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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분야

(과학) 수리온 하늘에 띄웠다. 다음은 민간 항공기다


이대성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차세대중형항공기 사업단장

2011년 가을. 
국내 최대의 무기·항공우주 관련 기술 전시회인 ‘서울 국제항공우주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 개막을 하루 앞둔 10월 17일 낮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 
지금까지 사람들이 본 적이 없는 헬기 한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 헬기는 약 10분 동안 성남공항 상공을 오고가며 묘기를 부렸다. 
중에 멈춰 서더니 후진을 하고, 하늘에 8자를 그리며 빠르게 선회하기도 했다. 
시속 900km가 넘는 빠른 속도로 날아오다가 급정지를 하거나 시속 500km가 넘는 속도로 수직 상승해 제자리에서 360도를 빙빙 돌기도 했다. 
한국최초의 다목적 군사용 헬기 ‘수리온’이 대중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수리온은 우리나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과 국방과학연구소(ADD),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3개 주관기업이 함께 일군, 우리나라 최대의 항공기 개발 성과다. 
이 과정에서 항우연의 연구개발 사업을 총괄하며 국산 헬기기술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 있다. 
항우연 항공분야 사업을 총괄하는 이대성 단장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항공과학자인 이 단장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부품가공업 하던 부친 영향
어릴 적부터 공학, 기계 제작 관심 많아

“어린 시절엔 아버지가 공장을 운영하셨어요. 집에서 자주 도면을 펼쳐 놓고 일을 하셨고, 기계장치도 굉장히 여러 종류가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런 영향을 많이 받은 게 아닐까 싶어요.”

이 단장은 왜 과학자의 길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어릴 적 가정환경 이야기를 꺼냈다.

초등학교 때 이 단장은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고 했다. 
집에 있는 시계, 라디오 등을 모조리 분해해 놓았다가 혼이 나는 건 일상 다반사였다. 
공부를 하기 보다는 친구들과 나가서 뛰어 노는 것을 좋아했다. 
교 성적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시험(그 당시 중학교는 의무교육이 아니었으며,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에 떨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 단장은 1년간 재수를 했다. 
그 사이에 입시제도가 바뀌어 중학교 입학은 시험제에서 추천제로 바뀌었고, 재수한 보람도 없이 무시험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정형편이 극도로 안 좋아졌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과외 선생님을 찾긴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이 단장은 중, 고등학교 시절 주로 혼자서 공부를 했다. 
당시엔 누구나 과외를 하던 시절이었고, 선생님들도 과외를 추천하곤 했다. 
하지만 이 단장은 친구에게 부탁해 과외선생님들이 쓰는 학습지를 복사해 와 공부를 하면서도 성적은 줄곧 상위권을 유지했다.

이 단장은 중고등학교 시절 운동을 좋아했다고 했다. 
친구들과 농구, 축구 등을 하며 뛰어 노는 것이 큰 기쁨이었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든 동료들과 함께 노력해 좋은 성과가 있다’는 평소 생활 철학을 얻었다고 했다.

막연히 ‘이공계로 진출해야 겠다’는 생각은 중학교 3학년부터 갖게 됐다고 했다.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 생중계를 보면서 이 단장은 ‘과학이야 말로 정말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단다. 
한 때는 항공기조종사를 꿈꾸기도 했다.

전산유체역할 분야 전문가로 거듭나
적성에 맞는 공부 하고 싶어 공대 선택

대학 진로를 선택할 때는 부모님과 다소 의견충돌이 있었다. 
이 단장의 부모들은 그가 의대나 법대를 가서 전문직업인으로 살길 원했다. 
지만 이 단장은 어릴 적부터 꿈꾸던 공대가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공대는 당시 사회적으로 대우도 좋았다. 
이 단장은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고, 같은 학교에서 석사과정도 마쳤다.

당시엔 서울대 기계공학과 석사 과정까지 졸업했다면 국내 일류기업을 골라서 취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단장은 유학을 선택했다. 
학을 선택한 이유는 다름 아닌 여자친구 때문이었다. 
결혼을 하고 싶던 여자친구가 공부를 계속 하고자 했다. 
장인, 장모가 될 사람은 ‘함께 유학을 가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했고, 결국 백방으로 수소문 해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았다. 
서울대학·석사과정 성적이 우수해 장학금 까지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는 즉시 박사과정을 공부하러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결혼식을 올리고 불과 3일 후 신혼여행을 겸해서 즉시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유학 생활은 원만했다. 
유학생이지만 박사과정 학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렇게 남들에게 인정받는 리더십은 이 단장의 큰 정점이다. 
그는 국내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학사·석사과정 학생회장을 지냈다.

이 단장은 기계공학 중에서도 CFD(전산유체역학)이라는 학문이 특기다. 
석사학위 때도 이 과목을 주로 공부했고, 박사학위도 CFD 관련된 연구를 해서 받았다. 
공기나 물의 흐름을 컴퓨터를 이용해 파악하는 학문이다. 
결국 비행기란 이런 흐름을 조종하는 기계장치를 만드는 것이니 이미 석사과정 때 항공 과학자로서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그는 “미국은 큰 나라다 보니 지리공부도 할 수 있었고, 넓은 세상을 보면서 편협하지 않고 스케일이 큰 사고방식을 기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과학자 되고 싶었다”
미국 굴지의 항공 기업 연구원 생활 접고 우리나라 항우연 선택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연구조교 생활까지 마친 그는 ‘텍스트론’ 이라는 미국 기업에 취업했다. 
섬유사업으로 시작해 항공기, 우주선 등 다양한 첨단 제품과 기계장치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복합기업이다. 
산하 브랜드로 벨헬리콥터, 세스나항공기 등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굴지의 항공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그가 맡은 일은 역시 항공우주 분야 첨단제품을 개발하는 일이다. 
당시 미국과 구소련(현 러시아)과의 냉전이 지속되며 각종 국방제품 수요가 많았다. 
텍스트론 연구원 생활은 5년 정도 계속됐고, 기업 내부에서도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항공분야는 물론 우주 분야 연구개발에도 관여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이 단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던 해에 휴가를 내고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한국을 다녀갔다. 
한국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처음 가는 아들은 비행기에 탑승하자 이렇게 물었다. 
“아빠. 이 비행기는 한국에서 만든거야?” 아니라고 답하자 아들은 다시 “엔진이나 날개는?”이라고 되물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이 단장은 그 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귀국을 결심했다. 
아버지가 항공우주 분야 과학자면서, 떳떳하게 아들에게 한국산 비행기 한 번 태워주지 못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이 단장을 원하는 곳은 많았다. 
그의 전공과 앞선 기술력을 높이 산 자동차 회사에서도 연락이 왔다. 
하지만 이 단장은 모든 제의를 뒤로 하고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택했다. 
비행기와 로켓 등 여러 분야를 주도적으로 연구하려면 대학이나 민간 기업 보다는 국책연구기관이 가장 잘 어울릴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항상 ‘팀이 함께 일해야 최선의 성과가 있다’는 개인적인 업무 스타일도 이런 결정을 내리는데 큰 요인이 됐다.

이 단장은 “미국 기업연구소에서의 생활도 재미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당시 우리나라는 항공·우주분야 불모지였기 때문에 어릴적 꿈과 맞물려 이 분야를 개척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항공 분야 국내 최고 전문가로 우뚝
한국 최초의 액체로켓 엔진 개발 이어 수리온 개발 사업도 성공

항우연에 들어오고 그가 처음 맡은 일은 로켓 추진기관 연구였다. 
의 특기인 CFD 기술을 살려 한국형 로켓 개발의 ‘엔진 설계’ 프로젝트를 맡았던 것이다.

한국의 실험용 로켓은 항우연이 처음 개발했던 KSR-I, 그 후속모델인 KSR-II는 모두 고체로켓이었다. 
고성능 우주로켓을 개발하려면 액체로켓 기술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사업이었다.
이때 이 단장이 개발했던 엔진 기술은 지금까지 이어졌다. 
또 이 단장은 이 과정에서 기존의 ‘가압식’ 액체로켓 기술보다 진보된 ‘터보펌프’ 액체로켓 기술을 별도로 연구해 우리나라 액체로켓 기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후 KSR-III 이외에 우리나라에서 개발하고 있는 액체로켓은 나로호를 비롯해, 현재 개발 중인 한국형 우주발사체(KSLV-II) 까지 모두 같은 터보펌프 방식이다.

액체로켓 개발 과제를 마치고, 러시아와의 나로호 협력사업까지 이끌어낸 이 단장은 그 이후 2004년 항공분야를 총괄하는 자리로 옮긴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성과는 누가 뭐래도 한국형 헬기 개발사업, 즉 수리온 개발을 총괄 지휘했던 일이다. 
수리온은 연구과제가 워낙 크다보니 2006년부터 6년동안이나 지속됐다. 
ADD와 KAI, 항우연 3개 기관의 합작으로 이뤄졌는데, 항우연이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업을 일괄 지휘하는 일이니 적잖은 역량과 책임이 따랐다.
<우리나라의 독자개발 항공기 현황>



한국 항공 산업 변화 이끈 선구자
앞으로 개발할 한국 최초의 민간용 중형 항공기 기대 커

항우연에서 이 단장이 참여한 사업은 다양하다. 
한국 최초의 초음속고등훈련기인 T-50의 풍동 및 구조 실험 참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보라매(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업 분야 설계 검토 참여 등, 우리나라의 굵직한 항공기 사업은 거의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쳤다. 
최근 화제가 된변신 비행기 ‘스마트무인기’도 마찬가지다. 
최근 개발에 성공하고 KAI가 제작 판매하고 있는 4인승 항공기 ‘나라온’ 사업관리 역시 이 단장의 역할이었다.

이 단장은 자신이 앞으로 항우연에 있는 동안 남은 숙제로 90~100명 정도가 탑승하는, 한국형 중형 민간항공기 개발 사업을 성공하고 싶다고 했다. 
이정도 규모면 우리나라에서도 국내선 수요를 상당부분 대치할 수 있고, 해외 여러 나라에 판매도 기대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군용 항공기 면허 생산을 최근에야 독자 개발을 어느 정도 이뤄냈다. 
하지만 항공기 강국은 어느나라나 군용보다는 민수용 항공기 생산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도 항공·우주 분야 강국으로 거듭나려면 무엇보다 민수용 항공기를 개발하고 시장을 창출에 성공해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곤란한 건 역시 외국기업과의 협력이다. 
기술이야 연구비를 투자해 개발하면 되겠지만, 마케팅 차원에서 꼭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까지 한국산 비행기를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메이드 인 코리아’ 비행기의 판로 확보가 문제다. 
또 비행기란 세계를 날아다니는 물건이다 보니 국가별로 서비스 망을 갖추는 것도 필요하다. 
결국 초창기 사업은 외국과의 협력이 꼭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 단장은 과학자가 되고 싶은 젊은이들에게 “무엇보다 호기심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또 이런 호기심이 생기면,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의지,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세상에 많은 경쟁자가 있다지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어제의 내가 아니겠느냐”며 “매일 매일,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원하는 모습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684&curPag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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