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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분야

(대안학교) 사람에겐 다 때가 있기에 쫓기지 말고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박시내 특수학교 교사

박시내 씨는 전남 담양의 대안학교, ‘한빛고등학교’ 출신의 특수 교사이다. 
고아원을 운영하신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장애아와 어울려 지낼 기회가 많았던 그녀는 여러 가지 꿈들을 거쳐 현재는 특수학교 중등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반 아이들이 예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1년차 신입 교사 시내씨가 교탁에 서기까지 걸어온 길은 거침없었다.

대안학교 진학은 어릴 적부터 인생 계획에 그려져 있었죠

교사 부모님에게서 태어난 시내 씨는 어릴 적부터 대안학교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전교조 교사들 사이에서 새로운 학교를 만들자는 취지의 모임이 생겼던 시기, 전교조 출신이신 아버지를 통해 그녀는 대안학교가 설립되기 전부터 한빛고등학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가 초등학교 때부터 말이다.

“초등학생 때 터무니없는 인생 계획을 세우잖아요? 
어디 중학교를 가고, 고등학교는 어디, 대학교는 어디 나와서 어떤 직업을 가진다는... 
그 계획안에 한빛고등학교가 있었어요.”

어린 시절 막연히 생각했던 계획이 실제로 이뤄진 것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 그녀를 곤란에 빠트린 어떤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또래보다 유달리 조숙했던 그녀의 생각이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괴리감을 만든 것이다.

“어릴 때부터 다른 또래 친구들보다 조숙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던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친구들을 사귈 때 어려움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고민하는 문제가 달랐죠.”

오해들이 쌓여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받기도 했던 경험은 성장기의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겼고 그녀는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계획했던 한빛고등학교 진학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대안학교는 삶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됐어요

전남 담양에 위치한 ‘한빛고등학교’ 학기 초에 그녀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중학교를 졸업한 십대 중반의 청소년들이 모여 새로운 환경을 형성하는 데에는 악습이 필요했다.
무리의 결속을 위해서 남을 배척하며 교우관계를 확인하는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걸(따돌림) 너무 싫어하면서도 어렵게 얻은 친구들이란 생각에 거기에 참여했던 때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관계들은 다 차례가 돌아오잖아요? 
제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저는 거기서 나와 다른 친구들을 만났죠. 
처음 만났던 친구들은 성향이 좀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3년을 거치는 동안 그녀는 그런 일들조차 자신의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 꼭 필요했던 일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동아리 활동이 활발한 대안학교에서 그녀 역시 연극, 찬양, 댄스, 노래, 영화 동아리 등에서 활발히 참여를 했다.

“저희는 학교 교육과정이 일반 고등학교와 달랐어요. 
학교 프로그램에 따라 섬 기행도 가고, 지리산 종주도 했죠. 그 과정들이 미래에 가져야 할 직업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때 나의 마음가짐과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지는 결정하는 법을 알게 하는 거죠.”

그녀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계기 중에 하나는 학교에서 3박 4일로 떠난 지리산 종주였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출발해 중산리로 내려오는 코스였는데 20kg짜리 배낭을 메고 씻지도 못하고 3박4일을 올라갔죠.
뱀사골, 벽소령, 천왕봉도 올라가고. 네 개의 산장에서 자면서. 
제가 산을 무척 싫어해서 못할 줄 알았는데 정상까지 올라간 거예요. 
그 때 성취감을 느꼈죠. 
‘내가 3박4일 동안 싫어하는 산도 탔는데 앞으로 뭘 못하겠느냐’라는 동기화도 잘 됐구요. 
학교의 여러 활동들이 재미도 있었지만 특히 정신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고, 삶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은 제가 대학을 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어요

딱히 ‘무엇을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없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척 많기 때문으로 읽힐 때도 있다. 
그녀 역시 고등학교 때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단 꿈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안학교에는 특성상 예체능 계열의 아이들이 많았었다. 
춤추는 것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재주도 있던 그녀는 주변 친구들에게 자극을 받아 한 때 예술과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술은 취미에서 그쳐야 한다는 어머니의 확고한 의견이 그녀의 생각을 저지했다. 
부모님처럼 교사가 된다는 생각 역시 ‘한빛고등학교’의 헌신적인 선생님들의 희생을 지켜보며 자신이 그만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학은 가야했었죠. 
부모님은 제가 대학을 갔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어요. 
자식이 특별한 꿈이 없다 해도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 원치 않으셨던 거죠.”

교사가 된다는 생각이 없었던 그녀의 대학 지망학과를 결정해 준 것은 특수학교인 ‘순천 선혜학교’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체육교사에서 특수교사로 전향을 한 아버지가 재직해 있던 ‘순천 선혜학교’에서 그녀는 재미를 느꼈다. 
순창에서 컴패션 지원을 받아 고아원을 운영한 할아버지를 통해 어릴 적부터 고아와 장애아들과 뛰어놀며 지냈던 경험으로 장애에 대한 거부감 자체가 없었던 그녀에게 아버지는 대학 전공을 특수교육으로 선택할 것을 권유했다.

“전공을 선택할 때, 부모님께서 추천해주셨어요. 
집안 자체가 복지사업을 했던 터라 그런 일들을 하는 것도 좋아하셨구요. 
미래의 급여나 안정적인 직업에 대해 얘기도 나눴죠. 
저도 너무 고생하면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그녀가 특수교육을 전공으로 선택하고서도 선생님이 되겠단 마음먹은 것은 시간이 좀 흐른 뒤의 일이었다.

진로를 꿈과 동일시하고 싶진 않아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전공을 선택하면 미래에는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가진다는 매뉴얼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부모님 역시 그녀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학교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꿈과 직업에 대해 방황을 했다. 
특수교육을 전공했지만 특수교육을 진로의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난 이걸 해야 겠다, 혹은 내 직업은 이거다 라고 딱히 정한 게 없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사실 진로를 꿈과 동일시하고 싶진 않아요. 
내 인생에 서 직업의 목적이 불분명하니까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돌아다녀 봤죠.
그 때 더 열심히 공부했으면 임용고시에 더 빨리 합격했겠지만, 방황했던 그 시간들이 아깝지는 않아요. 
지금 제가 스물여덟인데 스물여덟에 특수교사란 직업을 가질 줄 알았으면 공부에 연연하지 않고 더 많은 경험들을 해보면서 즐겁게 살아볼 걸 하는 후회가 돼요.”

방황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대학에서의 공부를 대충 하지는 않았다.
주어진 일들은 늘 잘 해야겠단 생각은 그녀가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충실하게 다니는 데 일조했다. 
“부모님이 따로 공부를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기 보다는 공부하는 게 더 낫다고 하셨지만 전 하지 않았었어요.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공부도 안했던 거죠. 
학기 중에는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받고 공부도 하고 그랬어요. 
4학년 때 사범대 학생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임용고시 준비를 했었죠. 
막상 졸업하고 나니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어요. 
저에게 교사가 되겠단 간절함도 없었구요.”

대학을 스물 세 살 때 졸업한 그녀는 임용고시를 총 세 번 치렀다. 
반 두 번의 시험에선 1차 합격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는 공부에 몰두하기보단 취업을 위해 제빵기술도 도움이 될 거란 생각으로 제빵학원도 다녀보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봤다. 
그녀에게 있어 생전 처음 하는 아르바이트였다. 
학 졸업자로서 고용노동부의 실업자 지원을 받아 그녀는 오전에는 제빵학원,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약 4~5개월을 지냈다. 
독서실에서 공부만 하던 그녀가 그때서야 사회 경험을 처음 쌓게 된 것이었다.

기간제 교사를 했던 경험이 특수교사를 하고
싶단 맘에 불을 지폈어요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다양한 경험을 한 그녀는 다음해 임용 고시를 치렀다. 
그러나 아직도 교사를 해야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던터라 그 해 시험도 떨어지고 지방에 내려와 기간제 특수교사를 하게 되었다. 
정규채용교사가 아니라 고용불안이 항시 존재하는 기간제 교사로서의 경험은 그녀가 꼭 임용시험에 합격해야겠단 생각을 굳히는데 일조했다.

“우스갯소리로 특수교사가 교실의 신이라는 이야기를 해요.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이 많고 거짓말을 해도 바로 선생님한테 들키기 때문이죠. 
기간제 교사로 처음 애들하고 수업을 하는데 애들이 너무 예쁘고 수업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계약기간이 끝나고 1년 더 기간제 교사로서 아이들과 만나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짧은 경력’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지원한 학교의 이사진이 교사 경력이 1년밖에 안 된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아쉬움도 남았지만 결국 그녀는 이전의 임용고시와는 달리 반드시 특수교사를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2014년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녀는 합격하는 공부가 따로 있단 것을 깨달았다. 
합격을 위해선 합격하는 공부, 즉 책에 적힌 내용을 문제로 풀 수 있는 응용력이 필요하단 사실이었다. 
결국 그녀는 2014년 세 번째 임용시험에서 광주특수교사로 합격해 공립 정신 발달 지체아 특수학교인 ‘광주 선명학교’에 부임했다.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필요해요

부임 초반 그녀는 학과에서 배웠던 지식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장(교실)에서의 ‘아이들의 특성’과 이론으로 공부한 ‘아이들의 특성’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움이 안 된다 생각했던 지식은 교육을 위한 매뉴얼에 도움이 되었다. 
똑같은 정신지체라 해도 다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각 아이들을 위한 개별화 교육(IEP)을 개인별로 짜야했다. 
학생별로 교육계획을 짤 때, 개인의 성향 및 능력, 장애정도를 기반으로 어떤 교육이 필요하다는 판단은 이론적 매뉴얼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에 아홉 명이 있으면 아홉 개가 필요하고 과목별로도 교육이 달라져야 해요. 
과목이 네 개라 친다면 적어도 서른여섯개 이상의 교육계획이 필요한데 그 과정을 일년 분량으로 짜야 해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교육이죠. 
그때 학과에서 습득한 이론이 도움이 되었어요.”

자폐성 장애 아이들이 많아 정서반으로 불린다는 그녀의 학생들은 그녀와 함께 하며 점차 웃음이 많아졌다. 
대답을 잘 하지 않는 아이들 앞에서 매일 원맨쇼를 벌이는 그녀에게 아이들은 마냥 예쁜 존재가 되었다. 
초반 그녀는 자신의 입장에서 아이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녀의 생각을 바꾼 것은 동료 교사의 한 마디였다. 
학교에서 손톱을 계속 뜯는 아이를 못하게 말리던 그녀를 보던 동료 교사가 ‘손톱 좀 뜯을 수 있지. 죽는 일도 아닌데~’라며 지나간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잣대를 바꿔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내가 가진 일을 처리하는 과정과 아이들이 갖고 있는 프로세스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필요한 거죠.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필요해요. 
세상의 잣대로 보면 아이들에 대해 볼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일반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도 우리 아이들에겐 신기하고 대단한 일이예요. 
아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아이들을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그녀는 체력과 성실함 역시 특수교사의 덕목으로 뽑았다. 
장애아동들은 표현을 잘 안하는 경우가 많지만 선생님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수업을 하는지 다 관찰을 하고 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상동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말귀는 알아듣는 것이다. 
본능에 의해 움직이기에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남보다 빨리 본능적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이들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에 대해 크게 체감하고 있었다.

장난스레 아이들을 중2병이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돈을 벌게 해주는 고객님이라고 농담하는 그녀지만 교사의 소양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직업을 가졌고, 직업을 가짐으로써 급여를 받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경계했다.

“저는 제가 받는 월급에 부끄럽지 않아요. 
또 아이들이 교실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귀한 일이기에 저는 교사가 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돈을 먼저 생각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온다면 스스로 그만두자라고 다짐했어요. 
교사는 단순한 ‘직업’이라고 부르기가 애매해요. 
소명이 필요하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의사와는 다르게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일.”

사람에겐 다 때가 있기에 쫓기지 말고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마음이 심란할 때 마인드맵을 그려 도식화를 시켜보곤 했다. 
자신의 이름과 기분을 적고 다른 가지로는 앞으로의 방향, 지금 할 일 등을 그려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쭉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꿈이 없을 땐, 무얼 해야 할 지 무척 막연하죠. 
그럴 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종이에 적어 봐요. 
그림 그리는 게 좋으면 그림을 그려도 되죠. 
세분화시키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좁혀볼 수도 있고 넓힐 수도 있죠. 
자신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느냐를 아는데 도움이 되니까 평소에 자주 적어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녀는 얼마 전부터 또 다른 꿈을 가져야겠단 생각을 갖게 됐다. 
신이 정해놓은 계획을 통해 삶을 상기하는 것이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꿈을 강요하는 나라에서 그녀의 생각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에겐 다 때가 있으니 그 때를 위한 준비, 즉 경험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아껴두지 말고 직접 해봐야 인생을 알 수 있단 말이었다. 
금전적 문제에 붙들려 삶의 질을 낮추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 여러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고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다 보면 그 시선에 내가 쫓기게 돼요. 
하지만 쫓길 필요가 전혀 없어요. 
자기가 가진 가치관을 분명히 세우고 그걸 밀어붙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쫓기지 말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에겐 다 때가 있으니까. 
그 때를 기다리며 즐겁고 많은 경험을 노력과 함께 만들어가야 해요.”

앞으로의 인생 목표를 ‘베풀면서, 행복하고, 재미있게’라고 말하는 그녀는 앞으로도 여러 경험들을 통해 그렇게 살아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7142&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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