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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상추 팔아서 ‘최연소 100인의 리더’가 되었어요


김가영 생생농업유통 대표

김연아 다음으로 최연소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의 리더’에 선정된 김가영 씨는 (주)생생농업유통의 대표다. 
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회사를 창업해 현재 도시와 농촌을 함께 살리는 유통을 고민하고 있다. 
1986년생인 그녀의 일 자체가 농업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화여대의 여학생이 생전 처음 내려간 농촌에서 농사를 시작한 김가영 대표의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많은 고정관념을 깨준다.

처음 농촌에 갔다가 반해버렸죠

생생농업유통은 쉽게 말하면 채소 장사다. 
시장에 가보면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다가 판매를 하는 시장 상인들이 있는데 김 대표는 그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산지에서 농민들한테 농산물을 직접 받아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는 일을 한다. 
게다가 사오기만 하는 게 아니고 직접 재배하는 양이 꽤 많다.

김 대표는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했지만 1학년 1학기에 학사경고를 받았다. 
대학은 좋은 데 들어갔지만 그 이후에는 동기부여가 부족했다. 
또 날고 기는 친구들이 들어왔으니 경쟁도 치열했다. 
대학교에 가서 오히려 고민이 가장 컸다. 
졸업을 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민하던 중에 농활에 따라 가게 되었다.

사실 서울에서 나서 자라온 김 대표가 농촌을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늘이 보이고, 땅은 초록색, 하늘은 파란색, 이 자연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자신한테 농사 짓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여자인데도 일을 잘해서 동네 주민들이 예뻐해줬고 마치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농촌이 좋았다.

그대로 농촌에 남는다고 했을 때 많은 친구들은 말렸다. 
농촌에는 희망이 없다는 고정관념이었다. 
그러나 김 대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 학교에서는 친구들만큼 공부를 하지 못했으니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 잠깐 올라갔다가 다시 시골로 왔다. 
후로는 시골에서 3, 4주 있다가 잠깐씩 서울에 가는 생활을 지속했다.

시골에 있다 보니 할머니들이 살아온 얘기도 듣게 되고, 농촌의 현실도 좀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농사를 지어놓으면 장사꾼들이 와서 헐값에 가져가는 것도 눈으로 목격하게 되고, 농촌에서 평생 농사를 지은 사람들이 막 빚더미에 올라 있는 것도 보았다. 
그분들을 돕고 싶었다.
‘서울에 올라가서 이걸 팔아주면 참 이분들 좋아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연습삼아 거기 있는 것들을 많이 가져다가 서울에서 팔았다. 
인맥을 총 동원해서 아주 노골적으로 판매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짜 베테랑 장사꾼이 되어 있었다. 
거래처까지 생겼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령 헤르메스처럼 어느 순간 서울에 있는 사람들과 농사짓는 사람들 사이에서 얘기를 전하고 있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중개에 대한 공부는 대학교 1학년 때 다 마쳐버렸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 해 겨울이었다.
2005년, 1학년 말이었다. 
그동안 농산물을 팔아 번 돈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10평 농사에서 시작해 점점 커져 사업이 되었어요

처음에는 농사를 직접 지었다. 
아버지의 고향인 남원에 무작정 내려가서 상추농사를 10평을 지었다. 
작은 평수였는데도 생각보다 상추가 엄청 많이 나서 혼자 먹을 수가 없으니까 친척들에게 줬다. 
그래도 다 먹지 못해서 지인들, 교수님, 동창들까지, 점점 확대되어갔다.

그런데 상추를 받은 사람들이 “이거 진짜 괜찮다, 질이 좋다.”라고 얘기를 하면서 팔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그래서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일단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한테 소개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얼떨결에 첫 번째 주문을 받았다.

주문이 점점 늘어났고 그 물량을 좀 맞춰주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농사가 계획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모르게 농사꾼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땅도 넓혀야 할 때가 왔다. 
시골에서 농사 지을 땅을 빌리는 데는 돈이 얼마 들지 않았기 때문에 땅도 늘렸다. 
그런데 농사가 지겨워지는 참에 동네 할머니가 관심을 보였다. 
김 대표가 만들어놓은 밭에서 할머니가 농사를 짓도 수익을 반반씩 나누는 동업 형태를 시작했다. 
그러다 할머니가 주변 할머니들에게 소문을 내면서 소일거리가 필요한 할머니들이 모여들었다. 
김 대표의 밭에서 상추를 키우면 그 상추를 또 김 대표가 팔아다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좋았고, 농사만 짓고 있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그야말로 윈윈(win-win)관계였다. 
할머니들이 재배한 상추를 갖다 팔아주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농사를 직접 짓는 유통업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도매상이 끼지 않으니 좋은 농산물을 저렴하게 팔 수 있었다. 
소비자도 생산자도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었다. 
그 사실 역시 몸으로 겪으며 깨달았다.

부모님과 의견이 달라도 당당하게 얘기하세요

김 대표는 선린인터넷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인터넷 특성화고등학교다. 
이곳을 나오면 대부분 공대에 입학한다. 
그런데 김 대표는 왜 사회학을 택한 것일까?

컴퓨터 언어는 약속이다.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해서 약속들을 쭉 규정해놓은 게 현대의 컴퓨터 공학이다. 
컴퓨터 언어를 공부하다 보니 ‘이런걸 누가 만들었을까’가 궁금해졌다. 
선생님한테 물어봤더니 다 사회에 있는 제도를 컴퓨터 분야에 맞춰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회가 너무 궁금했다. 
사회는 엄청난 약속들의 논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니, 마치 매트릭스처럼 흥미로웠다. 그
래서 뭐도 모르고 사회학과를 택했다.
김 대표는 선택의 순간에 언제나 제일 중요했던 건 ‘내가 어떤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냐’였다.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의 눈치, 어른들의 조언, 혹은 더 나아가서 비아냥거림, 조소도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김 대표는 중학교 때까지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였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시점이었으니까 IMF직후, “그러니까 서서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은행이 망하는 걸 보고 되게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이 사회가 나를 배신하는 느낌을 받은 거예요. 
그냥 다 싫었어요. 
그래서 방황을 하긴 했지만 성적은 유지했죠. 
당히 놀고 적당히 게임도 하고 적당히 공상도 하고 그런 애였어요.” 
런데 공부할 동기를 이미 잃어버렸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선생님 입장에서는 ‘전문기술을 배운다는 게 이 친구한테 날개를 달아줄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인터넷고등학교를 권유했고 김 대표도 자신에게 그 길이 맞다고 생각했다.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던 부모님은 반대했다. 
특히 어머니는 앓아누울 정도로 심하게 반대했다. 
김 대표는 반발심이 생겼다. ‘엄마가 틀렸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소년기에 부모님과 갈등이 심했지만 반항을 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고 김 대표는 생각한다. 
반항은 어른들의 시각일 뿐 아이들의 시각으로는 어른들에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시기에 부모님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시기는 온다. 
그 시기가 늦게 올수록 힘들어진다. 
그러니 지금부터 부모님과 싸우는 연습을 해봐야 한다고 김 대표는 말한다.

김 대표는 대학교에 합격한 것도 합격한 후에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단 부모님을 상처 주는 반항이 아니라 의견이 다르다면 그것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교에 가고 난 이후에는 자립할 것.
김 대표는 완전히 자립했다. 
부모님한테 자신의 의견을 말하려면 경제적 자립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매일 먹는 먹거리 이제 우습게 보지 마세요

김 대표는 2010년, 자신이 농사짓고 유통하는 식자재를 활용하는 분식 체인 ‘국대떡볶이’를 지인들과 함께 창업했다. 
생생유통에선 대표를, 국대떡볶이에선 이사직을 맡고 있다. 
농산물을 판매할 경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좋은 식재료를 찾는 사람을 만나게 됐고 같이 회사를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생생농업유통은 친환경 농산물을 적당한 가격에 사서 농민들이 일정 수준 이상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팔 때도 적당한 가격에 팔아 소비자들이 건강을 지키면서 만족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 모델을 갖고 있다. 
국대떡볶이는 생생농업유통이 공급하는 좋은 식자재를 쓴다. 
리고 8년 만에 두 회사 합쳐 직원 100명, 연 매출 130억원의 기업이 되었다. 
사회적인 책무를 다하면서도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꼭 거창한 것으로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추를 먹는 것이나, 떡볶이를 먹는 것은 일상적이고 단순한 소비지만 이런 소비 행동이 할머니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더 많이 나눌 수 있게 해준다. 
소비자가 좋아서 하는 일이 사회에도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김 대표는 물류유통 쪽에서 국내 농산물을 전문으로 하는 권위 있는 유통업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먹거리에서 위험이 터지면 기업이 망할 정도로 요즘은 먹거리에 대한 의식이 높아졌다. 
대부분의 외식 기업들은 이토록 큰 위험, 이 불특정한 위협을 관리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그녀가 생각하는 농산물 유통업자로써의 일이다.

바다에 배만 띄운다고 배가 저절로 가지는 않잖아요?

김 대표는 고등학교 때도 창업을 한 적이 있다. 
친구들과 함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는 회사를 만들었다. 
리더 역할을 맡았던 김 대표는 여러가지 일을 겪으며 한계가 여실히 느꼈다. 
당시 워낙 어렸고 세금이고 뭐고 아무것도 몰랐다. 
친구들이랑 일을 하다 보니 인간적인 문제도 많이 생겼다. 
문제가 팍팍 터지는데 처음에는 남 원망도 해보고 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보니까 자신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 경험은 아픔도 많았지만 인생에 도움도 많이 됐다. 
도전하는 건 좋은 거라 생각한다.

사실 김 대표는 항상 리더 스타일이었다. 
4남매의 첫째이기도 하고, 주도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매력적인 리더는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그러다 대학공부를 하고 세상에 대해서 좀 알게 되면서 오히려 그 성향을 잘 다듬어서 리더십에 반영했다.

김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회사 직원들이 행복한 것이다.
그 사람들의 의지와 성장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회사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회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생생농업유통 직원들은 웬만한 기업보다 처우가 좋다. 
근무시간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고, 쉬는 휴일도 일년에 8주가량이나 된다. 
월급 수준은 180만 원에서 250만 원이며 직군, 직무에 따라 다르다. 
매년 상반기, 하반기에 단체로 스키장에 다닌다.

“주제를 알아야 되요. 분수를 알아야 되요.”

김 대표는 CEO로서 가장 먼저 갖춰야 할 요건을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서 팔이 하나 없으면 팔이 하나 없어도 움직일 수 있는 배를 구해야한다. 
팔이 하나 없는데도 ‘내 몸에는 팔이 있다’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내 몸 하나, 어디에 서있는지도 정확하게 판단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같은 배에 태울 수는 없다. 
만약에 요트라고 하면 이 제대로 배를 바다 위에 띄울 수도 없는데 누굴 태우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 바다에 배 띄우면 되겠지.’ 하고 간단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바다가 깊냐 높냐, 파도는 많이 치냐, 조수간만의 차는 어떻게 되냐, 바닷물의 염도는 어떻냐, 이 안에 살고 있는 식인상어가 있냐 없냐, 상황에 따라서 어떤 배를 어떤 시기에 띄워야 될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험도 필요하다.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동기도 중요하다. 
그저 직장 다니기 싫다고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창업을 너무 현실로만 받아들이는 것도 안좋고, 너무 이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지 않다. 
그저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출처커리어패스   https://www.career.go.kr/path/board/case/view.do?bbsSeq=126769&cur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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