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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5년을 몰입하면 인생이 재밌어진다


박흥식 한국해양과학기술연구원 태평양해양연구센터장

오색 산호가 숲을 이루고 ‘니모’를 닮은 열대어들이 화려한 춤을 추는 곳. 
무서운 상어가 친근하게 다가오고, 돌고래가 점프하며 인사하는 곳.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의 태평양해양연구센터가 있는 ‘지구의 배꼽’, 남태평양 축의 산호바다다. 
그곳에서는 몸도 마음도 뜨거운 멋진 남자들이 묵묵히 바다와 산호초를 지키고 있었다. 
남태평양 사나이들의 대장, 박흥식 센터장(47)을 산호바다에서 직접 만났다.

오기로 시작한 해양학자의 길

적도에서 북쪽으로 7도쯤 올라간 남태평양 한가운데 산호초로 둘러싸인 큰 환초가 있다. 
1930, 40년대 일본군이 점령한 이곳에는 한국인 징용자 수천 명이 끌려와 강제로 커다란 등대와 기지를 지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태평양해양연구센터는 한국인의 한과 아픔이 서린 이곳에 9년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다. 
바다가 너무 잔잔하다고 말을 건네자 “동그란 환초 바깥에서 파도가 더 이상 오지 못하고 부서지기 때문에 안쪽은 호수처럼 잔잔한 것”이라고 말했다.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그에게 해양학자가 된 이유를 먼저 물었다.

“처음부터 해양학자의 꿈을 꾼 것은 아니었어요. 
오기라고 할까, 해양학과가 당시에는 인지도도 낮고 취업도 잘 안 됐는데 오히려 그래서 전공에 집중하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잘 하게 됐죠.”

인하대 해양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박 센터장은 해양과기원에 들어와 근무하면서 다시 박사 과정까지 공부했다. 
초등학교나 중?고교 시절을 물었더니 “부모 말 잘 듣는 조용한 학생이었다”고 답했다.

“사실 공부에 대한 애착은 없었어요. 
고등학교가 대학을 잘 보내는 학교여서 별로 진학 걱정을 안 했죠. 
처음엔 식품공학 하고 싶었는데 집에서 그 분야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건축학도 좋아했는데 잘 안 됐어요. 
버지가 이북에서 내려오셨는데 아들이 선장이 되기를 바랐어요. 
어머니는 의대 가기를 바랐고.”

지금은 해양연구센터장인 그는 뜻밖에도 고등학생 시절에는 선장 되는 걸 “죽어도 싫어했다”고 한다. 
오히려 먹거리에 관심이 많아서 서울대 농대를 쳤다가 삼수까지 하게 됐다. 
마지막 학력고사에서 평소 실력보다 30점이나 떨어졌다. 
더구나 점수가 나오는 날 군대 오라는 영장까지 나왔다. 
무리하게 지원할 수 없어서 아버지와 상의해 인하대 해양학과로 결정했다.

“아버지와의 딜(deal) 이었죠. 
사실 나는 내가 과 수석 하는 줄 알았어요. 
알고봤더니 차석이더라고. 
워낙 물을 좋아했고 수영을 6살부터 했으니 해양학이 싫지는 않았지. 
하지만 친구가 의대를 같이 가자는 말에 입학해서 사수까지 준비했어요.”

12년만에 정규직이 되다

하지만 의외로 대학 생활이나 공부가 재미있었다. 
특히 박 센터장이 몰입했던 것은 다이빙이었다. 
스쿠버 동아리에 들고, 입학하자마자 대학원 실험실에 들어가기도 했다. 
다이빙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학교 3학년 때는 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따서 지금 있는 해양과기원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전공 공부에도 몰입했다. 
생물도 열심히 공부했고 방학 때 대학원생을 만나 조언도 들었다. 
박 센터장은 “당시만 해도 해양학과의 미래가 막막해 보이니까 더 열심히 했다”며 “동기들이 날 보며 인간승리라고 한다”고 말한다.

입학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진로였지만, 대학에 들어와서는 모든 것을 미친 듯이 바쳤다. 
박 센터장은 “지금도 성격이 그렇다”며 “올인해 보자,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마음으로 해양과기원에 입사해 비정규직만 12년을 했다. 
지금의 그는 이런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에도 호주 뉴사우스웨일즈대에서 박사 과정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자 집안이 어려워졌고, 그는 고민 끝에 해양과기원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정규직으로 바뀌지 않는 것이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는 임시로 정규직으로 승진된 뒤 다시 ‘잘린’ 적도 있었다. 
일률적으로 정규직 몇 %를 줄여야 했던 시기라 일부러 그를 정규직으로 올렸던 것이다. 
2003년에야 정식으로 발령됐다. 
비록 과기원에서 그를 돌보지 않은 시간도 많았지만 그는 묵묵히 최선을 다해 연구소 안에서도 과제 수주 기준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신했다.

“친구들은 나를 인간승리라고 하지만 저는 믿음이 있어요. 
하나를 5년만 파면 최소한 투자한 것만큼은 건진다는 확신이죠. 
오기 때문에 몰입했고, 그래서 한우물을 팠고, 그 방향에서 재미를 찾았기 때문에 결국 이만큼 됐어요. 
내가 추구한 게 아니라 하다보니 따라온 거라고요. 
후배들에게 그래요. 
너무 짧게 보지 말라고요. 
그런 저를 믿고 이곳까지 따라온 학교 후배가 있습니다(태평양해양센터에서 함께 만난 윤건탁 박사였다).”

마흔 중반에도 영어 공부에 미치다

박 센터장은 태평양연구센터 설립부터 참여해 지금까지 이곳에 있는 산증인이다.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는 “센터 초기에는 다이빙 하는 연구원이 드물었다”며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외부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자는 생각에 미국에서 다이빙 강사 자격증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센터 초기에는 많은 정규직 연구원들이 자신에게 많은 일을 미뤄놓고 나 몰라라 했다고 한다. 
그는 끝까지 묵묵히 해냈다. 
전 센터장이 자신을 후임으로 추천하자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다. 
국내 박사 학위에 영어도 잘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센터장 시키느냐는 것이다.

“전임 센터장이 제 열정을 본 거죠.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이곳에서는 그런 사람 아니면 견뎌낼 수 없어요. 
그거야 옛날 얘기고 지금이야 누구도 말하지 않지요. 
사실 영어도 전 실전을 통해 배웠어요. 
토플 학원 한번 간 게 전부니까요. 하
지만 지금 감히 말하자면 영어 실력만 놓고 보면 연구소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겁니다. 
지금도 전 영어 공부 열심히 해요(인터뷰를 위해 한밤에 박 센터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그때도 센터장은 책상에 앉아 영어 문법책과 이메일 영작 책을 공부하고 있었다).”

기자는 청소년 8명으로 구성된 체험단과 함께 박 센터장이 있는 연구센터로 갔다. 
이곳을 축이라고 부르는데 미크로네시아라는 연방국의 한주(州)에 해당한다. 
박 센터장은 첫날 아침부터 “낮에는 무조건 바다에간다”고 선언하며 체험단을 들뜨게 했다. 
실제로 학생들은 매일 오후마다 가까운 바다에서 스노클링과 수영을 즐겼다. 
대부분 박 센터장도 바쁜 일정 속에 아이들과 함께 했다. 
특히 학생 한명한명을 직접 데리고 다이빙을 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이빙을 해봤다”며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다워서 평생 못 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루하루 바쁜 일정 속에 이처럼 시간과 에너지를 온통 소진하는 일에 직접 나서는 이유가 궁금했다.

“청소년을 교육 하는 걸 원래 좋아해요. 
내가 아는 걸 다른 사람들이 쉽게 얻어야 나도 성장합니다. 
해양은 특히 그래요. 
지금은 나아졌지만 저변이 확대되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왜 자꾸 놀라고 하냐고요?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일까요? 
사립초등학교를 나왔는데 어머니가 방학만 되면 시골에 내려보내 숙제도 못 하게 했어요. 
말 그대로 펑펑 놀게 했죠.”

또 하나의 이유는 거창하게도 국가관이었다. 
박 센터장은 자신에게 한때 비뚤어진 국가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오래 근무하다보니 생각도 바뀌고 긍정적인 국가관으로 바뀌었다.

“나는 국가의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내가 열심히 했는데 안 알아준다고 비관적이 될 필요가 있나요?”

흑진주 양식에 성공하다

태평양해양연구센터가 축의 바다에 자리잡은 이유는 산호바다 때문이다. 
박 센터장은 “생물 생산성이 높은 지역 하면 흔히 아마존 열대정글을 많이 생각하는데 산호초 지역의 생산성은 열대정글과 거의 같다”고 말했다. 
산호초 지역의 생물 생산성은 우리나라가 있는 온대지역의 초원이나 바다 연안의 10배에 달한다. 
더구나 축 산호초 지역은 전 세계 바다에서 두 번째로 생물 다양성이 풍부하다(첫번째는 동남아시아 바다). 
센터장은 “요즘은 국제 조약 때문에 해외 생물자원을 함부로 한국에 가져올 수가 없는데 축은 오래 전부터 협력을 맺어와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연구센터가 이뤄낸 대표적인 성과는 역시 2008년 국가과학기술 100선 상도 받은 ‘흑진주 대량 생산기술’이다. 
미크로네시아연방의 애로사업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만난 주지사의 첫 마디도 흑진주 양식 기술을 개발해 달라는 것이었다. 
보란 듯이 성공하니까 이 나라에도 떳떳하고 협력사업도 좀더 쉽게 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주목하는 것은 바이오디젤 같은 바이오연료나 생물소재로 쓸 수 있는 미세조류인 스피루리나 양식 연구다. 
체험단이 찾아갔을 때도 스피루리나를 키웠다가 수확하는 체험을 직접 해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양식 기술은 개발했고, 이제 대량생산 시스템만 갖춰주면 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 연구센터 중심으로 열대해양네트워크를 주도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일이에요. 
괌대학, 일본 고베대학, 태국 대학, 타이완 대학 등과 협력해 열대바다와 산호를 연구하는데 우리 센터가 주도하고 있죠. 
우리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거예요.”

뜨거운 가슴으로 몰입하라

몰입을 강조하는 그에게 직업에 대해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물었더니 또 ‘몰입하라’는 말이 돌아왔다.

“가장 좋은 건 꿈을 갖는 것이죠. 
설령 꿈이 없더라도 몰입하세요. 
3~5년을 몰입하면 자기 인생이 재밌어질 겁니다.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현재에 미쳐야 해요. 
그러면 미래가 따라옵니다. 
아, 그리고 우리같은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은 참 괜찮은 직업이에요. 
하하.”

그는 자신과 같은 해양학자를 포함해 자연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은 “순리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짧은 지식보다 세상의 조화를 알아야 하고, 약간은 철학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길고 늦고 오래 걸리는데 단기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자연과학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단다.

“공학은 테크닉을 알면 되지만 자연과학은 테크닉보다는 주변을 보는 폭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박 센터장에게 인생의 최종 목표를 물었다. 
그는 현재 그 목표를 향한 단계 중 어느 단계에 있는 걸까. 
그러나 뜻밖에도 소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면 바로 물러나겠다 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걸 더 발전시키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습니다. 
보직, 교수 자리 이런 것에 생각이 없어요. 
내 나이에 안 좋은 이야기 들려오면 은퇴해서 필리핀 가서 리조트에서 일할 거예요. 
오는 사람 반기고, 가는 사람 미련 안 갖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축에서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 한 시간 가량 연구소 주변을 돌아다녔다. 
길에서 만난 주민들은 하나같이 “좋은 아침”이라며 말을 건넸다. 
지 한마리를 삶아서 잔치를 벌이던 마을 주민이 고기 한 점을 툭 떼어줬다. 
맛있었다. 
주민들은 정이 넘쳤고, 웃음이 많았다. 
한참 가다보니 갈림길에 섰다. 
한 소녀가 다가와 “어디로 가느냐(Where are you going)”고 묻는다.

센터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열대바다를 바라보는데 소녀의 질문이 계속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곳에는 박 센터장을 비롯해 젊음을 불태우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박 센터장이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겠지만 그가 보여준 정신은 어디로 가지 않고 이곳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과학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몰입해서 하는 거라는 걸.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732&curPag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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