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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소년이여, 네 멋대로 해라


이정모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서울시 서대문구청 뒤로 올라가면 3층짜리 큰 건물이 하나 있다. 
그 앞은 늘 어린이와 청소년, 어머니들로 북적인다.
2003년 문을 열어 올해로 10년째를 맞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이다. 
현재 박물관을 이끌고 있는 선장이 바로 이정모(50) 관장이다. 
박물관이 문을 닫기 직전에 이 관장을 찾아갔다. 
다음날 출장을 앞두고 한창 바빠 보였다. 
그가 이 일을 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안양대 교수로 있다가 원고가 너무 밀려 휴직한 상태였어요. 
휴직이 거의 끝나 있었는데 무슨 서류를 떼려고 서대문구청 홈페이지에 찾아갔어요. 
팝업 광고가 뜨는데 자연사박물관 관장을 뽑는다는 내용이었죠. 
5초도 망설이지 않고 지원했죠.”

말마따나 이 관장은 모든 질문에 거의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용도 거의 드라마나 영화 같았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즉흥적으로 결정한 적이 많기도 했지만,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고 매순간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을 쫓았다.
그 결과가 지금 서대문자연사 박물관의 폭넓은 인기다. 
자연사박물관 하나 제대로 키워낸 그의 여정을 쫓아가 봤다.

말미잘을 사랑했던 소년

이 관장은 전남 여천의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완벽한 모범생이었다”고 회상했다. 
학교 담을 넘어가 본 적이 없다는 이상한(?) 설명과 함께였다.

“어렸을 때 말미잘이 그렇게 좋았어요. 
그래서 바닷가에 나가 늘 놀았지요.”

그래도 공부는 꽤 잘 했다. 
그래서인지 큰 도시에 가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자 아버지를 졸라 서울로 전학을 갔다. 
부모 없이 2학년인 동생과 함께였다. 
서울 퇴계로에 있는 한 건물의 옥탑방에 살았는데 문 열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건이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올라와 함께 살았다.

문제는 공부였다. 
자신이 가장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서울로 올라오니 쉽지 않았다. 
“적응이 안 돼서 결국 전학을 갔는데 그곳이 나와 맞았는지 다시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린중학교로 진학했는데 야구선수 박노준이 우리 반이었어요. 
이럴줄 알았으면 친하게 지내둘걸 그랬어. 
고등학교 가서는 친구를 잘못 사귀면서 성적이 많이 떨어졌어요. 
2학년 1학기 때는 반에서 40등을 했어요. 
졸업할 때는 다시 전교 몇 등으로 올랐지만 내신이 15등급에서 5등급으로 낮은 게 문제였지.”

대학에 떨어지고 재수를 했다. 
다행히 성적이 잘 나왔다. 
그런데 남들 가는 학과는 나 몰라라 하고 농업에 관련된 학과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재수하면서 농업에 대한 책을 읽고 감명을 받은 거였다. 
그렇게해서 선택한 곳이 ‘연세대 생화학과’였다. 
농업과 생화학과?

“생화, 즉 꽃을 연구하는 학과인줄 알았어. 
원예학과 같은 거지. 
머니가 기독교 학교에 가라서 해서 연세대를 골랐고, 내가 학교를 간 1982년만 해도 생화학과는 연세대가 유일했거든.”

농담인줄 알았는데 진짜였다. 
한 달 정도 다녀보니 뭔가 이상했고, 생화를 연구하는 학과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하도 어이가 없었는데 같은 학번 친구 중에 자기와 같은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은 건 재밌었기 때문이에요. 
대학생활이 재밌더라고.
전공은 그냥 그랫는데 경제학, 철학, 사회학, 신학, 역사학 같은 학문을 공부하는 게 정말 대학 같았어. 
대학원도 신학과를 가려고 했다가 마지막에 생화학과 대학원에 원서를 냈지.”

이 관장은 친구 중에 아버지가 별을 보여주고, 삼촌이 과학 이야기를 해줬다는 말을 들을 때 참 부러웠다고 했다. 
그런 기억이 전혀 없어서다. 
그저 성적 따라서 오다 보니 거기까지 갔다가 4학년 2학기에 과학자가 되볼까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도 처음에 떨어졌지만 6개월 동안 맘잡고 공부하니까 부족한 기초지식을 채울 수 있었다.

유학 시절 커뮤니케이터로 진로 정해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는 언제쯤 자신의 미래로 생각하게 됐을까. 
이정모 관장은 군대에서 돌아온 뒤를 처음으로 꼽았다. 
자신이 과학이야기를 하면 주변 사람들이 재밌어 한다는 이유에서다. 
“실험실에만 머물러 있는 게 싫었어요. 
이상하게 내가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더라고요.”

과학잡지에 글을 쓰기도 했다. 
‘과학동아’에 아시모프 칼럼을 번역해 싣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글을 곧잘 써서인지 꽤 오랜 기간 맡게 됐다.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의 꿈은 독일로 유학 가서 더 진지해졌다.

“독일에 있는 본대 화학과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의대생을 위한 화학’이라는 강의를 맡게 됐어요. 
조교만 20명 넘는 강의였죠. 
저는 고갱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떻게 변하는지, 인체와 화학을 결합한 수업을 했어요. 
지도교수가 참 좋아했죠. 
‘방송 하면 잘 하겠다’라는 말도 들었어요. 
칭찬을 받으니까 우쭐해서 더 열심히 하게 됐죠.”

독일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다 듣고 논문만 남겨둔 상태였다. 
갑자기 지도교수가 다른데 연구소로 갔다. 
다시 다른 교수 밑에서 논문을 쓰려면 2년을 더 해야 했다. 
이 관장은 박사 수료 상태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책을 썼다. 
‘해리 포터’라는 책이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 시기라 ‘해리포터 사이언스’를 썼다. 그
리고 지금의 이 관장을 있게 한 ‘달력과 권력’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독일의 생태과학 잡지 지오(GEO)에서 ‘지난 1000년은 모두 며칠이었나’라는 퀴즈를 냈어요. 
난 내가 맞출 줄 알고 응모했는데 틀렸어요.
뭔가 하나를 착각한 거죠. 
왜 틀렸을까를 정리하다가 쓴 책이 ‘달력과 권력’이에요. 
이런저런 책을 내니까 안양대에서 강의를 맡아달라고 하고, 그 인연으로 박물관장까지 하게 된 거죠.”

눈물의 갈비찜

그 시절 유학생활이 다 그랬지만 이정모 관장도 “살면서 가장 어려웠을 때”라고 꼽을 정도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자신 있어 했던 유기화학에서 D를 받았을 때는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무엇보다 경제 문제가 이 관장을 힘들게 했다. 
당시 이 관장은 학비의 절반 정도를 장학금으로 받았다. 
나머지 절반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학원을 다니면서 다양한 일을 했다. 
인쇄소에서 일하기도 하고, 트럭 운전을 하기도 했다. 
집에 쌀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우리 집을 후원해주는 사람이 한분 있었는데 직업이 냉동기사, 그 중에서도 최고인 냉동 마이스터였어요. 
그 분이 냉동 식품을 종종 주니까 아내가 냉장고를 샀죠. 
그런데 어느날 갈비를 많이 주셨어요. 
처음에는 맛있었죠. 
그런데 일주일 내내 밥이나 빵, 다른 반찬은 못 먹고 갈비만 일주일 먹으니까 고기를 먹는데 눈물이 나왔어요. 
아내는 두고두고 ‘눈물의 갈비찜’이라고 불렀죠.”

부부에게는 유치원 가기 전 딸이 하나 있었다. 
어느 연휴에 인쇄소에서 일하는데 마침 시간당 임금이 두 배였다. 
밤새 작업을 하면서 유치원도 안 간 애를 인쇄소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만 졸다가 쇠로 된 책상에 머리를 찌었다.

“지금도 눈썹에 상처가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그래도 고통의 세월을 뒤로 하고 지금은 잘 나가는 박물관의 수장이다. 
개관 10년을 맞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자랑해달라고 했더니 특별한 전시물보다도 활동을 꼽았다.

“박물관은 고즈넉한 곳이 되어서는 안 되요. 
늘 사람들이 오고가고 시끄럽고, 뭔가가 열려야 하죠. 
특히 우리나라는 성인을 위한 좋은 강연이 별로 없었어요. 
우리가 요즘 성인 대상 강연을 시도하고 있는데 꽤 잘되고 있어요.”

대학에 사표를 내고 박물관에 지원할 때는 이런저런 계획으로 들뜨기도 했다. 
사실 박물관에 있으면서 곤충 채집 같은 자연사에 파묻혀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게 왠걸, 자신이 원하던 일은 5% 밖에 안 되고, 95%는 리더가 맡아야 할 사업이나 대외 업무였다. 
그래도 박물관을 위한 일이다 생각하고 꾹 참고 했더니 2년쯤 되니까 이제야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일을 늘릴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기는 자연사박물관을 꿈꾸고 있다.

오늘 하고 싶은 것 해라

이정모 관장에게 인생의 최종 목표는 없다. 
그저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오늘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목표다. 
자녀가 둘인데 역시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줄넘기 하는 게 즐거우면 그걸 하라고 한 것이다. 
첫째는 대학교 3학년인데 그런 가르침 속에서도 잘 컸다고 연신 웃음이다. 
둘째는 초등학교 6학년인데 “놀기만 한” 단다.
그래도 교육 방침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임기도 이제 2년 남았다. 
연임을 했으니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뭘 하든지 이 관장은 과학과 대중 사이의 어느 일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궁색하지만 않으면 돼요. 
내가 재밌고 행복하면 계속 할 거예요. 
니면 못하는 거죠. 
솔직히 우리 사회가 이제 생계를 걱정할 정도는 아냐. 
그저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걸 하면 돼요.”

하고 싶은 걸 무작정 하다 보니 요즘에는 라인 댄스라는 것도 즐긴다.
여럿이서 줄을 맞춰 추는 춤이다. 
하다보니까 춤에도 원리가 있단다. 
히 라인 댄스는 자기 절제의 시간이 많고 남들과 똑같이 해야 하니 때문에 협동심도 중요하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축구도 자주 한다. 
원래 한 주에 2번 했는데 지금은 한 달에 한 번밖에 못한다. 
그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뭘 해도, 뭘 봐도 좋지만 자기개발서는 좀 별로예요. 
그런 책 많이 본 사람, 성공 못하더라고요. 
차라리 역사책이나 철학책, 과학책을 보세요.”

이 관장은 대학 시절,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니 직업적인 성공이란 게 의외의 길에 많이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이 관장이 대학에 들어갈 때는 생물학 그러면 미생물학이나 분자생물학, 생화학, 유전학 같은 첨단 학문을 해야 했다. 
정작 야외에 가서 동물이나 식물을 직접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직접 야외에 나갔던 분류학 전공자는 지금 보니까 일자리가 생각보다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자연사박물관이나 생태원 이런 데가 많이 늘어났어요. 
돈을 조금 주지도 않고요. 
더구나 곤충을 좋아하는 친구면 평생 곤충과 살 수 있고 얼마나 좋아요. 
우리 박물관의 많은 친구들이 매일 행복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있어요.”

이 관장의 말이 이어졌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자신이 대학교 다닐 때 중문학이나 러시아문학 하는 친구들은 뭐 먹고 살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지금은 잘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의사는 현재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고 꼭 필요한 직업이지만 매년 수천 명의 의사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청소년이 의사가 될 때는 지금처럼 안정적인 직업이 아닐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세상이 20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대학생의 절반 정도는 대학교때 상상하지 못햇던 직업에서 일할 겁니다. 
예전에 스마트폰이니 앱이니 하는 걸 상상이나 했나요? 
지금의 직업에 얽매이면 안 돼요. 
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가장 좋아요. 
대학생도 전공 지식 자체보다는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수단을 배우는 게 좋아요. 
그게 교양이죠.”

이 관장에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즉 과학관이나 박물관 전문가, 또는 생태전문가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무엇인지 물었다. 
“특별한 건 없고, 수학을 못 해도 된다”는 이 관장은 뜻밖의 능력을 들었다.

“체력과 인내심이 필요해요. 
특히 글쓰기와 말하기 능력이 정말 중요하죠. 
모든 직업에 필요한 것은 소통 능력이에요. 
앞으로는 더 그럴 겁니다. 
지금부터 책이나 잡지 많이 읽고, 많이 써보세요.”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745&curPag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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