 됐다. 
사람들은 그를 ‘풋볼아티스트’라고 불렀다. 
공연으로 번 돈을 부모님께 보내드리며 독일에서 생활하던 그는 프리스타일 축구를 전 세계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94년 월드컵이 개최될 미국으로 무작정 향했지만 막상 가보니 그곳에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미국에서는 축구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공연으로 돈을 벌기 어려웠어요.
주유소 같은 곳에서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축구 지도자로 스카우트 되어 낮에 축구코치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LA에서 그렇게 1년을 있었는데 누군가 라스베가스로 가서 쇼를 해보라고 하더군요. 
스베가스에 가서 비디오 영상을 만들어 계속 돌렸고 한군데에서 전화가 왔어요. 그
사람은 남미에서 저글링을 하던 사람인데 같이 하와이에서 공연을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렇게 저녁에 쇼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차차 알려지게 되면서 연봉10만 달러의 좋은 조건의 축구 지도자 제안도 받았다. 
한국은 지도자 경력이 있어야만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었지만, 이미 훌륭한 지도자가 많았던 상황이었다. 
그는 그런 지도자 중에 한명이 되기보다는 프리스타일 축구의 창시자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나고 축구 종가 영국을 간 희용씨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고, 거리공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한 사람의 열정이 세계적인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2003년도가 되자 세계적인 유명한 브라질 축구스타 호나우지뉴가 제게 사인을 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호나우지뉴와 제가 대결하는 광고를 촬영하며 만났죠.
나이키라는 회사의 광고였는데 그 회사는 젊은 세대들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회사였어요. 
나이키 광고 이후에 세계적으로 프리스타일 축구가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도 세계최초로 네덜란드에서 프리스타일 축구 대회가 열렸다.
우승을 거머쥔 사람은 다름 아닌 희용씨였다. 
그는 유명 축구선수 못지않은 유명인이 되었다. 
그 이후로 세계대회에 도전하고, 또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며 살아왔다. 
외국 생활을 계속해나가던 그는 2008년 프리스타일 축구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세계프리스타일 축구연맹 회장이 되어, 프리스타일 축구 창시자로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부모님께선 제가 성인이 된 후에는 저에게 ‘해라.’, ‘하지 마라.’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20년 정도를 하다 보니 프리스타일 축구가 세계적인 콘텐츠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150개국에서 프리스타일 축구가 열리고 있고 각 국마다 몇 천 명씩 하고 있죠.
한 사람의 열정이 세계적인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마음과 열정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어요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며 세상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또 아름다운 기여를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생을 사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저의 최종 꿈은 프리스타일 축구가 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되는 겁니다. 
물론 축구 발전에도 기여하고 싶고요.
만약 프리스타일 축구가 올림픽종목으로도 만들어지고, FIFA(국제축구연맹) 못지않은 단체로 만들어진다면 저는 제 꿈을 이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용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축구가 아직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꿈이 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공을 선물하고, 그들이 어디서든 축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 그것은 그의 또 다른 꿈이자 목표였다.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정만 있으면 할 일은 널려 있습니다. 
아직 목표설정을 하지 못해 방황하는 것뿐이지 목표와 관심만 있다면 세상에 못할 것은 없죠. 
나름대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정하고, 거기에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243&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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