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과정 마치고 과학자 생활 시작
서울대 말고 연세대 간 이유는 ‘가까우니까’
이미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 된 오 교수에게 담임선생님은 서울대 진학을 권했다.
하지만 오 교수는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한다’는 자기만의 주관을 버리지 않았다.
배우고 싶은 기계공학기술만 공부할 수 있다면 학교가 무슨 상관이 있냐는 생각에 연세대학교를 선택했다.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를 포기하고 연세대를 선택한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신촌에 있는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결국 연세대 기계공학과 수석으로 입학했고, 4년 간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그는 인터뷰에서 ‘대학생활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궁금했지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 내용들, 고등수학이나 운동역학, 물리학 법칙 같은 것을 대학에서 다 알려줬기 때문이란다.
결국 하던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같은 대학에서 석사과정까지 졸업했다.
오 교수는 이때부터 은연중에 ‘사람처럼 걷는 로봇’을 만들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사졸업 논문 제목이 ‘인간의 운동능력 해석’이었다.
사람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척추와 추간판(디스크)이 받는 저항력을 연구한 것으로, 지금처럼 여러 가지 학문을 합쳐서 연구하는 융·복합연구가 활성화 돼 있지 않던 시절이다 보니 기계공학과 학생이 연구했을 거라고 보기는 어려웠던 연구주제였다.
오 교수는 이렇게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한국원자력연구원(원자력연)’으로 바뀐 ‘한국원자력연구소’ 기계제2연구실 연구원으로 취업했다.
당시에도 오 교수는 탁월한 실력을 과시했다. 다른 과학자들이 도저히 국내 개발이 불가능 할 거라고 생각했던 원전용 제어계측 시스템 개발을 불과 몇 달 만에 끝내버려 주변을 모두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오 교수는 그 이후 곧 원자력연을 그만 두었지만, 그가 처음 시작한 원전 제어계측 시스템은 우리나라가 지금도 외국에 비해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분야 중 하나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처음 물꼬를 튼 덕분에 독자적인 개발을 계속한 결과 이만한 기틀이 쌓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 평생 가장 재미있는 건 기계 만들기”
미국 유학 선택하고 로봇과학자로서 첫 발 내딛다
오 교수는 원자력연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그대로 연구소에 남기에는 조금 아쉽다고 생각했다.
원자력 연구 역시 중요하고 가치가 큰 일이었지만, 기계장치를 뚝딱거리며 만들기 좋아했던 만큼 원자력 한 분야에 집중하긴 싫었기 때문이다.
이왕 시작한 공부이니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싶었고, 대학교수가 되면 스스로 하고 싶은 주제를 정해 마음껏 연구 할 수 있다는 점도 유학을 결정하는 큰 계기가 됐다.
결국 오 교수는 박사과정을 공부하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UC 버클리)로 떠났다.
박사과정 때도 오 교수의 전공은 기계공학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CNC(수치제어) 분야에 흥미를 느꼈다.
쉽게 말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법을 이용한 자동화 분야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흔히 쓰는 말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동제어’라는 단어 자체를 들어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CNC기술은 로켓 등의 정밀무기는 물론 공장자동화, 각종 로봇을 다루는 기본 학문이다.
각종 센서를 붙여 주면, 이 센서에서 나오는 정보를 취합해 기계장치가 어디로 움직일지 계산해 줄 수 있기 때문에 동작순서를 꼼꼼하게 잘 설정해 주면 자기가 알아서 척척 일을 하는 기계를 만들 수도 있다.
결국 CNC 기술이란 로봇분야의 기본학문인 셈이다.
로봇제어 분야 국내 일인자로서의 입지를 착실히 다졌던 시기였다.
한국 돌아와 로봇과학자 삶 시작
KAIST 교수가 되다
졸업 후 오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1985년 KAIST 교수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로봇 한 가지에 매진하고 있다.
오 교수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을 꼽아 달라는 질문에 ‘항상 지금 이 순간’이라고 답했다.
과학자로서 연구를 하다 보면 모든 문제는 결국 풀리기 마련이니, 지금 당장 도전하고 있는 과제가 정말로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날의 연구에 집중하는 과학자로서의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오 교수도 정말 힘든 시기를 겪었다.
스스로 최고의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는 로봇 ‘휴보’의 첫 번째 공개 행사다.
로봇 ‘휴보’의 첫 번째 공개는 2004년 이뤄졌다.
그 당시 휴보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국 산업박람회 방문에 맞춰, 현지에서 양국 정상 앞에서 한국 과학기술력을 자랑하기로 돼 있었다.
문제는 기술적 개발은 거의 다 끝났지만, 로봇 몸체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단계였다.
오 교수는 일단 로봇 부품을 영국 현지로 실어 보냈고, 호텔 로비 구석을 빌려 칸막이를 치고 며칠 밤을 새 가며 현장에서 로봇을 조립했다.
아침 9시가 시연 시간이었는데, 전날 밤 경호실과 주한영국대사 등이 작업 상황을 구경 온 자리에서 로봇이 합선돼 불꽃이 튀기며 넘어지기도 했다.
오 교수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뒤로 하고 새벽 2시에 겨우 로봇을 다 조립했고, 시운전에도 성공했어요.
그런데 대통령 앞에 내 보이는 로봇이니 보안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 수 없이 호텔 방문을 두들겨 새벽 2시에 잠을 자고 있는 경호실 직원을 깨워서 검사를 받았었죠.
그러고 보니 새벽 6시. 행사 시작 시간인 9시까지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샜어요.
그때 함께 고생한 연구실 직원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한국의 2족보행 로봇 역사>
“로봇으로 세계 구한다”
휴보로 세계 로봇공학 발전 기틀 마련할 것
이렇게 개발한 로봇 휴보는 지금 세계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버지니아텍, 카네기멜론대 등 6개 대학에서 연구용으로 휴보를 구입해 갔다.
가격은 대당 5억 원이 넘는다.
인간형 로봇은 일본의 아시모 등이 유명하지만 연구용으로 실제 판매된 것은 휴보2가 세계에서 처음이었다.
최근에는 세계적 IT기업 구글에서도 휴보 2대를 구입했다.
오 교수는 미국 공동연구팀과 함께 미국 국방성산하 고등연구계획국(DARPA)이 개최하고 있는 ‘DARPA로보틱스챌린지’에 출전하고 있다.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로봇이 파괴된 원자로로 들어가 사람 대신 사고현장을 복구하고 나오는 시합이다.
아직 기술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사실상 세계를 구하는 로봇을 개발하는 셈이 된다.
오 교수팀은 휴보를 개조한 ‘DRC휴보’로 이미 예선을 통과하고 올해(2013년) 12월 열리는 연말 최종 경진대회에 참여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등 세계적인 연구기관이 출전하기 때문에 우승을 장담하긴 어렵지만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오 교수는 “세계 각국에서 휴보2를 통해 로봇제어 기술을 연구하고, 그 성과를 공유하는 ‘휴보 공동 연구그룹’이 형성되고 있다”며 “휴보가 세계 로봇기술 발전을 위한 기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과학자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무엇보다 열정을 가져라”라고 주문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 그것만 하면 가슴이 벅차도록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있다면 그 일에 일생을 걸고 도전하라는 의미다.
오 교수는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으로 ‘기본을 튼튼히 하라’고 했다.
그는 “과학자가 뉴턴, 아인슈타인, 맥스웰 같은 대 선배들이 연구성과를 철저히 공부해 두지 않고 무언가 새로운 걸 시도한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기초적인 학문을 닦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걸 연구해 보겠다는 건 과학자가 아니라 단순한 몽상가일 뿐”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