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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남들이 하지 않은 길을 찾아 희열 느낀다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자연대 출신이 공대 교수가 된 것이 이상하다고요? 
사실 처음 교수 임용될 때 화제가 됐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기초과학인 화학을 폭넓게 공부하다보니 공학 분야에서도 솜씨를 발휘하게 된 것이죠. 
제가 하는 나노기술은 기초과학과 공학을 연결하는 분야입니다. 
앞으로는 여러 분야가 융합돼 시너지를 내는 분야들이 중요해지고 단과대나 학과 구분도 없어질걸요.”

‘우리나라 나노 과학의 대표주자가 누군가’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은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를 꼽는다. 
실제로 현 교수의 논문은 과학논문인용색인(SCI)을 발행하는 미 톰슨사에서 선정하는 ‘뉴핫페이퍼(New Hot Paper)’에 뽑히기도 했다. 
뉴핫페이퍼는 최근 2년간 인용횟수가 상위 0.1%에 드는 논문을 말한다.

현 교수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분야는 나노과학. 
특히 나노소재를 합성해 의료분야나 배터리, 에너지 분야에 응용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교수는 “나노기술이라는 것는 IT나 BT 등과 결합되기 쉬운 매개체 역할을 하는 기반 기술”이라며 “어떻게 하면 다양한 분야에 응용될 수 있는 고품질의 나노입자를 만들 수 있는가가 주요 연구 테마”라고 설명했다. 
나노 소재는 나노입자의 크기에 따라 성질이 확 바뀌게 된다. 
좋은 나노소재가 되기 위해서는 나노입자를 균일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한데, 현 교수는 이 균일한 나노입자 만들기에 12년 이상 연구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찾아라

현 교수가 나노분야에 뛰어들어 최고 대가로 꼽히게 된 것은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됐다. 
바로 남들을 따라가는 연구는 하지 말자는 것.

서울대 화학과와 대학원을 마치고 유학을 가 1996년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최고 논문상을 받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1년간 박사 후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1997년 9월 서울대 공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그 때 바로 현 교수는 남들이 하는 연구를 하지 않고, 나만의 새로운 연구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쉽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렇지만 박사 학위 과정이나 박사 후 연구원 때 연구했던 것을 교수가 되서도 연구하면 재미가 있겠습니까. 
서울대 교수로 막 임용됐을 때는 나노분야가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재미있는 분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연구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야겠다는 결심했죠.”

새로운 분야를 하겠다는 그의 ‘고집’때문에 한 때 연구자로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서울대 교수로 임용된 지 4년 정도가 지난 2001년 말.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그 때까지 홈런성 연구결과가 없었던 것이다. 
1루타나 2루타 정도의 안타성 연구결과만 있었기 때문에 연구비가 사실상 ‘0’으로 수렴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2001년 말 생각지 않은 장외홈런이 나왔다.

노벨화학상 수상자들의 수상 논문이 가장 많이 실리는 저널로 알려진 미국화학회지에 균일한 나노입자 합성과 관련한 논문이 실렸던 것.
연구결과가 실리자마자 나노분야 연구자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 논문의 인용횟수는 1100번에 이르고 있다.

“나노입자 분야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나노입자의 크기를 균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에는 다양한 크기의 나노입자를 만든 뒤 같은 크기의 나노입자만 놔두고 나머지는 골라내는 방법을 썼는데,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짜리 나노입자를 골라내는 게 쉽겠습니까. 
그래서 생각을 바꿔서 균일한 크기의 나노입자를 합성한 겁니다. 
그런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성공한 것은 저 뿐이죠.”

현재 그는 자신의 힘든 연구 상황을 타개시켜주는데 큰 역할을 했던 미국화학회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고교 시절엔 과외 아르바이트로 숙식 해결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이 고향인 현 교수는 그야말로 시골마을이 주목하는 모범생 수재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군에서 주최한 과학경시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그는 ‘내가 과학에 소질이 있나보다’라는 생각을 하고 그 때부터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실 현 교수는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혼자 대구로 나와 유학생활을 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남의 집 살이’라고 할 정도로 중·고교 시절 과외 아르바이트로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렇지만 과학자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힘든 시기를 버텨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계속 가져왔던 그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이라는 과학 4과목을 배우면서 ‘화학자가 되겠다, 서울대 화학과에 꼭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외우는 것을 잘 못했던 그는 생물과 지구과학은 암기과목과 다름 아니어서 일찌감치 전공대상에서 제외했고, 물리는 재미있기는 하나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 
렇지만 용액과 용액이 만나면서 색깔이 바뀌고, 뭔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화학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가 과학자로 진로를 결정하는데 주변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연구자로서 성실함은 어려서 부친을 보면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의 부친은 당시로는 고학력자인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갖고 있었는데, 부모 봉양 때문에 군소리 없이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새마을지도자로서 항상 성실함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는 모습은 소년 현택환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구지역에서 1~2등을 했던 학생 현택환은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의대나 공대가 아닌 순수과학인 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학교에 진학해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다. 
고급 유기화학 수업에서는 교수가 던져준 숙제를 풀기 위해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 묻혀서 관련 논문들을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석사학위까지 마친 그는 유학을 결심했다. 
어떻게 보면 그가 공부하던 당시에는 우리나라 과학계 상황이 녹록치 않았다.

실험실 연구비가 미국의 몇 백분의 1에 불과해 제대로 된 실험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던 것. 
당시 실험실 한 곳의 연구비 규모가 몇 백 만원에 불과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제대로 화학 공부를 하고 싶었던 현 교수에게 유학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부를 하고 싶어서 유학을 떠나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현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찧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언어 장벽은 물론이고, 석사 때처럼 기존 연구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구주제를 잡아 풀어나가는 것은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학생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지 3년 동안 제대로 된 연구 성과를 하나도 내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과연 박사학위를 받을 수는 있을까. 박사를 받더라도 교수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아주 작은 회사 연구원으로라도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열패감에 빠지기도 했다. 
꿈은 컸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의지의 한국인인 그는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최고 논문상을 받고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기까지 했다.

단순하게 목표를 정하고 달려라

현 교수가 박사학위를 받은 분야는 지금도 마이너한 분야인 음파화학. 초음파를 이용해 물질을 분석해 내는 분야다. 
지금 연구와 전혀 상관없는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인데, 쓸데없이 시간을 보냈다는 후회가 되지 않냐는 질문을 던져봤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지도교수는 네이처 논문 하나를 던져주고 네가 아이디어를 내서 새로운 연구를 해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그건 교수가 어떻게 연구하는가를 스스로 파악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아이디어를 내고 관련 분야 연구자들과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나누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배우라는 겁니다. 
지금도 제 학생들에게 연구자는 고기를 받아먹는 사람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또 그 때 생각했던 것들을 지금 하나씩 이뤄가고 성과로 연결하고 있으니 후회할 일이 아니죠.”

나노 분야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인 그에게 연구 이외에 다른 삶은 있을까.
“사실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서 삶은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순하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자기관리를 한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고, 틈나는 대로 테니스를 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죠.”

연구에만 집중하는 삶을 산 현 교수의 인생 최고 목표는 몇 가지가 있다.

그는 “어떻게 보면 인생의 30년 이상을 국립 서울대와 함께 하고 있다”며 “유학도 국비로 갔고, 현재 하고 있는 연구도 다 국민들의 세금에서 나온 것”이라고 운을 뗐다. 
그는 항상 나라에 마음의 빚을 안고 있단다. 
국가를 위해 연구자로서 뭘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한다는 말이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나노물질을 갖고 의료용 MRI 조영제를 개발해 사람들의 암이나 질병을 조기에 진단하고 치료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새로운 나노시스템을 갖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고 싶다는 것이다.

또 나노분야에서 아주 중요하지만 어려운 문제에 도전해 해결해 냄으로써 그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와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해답을 찾고 싶단다. 
이와 함께 젊은 연구자들은 물론 중고등학생, 대학생들 중 세계적인 과학자가 나올 수 있도록 돕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이런 것들이 그가 생각하는 나라에게 받은 것들을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과학은 컴퓨터 게임보다 더
흥미있는 것…용기와 네트워크를 가져라

“과학자는 정말 흥미로운 직업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안 한 것을 내가 처음으로 한다는 것,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컴퓨터 게임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줄 뿐이지만 연구를 통한 즐거움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혜택을 돌려줄 수 있으니 즐겁고도 보람된 일이지요.”

현 교수는 뻔한 얘기지만 좋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년 365일 중 연구자가 원하는 좋은 결과를 얻는 기간은 10일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날들은 실패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50일의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면 열흘 간 기쁨은 느끼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는 또 요즘 연구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사람관계라고 표현했다.

“1900년대였더라면 이런 얘기는 안했을 겁니다. 
그 당시만 해도 과학은 천재들이 하는 것, 나 혼자 잘나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즘 세상에는 감히 말씀드리지만 함께 일할 수 없다면 연구 성과도 내지 못할 겁니다. 
요즘 유명한 저널에 실리는 논문들 보세요. 
특히 생물학 분야 연구논문들을 보면 관련 저자들이 보통 20명은 넘습니다. 
협동연구를 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은 좋은 연구 성과도 내지 못합니다.”

이와 함께 그는 연구자에게 필요한 창의적 사고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만남을 마무리했다.

“창의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남들이 해보지 않은 것,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해낸다는 말입니다. 
남들이 안 해 본 것을 해보려면 첨벙 발을 담가봐야 합니다. 
어떤 목표를 정하고 집중해서 몇 년, 길게는 몇 십년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학창 시절부터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은 뭘 해도 용서가 되는 시절 아닙니까.”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682&cur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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