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걸 해야 겠다, 혹은 내 직업은 이거다 라고 딱히 정한 게 없어서 고민이 많았어요.
사실 진로를 꿈과 동일시하고 싶진 않아요.
내 인생에 서 직업의 목적이 불분명하니까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돌아다녀 봤죠.
그 때 더 열심히 공부했으면 임용고시에 더 빨리 합격했겠지만, 방황했던 그 시간들이 아깝지는 않아요.
지금 제가 스물여덟인데 스물여덟에 특수교사란 직업을 가질 줄 알았으면 공부에 연연하지 않고 더 많은 경험들을 해보면서 즐겁게 살아볼 걸 하는 후회가 돼요.”
방황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대학에서의 공부를 대충 하지는 않았다.
주어진 일들은 늘 잘 해야겠단 생각은 그녀가 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충실하게 다니는 데 일조했다.
“부모님이 따로 공부를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기 보다는 공부하는 게 더 낫다고 하셨지만 전 하지 않았었어요.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공부도 안했던 거죠.
학기 중에는 열심히 해서 장학금도 받고 공부도 하고 그랬어요.
4학년 때 사범대 학생이면 누구나 그랬듯이 임용고시 준비를 했었죠.
막상 졸업하고 나니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어요.
저에게 교사가 되겠단 간절함도 없었구요.”
대학을 스물 세 살 때 졸업한 그녀는 임용고시를 총 세 번 치렀다.
초반 두 번의 시험에선 1차 합격도 하지 못했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녀는 공부에 몰두하기보단 취업을 위해 제빵기술도 도움이 될 거란 생각으로 제빵학원도 다녀보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봤다.
그녀에게 있어 생전 처음 하는 아르바이트였다.
대학 졸업자로서 고용노동부의 실업자 지원을 받아 그녀는 오전에는 제빵학원,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약 4~5개월을 지냈다.
독서실에서 공부만 하던 그녀가 그때서야 사회 경험을 처음 쌓게 된 것이었다.
기간제 교사를 했던 경험이 특수교사를 하고
싶단 맘에 불을 지폈어요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다양한 경험을 한 그녀는 다음해 임용 고시를 치렀다.
그러나 아직도 교사를 해야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던터라 그 해 시험도 떨어지고 지방에 내려와 기간제 특수교사를 하게 되었다.
정규채용교사가 아니라 고용불안이 항시 존재하는 기간제 교사로서의 경험은 그녀가 꼭 임용시험에 합격해야겠단 생각을 굳히는데 일조했다.
“우스갯소리로 특수교사가 교실의 신이라는 이야기를 해요.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하는 행동이 많고 거짓말을 해도 바로 선생님한테 들키기 때문이죠.
기간제 교사로 처음 애들하고 수업을 하는데 애들이 너무 예쁘고 수업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계약기간이 끝나고 1년 더 기간제 교사로서 아이들과 만나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짧은 경력’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지원한 학교의 이사진이 교사 경력이 1년밖에 안 된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아쉬움도 남았지만 결국 그녀는 이전의 임용고시와는 달리 반드시 특수교사를 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2014년 임용시험을 준비했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그녀는 합격하는 공부가 따로 있단 것을 깨달았다.
합격을 위해선 합격하는 공부, 즉 책에 적힌 내용을 문제로 풀 수 있는 응용력이 필요하단 사실이었다.
결국 그녀는 2014년 세 번째 임용시험에서 광주특수교사로 합격해 공립 정신 발달 지체아 특수학교인 ‘광주 선명학교’에 부임했다.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필요해요
부임 초반 그녀는 학과에서 배웠던 지식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현장(교실)에서의 ‘아이들의 특성’과 이론으로 공부한 ‘아이들의 특성’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움이 안 된다 생각했던 지식은 교육을 위한 매뉴얼에 도움이 되었다.
똑같은 정신지체라 해도 다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기에 각 아이들을 위한 개별화 교육(IEP)을 개인별로 짜야했다.
학생별로 교육계획을 짤 때, 개인의 성향 및 능력, 장애정도를 기반으로 어떤 교육이 필요하다는 판단은 이론적 매뉴얼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교실에 아홉 명이 있으면 아홉 개가 필요하고 과목별로도 교육이 달라져야 해요.
과목이 네 개라 친다면 적어도 서른여섯개 이상의 교육계획이 필요한데 그 과정을 일년 분량으로 짜야 해요.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교육이죠.
그때 학과에서 습득한 이론이 도움이 되었어요.”
자폐성 장애 아이들이 많아 정서반으로 불린다는 그녀의 학생들은 그녀와 함께 하며 점차 웃음이 많아졌다.
대답을 잘 하지 않는 아이들 앞에서 매일 원맨쇼를 벌이는 그녀에게 아이들은 마냥 예쁜 존재가 되었다.
초반 그녀는 자신의 입장에서 아이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의 생각을 바꾼 것은 동료 교사의 한 마디였다.
학교에서 손톱을 계속 뜯는 아이를 못하게 말리던 그녀를 보던 동료 교사가 ‘손톱 좀 뜯을 수 있지. 죽는 일도 아닌데~’라며 지나간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잣대를 바꿔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내가 가진 일을 처리하는 과정과 아이들이 갖고 있는 프로세스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필요한 거죠.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필요해요.
세상의 잣대로 보면 아이들에 대해 볼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일반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도 우리 아이들에겐 신기하고 대단한 일이예요.
아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짜 아이들을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그녀는 체력과 성실함 역시 특수교사의 덕목으로 뽑았다.
장애아동들은 표현을 잘 안하는 경우가 많지만 선생님이 무엇을 하는지 어떤 수업을 하는지 다 관찰을 하고 있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상동행동’을 하는 아이들도 말귀는 알아듣는 것이다.
본능에 의해 움직이기에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남보다 빨리 본능적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이들을 위한 노력의 필요성에 대해 크게 체감하고 있었다.
장난스레 아이들을 중2병이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돈을 벌게 해주는 고객님이라고 농담하는 그녀지만 교사의 소양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이 직업을 가졌고, 직업을 가짐으로써 급여를 받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경계했다.
“저는 제가 받는 월급에 부끄럽지 않아요.
또 아이들이 교실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귀한 일이기에 저는 교사가 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돈을 먼저 생각하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온다면 스스로 그만두자라고 다짐했어요.
교사는 단순한 ‘직업’이라고 부르기가 애매해요.
소명이 필요하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의사와는 다르게 한 사람의 ‘마음’을 살리는 일.”
사람에겐 다 때가 있기에 쫓기지 말고
즐겁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마음이 심란할 때 마인드맵을 그려 도식화를 시켜보곤 했다.
자신의 이름과 기분을 적고 다른 가지로는 앞으로의 방향, 지금 할 일 등을 그려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쭉 쓰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꿈이 없을 땐, 무얼 해야 할 지 무척 막연하죠.
그럴 땐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종이에 적어 봐요.
그림 그리는 게 좋으면 그림을 그려도 되죠.
세분화시키다 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좁혀볼 수도 있고 넓힐 수도 있죠.
자신이 어떤 것에 가치를 두느냐를 아는데 도움이 되니까 평소에 자주 적어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녀는 얼마 전부터 또 다른 꿈을 가져야겠단 생각을 갖게 됐다.
자신이 정해놓은 계획을 통해 삶을 상기하는 것이 인생을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꿈을 강요하는 나라에서 그녀의 생각은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에겐 다 때가 있으니 그 때를 위한 준비, 즉 경험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면 아껴두지 말고 직접 해봐야 인생을 알 수 있단 말이었다.
금전적 문제에 붙들려 삶의 질을 낮추는 것을 피하기 위해선 여러 경험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고 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다 보면 그 시선에 내가 쫓기게 돼요.
하지만 쫓길 필요가 전혀 없어요.
자기가 가진 가치관을 분명히 세우고 그걸 밀어붙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쫓기지 말고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사람에겐 다 때가 있으니까.
그 때를 기다리며 즐겁고 많은 경험을 노력과 함께 만들어가야 해요.”
앞으로의 인생 목표를 ‘베풀면서, 행복하고, 재미있게’라고 말하는 그녀는 앞으로도 여러 경험들을 통해 그렇게 살아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