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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소변이었다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

한때 가장 있기있는 미드가 ‘CSI’였다. 
과학수사대를 뜻하는 말이다. 
국내에서도 박신양과 김아중이라는 배우가 나온 ‘사인’이라는 드라마가 20%를 넘는 시청율로 인기를 끌었다. 
이런 과학수사 드라마가 TV에서 인기를 끌 때 가장 흐뭇해하는 사람이 바로 정희선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원장이다. 
현재 2013년 7월부터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으로 부임한 정희선 전 원장을 만나 먼저 33년전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과학수사대의 길을 걷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제가 숙명여대 제약학과를 다녔어요. 
3학년인가, 4학년인가 학교에 국과수 소장님이 오셔서 강연을 하는 거예요. 
너무 몰입해서 들었지요. 
이렇게 멋진 길이 있구나, 난 이걸 해봐야겠다, 이렇게 결심하고 이 길에 들어섰지요.”

인터뷰 내내 기자에게 말투를 바꿔가며 장난도 치고, 농담도 자주 던지는 정 원장은 국내 여성 과학계에서도 손꼽히는 리더다. 
전문성과 성실함도 유명하지만, 상대방을 배려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누군가 자신의 방에 오면 꼭 뭘 준다고 하는데 이날도 인터뷰를 마친 기자에게 작은 초콜릿을 선물했다. 
“사실 사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일부러 인맥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제게 다가온 인연이 소중한 거지요.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오랫동안 이어가려고 노력하는데 나중에 새로운 인연으로 만나게 될 때도 많아요.”

노래가사 외우다 발견한 리더십

하지만 여성의 몸으로 거친 과학수사의 길을 걷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정 원장은 “국과수에서 그나마 가장 깨끗한 게 소변”이라며 “위 내용물 검시, 부검 등 어려운 작업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예를들어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사람들의 위를 살펴보기도 하고 농약 먹고 사망한 사람들의 위 내용물을 검사하기도 했다. 
농약 사망자의 위는 냄새가 참 많이 났다고 정 원장은 회고했다.

“옛날에는 여성에게 커피 심부름을 참 많이 시켰어요. 
그 일이 참 하기 싫어서 커피를 성의 없이 타서 상사에게 드렸지요. 
상사가 한 모금 마시더니 저보고 마셔보래요. 
이렇게 커피 타서 되겠냐고 꾸중 많이 들었죠.”

정 원장은 이 일을 겪은 뒤에 커피 잘 타는 선배에게 커피 타는 법을 배울 정도로 무슨 일에든지 적극적으로 임했다. 
커피 타기 외에도 워낙 엄격했던 상사에게 참 많이 혼나면서 일을 배웠는데 그 상사가 나중에 정원장의 남편이 된 이야기는 국과수에서도 유명한 전설이다.

정 원장은 학창 시절 자신이 그저 “공부를 잘 했던 아이”라고 회상했다.
중학교 2학년때까지 어디 드러나지 않고 얌전하게 공부만 하던 아이였는데 소풍을 가서 왜 그랬는지 노래 가사를 많이 외워서 불렀다고 한다. 
생님이 “저것 봐라”라는 눈으로 놀라며 바라보는 것을 느낀 정 원장은 그날 이후로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 
중3과 고등학교 들어 연거푸 반장을 맡게 된 정 원장은 자신에게 숨겨져 있던 리더십을 발견했다.

“고등학교 때인가 우리 반에 가곡 하나를 외우게 시켰어요. 
왜 그랬는지 몰라요. 
가끔 원망도 들었는데 나중에 같이 부르니까 참 멋있더라고요.
지금도 그때 노래를 외우던 저를 바라보던 선생님의 눈이 기억나요. 
일종의 인정이고 칭찬인데 그게 제 인생을 많이 바꿨어요. 
그래서 저도 사람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한때 의사가 돼서 우간다로 의료봉사를 떠나려던 정 원장은 고3때 제약학과로 진학을 하게 된다. 
의학이나 약학에 관심도 있었고, 화학시험을 보면 늘 좋았던 성적도 왠지 비슷해 보이는 제약학과에 눈을 돌리게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가 제약학과를 추천해 준 것도 영향이 컸다. 
정 원장은 “제 경험때문인지 중, 고교 시절에 진로에 대한 다양한 체험을 해보거나 조언을 들어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요즘에는 TV의 영향력이 큰 것 같다”고 말했다.

소변에서 마약을 검출하다

국과수에서 정 원장이 돋보이게 된 것은 1988년 올림픽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마약사범이 늘어나면서부터였다. 
그 전부터 정 원장은 마약에 관심이 많았다. 
마약 중독자가 누군가 자신을 공격한다며 다른 사람을 인질로 잡는 등 기괴한 행동을 하는 걸 보고 뭔가 뇌의 신경전달물질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외국에서 어렵사리 관련 정보를 구해 쥐를 가지고 소변에서 마약을 추출하는 연구를 하게 됐다. 
쥐에게 마약을 먹이고 3시간, 6시간, 9시간, 12시간 등 시간마다 소변을 채취해 어떤 물질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하루 온종일 연구실에 붙어 있을 때도 많았고, 주말도 다르지 않았다.

“누가 하라고 한 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었어요. 
그저 제가 좋아서, 왠지 필요할 것 같아서 한 일이었죠. 
그랬으니까 더 즐겁게 집중해서 했던 것 같아요.”

올림픽이 끝나고 국내에서도 마약사범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진짜로 마약을 복용했는지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정원장이 구축한 방법이 큰 도움이 됐다. 
이미 탄탄한 데이터를 확보한 터라 마약사범들이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정 원장은 “정말 보람 있었던 일”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인기 그룹 듀스의 전 멤버 고 김성재 사망사건의 원인을 밝혀낸 것도 대중적으로 정 원장을 유명하게 했다. 
마약을 복용한 게 아니냐는 추측만 난무했지 죽음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정 원장은 끈질긴 추적 끝에 동물성 마취제가 혈액 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건은 당시 엄청나게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는 법원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정 원장은 “범인을 확정하는 것은 법원의 판단”이라며 “과학자로서 동물성 마취제를 찾아낸 것은 잘 했지만 그 마취제가 죽음의 원인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아직도 회한이 남아 있는 목소리였다.

국과수에서 숙명여대를 다니며 석·박사 학위를 받은 정 원장은 영국 런던대의 킹스 칼리지에 1년 동안 연수를 다녀온다. 
어렵사리 영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연구소의 반대에 부딪혔다. 
아직 여자가 1년동안 해외에 나가서 공부하고 돌아온다는 것이 자유롭지 않은 분위기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영국을 다녀온 정 원장은 “내가 확 변해서 돌아온 시기”라고 말했다.

“공부야 어디서든 할 수 있지요. 
한국에서 배운다고 달라지겠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과학수사의 틀을 새롭게 잡고,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방법을 배우는 수확이 컸어요. 
특히 그곳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좋은 인연으로 남아 이곳저곳에서 저를 도와줬어요. 
정말 잘 다녀온 유학이었습니다.”

승진의 아픔을 생쥐와 함께

한창 일에 빠져 있던 정 원장에게 가장 큰 시련이 닥쳐왔다. 5급 사무관 승진에서 두 번이나 미끄러진 것이다. 
늘 일 잘하고 능력있다는 말을 들어온 정 원장은 당연히 자기가 승진할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 떨어졌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두 번째 떨어지고 전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대신 승진했을 때는 좌절감이 강하게 몰려왔다. 
국과수를 그만둬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이어서 차별을 받았다는 생각도 강하게 들었다.
그때 그녀를 잡아준 것은 뜻밖에도 생쥐였다.

“실험실에 있는데 생쥐 실험할 게 너무 많이 몰려왔어요. 
그만 둬야지하고 생각하면서 하나하나 실험하는데 마음이 안정되는 거예요. 
그래, 이까짓 걸로 물러나서야 되겠어 하고 마음을 다시 잡았죠.”

다음 번 승진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정 원장은 그 이후로는 오히려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사무관을 좀 하니까 과장으로 올라가고, 다시 부장이 됐다. 
그리고 어느새 국과수 최초의 여성 소장이 됐고, 국과수의 꿈이었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승격이 되면서 첫 원장이 됐다.

“우리들은 그걸 소원성취라고 불러요. 
국과수 50년 역사의 소원이었거든요. 
제가 첫 원장인데 사실 제 남편도 소장을 지냈어요. 
그래도 가끔 집에서 모임이 있을 때 ‘나는 원장, 당신은 소장’이라고 확인해 주죠. 
하하하.”

국과수를 이끌면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사건은 점점 많이 벌어졌고, 과학수사는 갈수록 중요해졌다. 
중요한 사건마다 국과수의 역할도 점점 빛이 났다. 
연구원은 유명해졌고, 정 원장도 빛을 발했다.

“다 직원들 덕분이에요. 
우리 연구원들이 정말 창의성이 뛰어나요. 
로운 기법을 개발해 사건을 해결하는데, 어쩌다보니 그게 제 공으로 되는거예요. 
사실 연구원들이 다 한 건데.”

그는 원장으로 재직하며 ‘신뢰’ ‘배려’ ‘열정’을 강조했다. 
정 원장은 “사람이 서로 믿으면 말을 멋있게 하지 않아도 다 통한다”며 “신뢰를 쌓기 위해 많은 활동을 같이 했다”며 웃었다. 
또 남을 배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며 그런 사람이 결국 조직에서 더 성공하더라고 말했다. 
열정에 대해서는 특히 여성 후배들에게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요즘에는 입사시험을 보거나 입사 초기에 여성들이 훨씬 잘하고 돋보인다고 해요. 
문제는 지구력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훌륭했던 여성이 성과가 떨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기본적으로 육아 문제가 있기는 한데, 열정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에 비해 남자는 꾸준히 올라가는 경우가 많죠. 
여성들이 장기적인 열정을 유지해야 조직에서 오랫동안 성공할 수 있어요. 
육아나 출산 휴가는 제도적으로 보장해 줘야 하지만 나머지 기간에는 더 집중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남자에게 장기적으로 뒤처지지 않아요.”

역시 여성 리더답게 한번 조직 이야기가 나오니까 말이 술술 이어졌다.
정 원장은 기자에게 “직장 생활 하면서 뭐가 가장 중요한지 아냐”고 물었다. 
“무조건 오래 일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야 해요.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내면 자신도 성장하고, 시야도 많이 넓어져요. 
한순간을 힘들다고 버티지 못하면 결국 물거품이 돼요.” 
역시 33년동안 한우물을 판 과학수사의 대가다운 말이었다.

과학수사박물관 만들고 싶어

정 원장의 마지막 꿈은 과학수사박물관이었다. 
남편도 국과수 소장이었으니 부부가 함께 꾸는 꿈이었다. 
정 원장은 “동아사이언스가 이런 꿈을 함께 이뤄가면 참 좋을 텐데”라며 “그동안 재미있는 아이템이나 프로그램을 많이 알아뒀는데 이런 걸 모아 과학수사박물관을 만들면 아이들이나 청소년, 그리고 어른들에게까지 인기가 높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젠가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꼭 과학수사박물관을 짓고 싶다고 했다.

국과수 원장을 그만 두고 충남대에 오기까지 1년동안 오랜만에 휴식의 시간을 가진 정 원장은 오카리나라는 악기도 배우고, 평소 즐겼던 수영도 자주 하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노래에 자신이 없다는 정 원장은 남들 앞에서 연주할 만한 악기 하나 가졌다는게 무척 기쁜 듯 했다.
한편으론 그 시간에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이뤄낸 열정과 성실함이 진하게 느껴졌다.

정 원장은 2014년부터 국제독성학회 회장으로 3년의 임기를 맡게 된다. 
이사회 회원부터 시작해 10년 이상 국제 학회 일을 하며 회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스스로 영어에 자신이 없어 망설였지만 자신이 그만 두면 아시아 지역에 회장 자리가 돌아오기까지 20년이 더 걸린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맡게 됐다.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처음 맡는 자리다. 
30년 넘게 과학수사라는 한우물을 판 열정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소년에게 진로나 직업 선택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경제적인 문제도 무시할 순 없지. 
중요한 거야. 
하지만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게 필요해요. 
용꼬리보다는 뱀머리가 되는 거지. 
그리고 꿈은 크게 꿔야 해. 
그래야 뭐든 이룰 수 있어요. 
꿈을 작게 그리지 마세요. 
장한 꿈을 꾸세요.”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676&curPag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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